36.
애당초 흑남 의식은 흑마법사들만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하인이 흑남이 됐으니 당혹스럽겠지.’
“아크 교수! 의식을 취소할 수는 없는 겁니까?!”
“교수님! 농담이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책임을 질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연히 의식을 주관했던 아크 교수에게 쏠릴 수밖에 없을 터.
“허허…….”
아크 교수는 분노를 터뜨리는 선정자들을 보며 힘겹게 미소를 보이다가.
곧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뭐라고요?”
“허허, 애당초 흑남 의식을 한 이유는 흑남을 선정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리고 흑남은 탄생했습니다.”
아크 교수가 내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내 팔을 번쩍 드는 것 아닌가?
“다들 보시지요! 여기 마신의 인정을 받은 흑남의 징표가 뚜렷이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하인이 흑남이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혈탑의 학생, 호레이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날 쏘아보며 소리친다.
“너희…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야! 뭘 한 거냐고! 내가 이번 의식을 위해 뭘 바쳤는지 알아?! 그런데 겨우 흑남이 된 새끼가 하인이라고?!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호레이가 악다구니를 지르자.
다른 이들도 동의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흑남 의식을 해! 다시 하라고!”
“허허, 이미 의식은 끝났네. 이미 그는 마신의 선택을 받았어. 너는 신께서 선택을 번복하실 거라 생각하나?”
“알 게 뭐야! 저딴 쓰레기 새끼가 흑남? 나는 인정 못 해! 인정 못……!”
호레이가 분노에 눈이 뒤집혀 지팡이를 들려던 그때.
콰작-
갑자기 아크 교수가 손을 들어 호레이의 낯짝을 힘껏 후려치는 것 아닌가?
‘무슨 신관장의 힘이…….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
“크에엑!”
호레이가 힘없이 바닥을 뒹굴자.
아크 교수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허허, 이미 의식은 끝났으니 흑남님 앞에서 무례한 발언은 삼가 주게.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아크 교수가 내게 고개를 숙이자.
‘와씨… 이 사이비 늙다리가 나한테 고개를 숙일 줄이야……. 적응이 안 되네.’
나는 한순간에 달라진 그의 태도에 혼란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허허, 당장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기 어려우시겠지요. 하지만 곧 적응하실 겁니다.”
“교수님…….”
“이제부턴 아크 교수라고 부르시지요.”
아크 교수의 태세 전환에 내가 입을 떼려던 그때.
“…의식은 종료됐다. 이로써 흑남이 이 자리에 탄생했음을 알린다.”
볼드 학장이 굳은 얼굴로 소리치자.
수많은 관객들로 붐비는 경기장 안이 고요해진다.
“그… 이름이… 랄프? 랄프, 나와라.”
볼드 학장이 제단 위에서 내게 손을 까딱이자.
‘후우…….’
나는 천천히 제단으로 걸어가며 힐끔 경기장 안을 살폈다.
‘어이구, 눈빛들이 아주 그냥 누구 하나 죽이겠어?’
수많은 적의와 질시가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나는 볼드 학장의 앞으로 나아갔다.
“이해할 수가 없지만… 네가 흑남이 된 데는 분명한 마신님의 뜻이 있을 테지.”
볼드 학장은 잠시간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두 팔을 하늘로 뻗는다.
“마신 베논이시여! 여기 최후의 선택을 받은 당신의 종에게 축복을! 흑탑에 영광을 허락하시옵소서!”
그러자.
화아아아악-
음침하고도 검은 기둥이 내 머리 위로 내려와.
나를 감싸듯 덮는 것 아닌가?
‘이건…….’
“허… 정말 베논 님께서 응답하시다니…….”
“저놈이 진짜 흑남이라고? 맙소사…….”
관중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오는 사이.
“베논 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셨다! 흑남의 탄생을! 베논의 이름을 찬양하라!”
볼드 학장이 경기장이 떠나가라 소리친다.
‘흑남… 흑남이라.’
나는 나의 손등을 흘끔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선행과 악행의 기준에 대해 명확한 정립을 할 필요가 있어.’
두 신이 내게 준 축복.
그 기준을 명확히 알아내야 나도 그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 터.
‘당연히 착한 일을 하면 선행이고, 나쁜 일을 하면 악행일 텐데…….’
나는 시선을 돌려 흑카데미를 바라봤다.
