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50]
‘…뭐? 50점?’
50점이라면 이제껏 선정자들이 받은 점수 중.
가장 높은 점수 아닌가?
‘내가 잘못 본 건가? 진짜 50점이라