‘만약 흑카데미를 불태우면 선행인 걸까, 아니면 악행인 걸까?’
불태운다는 행위 자체는 악행에 가까울 터.
하지만 그 대상이 흑마법사를 육성하는 기관이라면 그건 선행인 걸까?
‘확인을 할 필요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볼드 학장이 하늘로 뻗었던 손을 내리곤 나를 바라본다.
“흑남님, 이제 이동하시지요.”
* * *
여하튼 드디어 길고 길었던 흑남 의식이 끝났다.
‘후… 이것도 오랜만에 입네.’
난 후줄근한 옷을 벗어 던지고 제공 받은 말끔한 사교복으로 갈아입곤.
흑카데미로 들어섰다.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되네.’
아크 교수에 이어 볼드 학장까지 내게 존칭을 할 줄이야.
‘대체 흑남이 어느 정도의 위치이기에 학장까지 태도를 바꾼 걸까?’
내가 복도를 걸어가던 그때.
“어머, 드레스 예쁘다. 어디서 샀어?”
“울란의 드레스 샵에서 직접 맞춘 거야. 괜찮지?”
“너무 예뻐!”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여학생들이 복도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
“하아… 그보다 큰일이야. 이번 파티에서 괜찮은 남편감을 찾아야 할 텐데…….”
“나도… 아버님이 졸업 전까지 꼭 찾아오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그런 놈이 있어야 말이지…….”
‘결혼? 결혼하기 전에 공부부터 열심히 해라, 이것들아. 성적도 가관인 것들이…….’
내가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그때.
한 여학생이 눈짓으로 날 가리키며 나지막이 말한다.
“쟤는 어때?”
“누구? 뭐?! 미쳤어? 아무리 아버지의 압박이 있다고 해도, 저건 아니야.”
“뭐 어때서? 이제 흑남님이잖아?”
‘다 들린다, 이것들아.’
“그렇기야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인이었던 놈이 갑자기 흑남이라니…….”
“슬쩍 가서 말이라도 걸어 볼까?”
그녀들은 연신 날 힐끔거렸으나.
차마 말을 걸 용기는 없었던 건지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아니면 옆에 아크 교수가 있어서 그런 건가?’
나는 내 옆에서 발을 맞추어 걷는 아크 교수를 본 뒤.
말없이 파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 흑남 랄프 님과 성마법 방어학 교수이신 아크 교수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양피지를 든 채 문 앞에 있던 하인이 소리치자.
삽시간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저놈이 내 자리를…….”
“내가 흑남이 됐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대부분은 여전히 적대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아크 교수와 함께 적당한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흑남님, 저 아시죠? 안슨가의 차남 안델입니다.”
“호호, 고돌린가의 차녀 오보리예요. 축하드려요.”
일부 학생들이 내게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거참… 거물급 가문의 자녀들은 아니지만 그냥 이 상황이 웃기네.’
어제까지만 해도 말 한 마디 할 일이 없던 놈들이 이제는 내게 말을 걸어오다니.
내가 이 상황에 속으로 웃음만 흘리던 그때.
“흑남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웬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이 사람은… 누구지? 흑카데미에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학생들의 부모 중 한 사람인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레논입니다.”
남자가 무심히 말하며 손을 내밀자.
‘레논… 레논? 잠깐… 그 레논?’
나는 경악하여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허… 레나가 흑남이 되는 걸 지켜보러 온 건가? 아니, 그보다 부탑주가 나한테 말을 걸어오다니…….’
흑탑에서도 오직 세 명만이 존재한다는 부탑주.
개중에서 악마학파의 수장이자 부탑주인 그가 내게 존칭을 사용할 줄이야.
‘흑남이라는 자리가 이 정도였어?’
나는 놀란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랄프입니다.”
“랄프 님이시군요.”
입가의 미소와 달리 웃지 않는 그의 눈을 보며.
나는 대화를 이어 갔다.
몇 분 뒤.
‘후우… 만만찮네.’
겨우 부탑주와 간단히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몸이 중압감으로 무거워진 것 같다.
“허허, 어색하십니까?”
내 앞에 앉아 있던 아크 교수가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5년을 하인으로 살았습니다. 어색할 수밖에요.”
“그래도 흑남이 되셨으니 적응을 하셔야 할 겁니다.”
아크 교수가 웃으며 말하자.
난 내가 갖고 있던 궁금증을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데 흑남은 뭘 하는 겁니까?”
“허허, 본 교의 성녀님과 비슷한 일을 하시겠지요. 민초들에게 베논의 이름을 알리고 나아가 흑탑의 이름을 드높이는 그런 일들 말입니다.”
아크 교수의 대답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음… 밖으로 나가는 건 좋은데… 그렇게 하면 베논이 내게 준 권능을 써먹기가 힘들잖아.’
흑카데미에선 흑마력을 3배 더 빠르게 쌓을 수 있는 권능.
밖으로 나가거든 그 권능을 써먹기가 힘들 터.
‘밖으로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흑카데미에 터를 두고 움직이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다시 흑카데미로 돌아올 일은 없는 겁니까?”
“허허, 아마도 그렇겠지요? 이제 곧 베논교의 본단으로 이동을 하실 테니 말입니다.”
“흠…….”
* * *
다음 날, 점심.
“이쪽으로…….”
나는 양옆에 볼드 학장과 아크 신관장을 대동한 채.
흑탑으로 가는 중이다.
‘평생 들어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도 오네.’
“…이곳이 흑탑입니다.”
볼드 학장이 눈앞의 흑탑을 보며 말하자.
“네, 잘 보이네요.”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네.’
탑 밑에서 보니 꼭대기가 어딘지 보이지를 않는다.
“들어가시죠.”
“허허…….”
그그그그그긍-
‘우와…….’
그저 바깥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흑탑.
난 지금 그러한 흑탑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안은 생각보다 평범하네.’
명색이 흑마법사들의 둥지인 곳이건만.
내부는 나의 생각보다 평범해 보였다.
‘즐비하게 전시된 악마들의 동상도 그렇고, 분위기가 어두운 것도 그렇고. 그냥 흑카데미 같은데……. 아씨… 아니면 하도 오래 흑카데미에 처박혀서 내 평범함의 기준이 이상해진 건가.’
다만 흑카데미와 차이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대체 끝이 어디야?’
도대체 천장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뻥 뚫려 있는 허공과 더불어.
갖가지 행색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뭔데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흑마법사들을 물론이거니와 몰골이 꾀죄죄한 도굴꾼 같은 놈들.
얼굴에 검은 천을 칭칭 두른 놈들 등.
꽤나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다.
‘저건 또 뭐야. 저놈들… 성기사 아니야?’
개중에는 백색의 갑옷을 두른.
딱 봐도 레바논의 기사 같은 놈들도 있었다.
‘진짜 특이하네. 대체 흑탑이랑 레바논이랑 무슨 관계인 거지?’
내가 주변을 힐끔힐끔 살피던 그때.
“여기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앞에서 걷던 볼드 학장이 내게 손짓한다.
‘저건… 마법진?’
슥, 스슥-
수많은 흑마법사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공간.
학장은 그런 마법진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이동하겠습니다.”
‘읍…….’
마법진에 오르자.
잠시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이곳은…….’
어느 순간 북적거리던 1층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커다란 문짝만이 내 앞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긴 또 뭐야?’
내가 문짝을 응시하던 그때.
“후우…….”
어딘가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볼드 학장이 숨을 한번 내쉬고는.
나를 바라본다.
“이 안에는 흑남님 이상의 흑마법사님들이 가득하니 언행이나 행실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말씀해 주셨잖습니까?”
“계속 강조를 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잔소리를 이어 나가는 볼드 학장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양반 겉보기랑 다르게 걱정은 엄청나게 많네. 뭐, 안에 거물들이 즐비하니 당연히 긴장을 할 수밖에 없나.’
이미 오늘 아침 내가 만날 대상들에 대해 들었던 터라.
볼드 학장이 걱정을 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알겠습니다. 언행에 신중을 기울이죠.”
“감사합니다.”
볼드 학장은 거듭 강조를 한 뒤.
문 앞에서 공손하게 묻는다.
“탑주님, 흑남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그그그그긍-
문짝이 좌우로 천천히 열리자.
“들어가시죠.”
볼드 학장이 내게 눈짓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워… 엄청 넓네.’
학생들의 교실 몇 개를 합친 크기의 어두운 공간 안으로.
수많은 사람의 실루엣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따라 일렁거리고 있다.
“저 볼드가 탑주님과 부탑주님들 그리고 열두 분의 위대하신 흑마법사님들을 뵙습니다!”
볼드 학장이 실루엣이 있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소리치자.
“볼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인 출신의 흑남이 가당키나 한 일이라 생각하나?”
“그러니까. 애당초 굳이 흑남 의식을 흑카데미에서 한 이유가 뭔데? 가장 잠재력이 있는 학생을 키우려고 한 거잖아. 근데 뭐? 하인?”
일부 실루엣들이 볼드를 질타한다.
“그건…….”
볼드 학장이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
“그쯤하지. 흑남은 베논 님께서 선택하셨다. 지금 네놈들의 발언은 베논 님의 선택을 부정하는 이교도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
“그래. 베논 님께서 선택하신 데는 이유가 있겠지.”
일부 실루엣들이 볼드 학장을 감싸는 발언을 한다.
“아, 그래서 선택받은 게 하인이다? 흑카데미에 그렇게도 인재가 없었나? 얼마나 뽑을 사람이 없으면 하인이 뽑혔겠어? 이거 볼드의 역량을 다시 생각해야겠는데? 아니면 베논의 안목에 이상이…….”
“엔비! 자꾸 그 아가리를 놀린다면 나도 가만있지만은 않을 거다.”
“어쩔 건데? 해보든가?”
‘저 새끼들은 사람 불러 놓고 왜 지들끼리 싸우고 있어?’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모두 그쯤들 하게.”
노인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리자.
말다툼을 벌이던 목소리들이 삽시간에 잦아든다.
‘방금은 탑주의 목소리인 건가?’
한없이 잔잔하지만 그 안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내가 실루엣들을 곁눈질로 살피던 그때.
“과정이 어떻건 여기에 있는 이 소년은 베논 님께서 선택하신 흑남이다.”
한 노인이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 늙다리가… 탑주?’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간다.
“앞으로 그는 베논 님의 뜻을 우리에게 직접 전달해 줄 귀한 통신망이기도 하지. 그렇지 않나?”
‘이 양반도 사람 좋은 미소 잘 짓네. 로브 말고 평범한 옷을 입히면 동네 할아버지라고 해도 믿겠어.’
“하하, 그렇지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탑주가 다시 내게 묻는다.
“의식을 치르면서 베논 님을 만났겠지?”
“네, 만났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의 눈이 매섭게 번뜩인다.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지? 혹시 레바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나?”
탑주의 물음에 일순간 공간에 정적이 흐른다.
‘뭘 뭐라 해? 지들끼리 내기하기 바빴는데.’
레바논과 베논.
두 신은 날 두고 성남이네, 흑남이네 하며 입씨름을 하기 바빴을 뿐이었다.
‘근데 왜 레바논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거지? 뭔가 원하는 게 있나?’
내가 탑주를 보며 적당한 답변을 고민하던 그때.
화아아아악-
‘이… 이게 갑자기 왜 이래?’
돌연 내 손등에 박혀 있던 흑남의 문양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오더니.
내 머리 위에서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아닌가?
‘뭐, 뭐야, 이건……?’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자.
[크케케케케! 우리는 그분의 악사단!]
[흥이 난다! 북을 쳐라! 장단을 높여라!]
[흑남은 위대하신 그분의 뜻을 들어라!]
시뻘건 악마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검고 두툼한 갑주를 두른 베논이 모습을 드러낸다.
‘저 양반은 갑자기 왜 나타난 거야?’
내가 갈피를 못 잡던 중 악기 소리와 악마들의 음성이 뚝 그치더니.
베논이 근엄한 표정을 한 채 나를 보며 말한다.
[바알의 사도들을 조심해라. 놈들이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다.]
“…예?”
‘바알의 사도? 그건 또 누구야?’
“그건 누굽…….”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삽시간에 베논의 환상은 사라져 버렸다.
‘뭐야. 말을 할 거면 확실히 말을 해 주고 가든가.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사라지면 어쩌라고?’
적어도 바알이 누구인지는 알려 주고 가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곤 다시 탑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음? 이건 또 뭐야?’
“베논이시여! 베논이시여!”
“당신께서 현현하심을 저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어째선지 탑주를 비롯하여 실루엣에 감춰져 있던 사람들이 내 앞에 나와.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 베논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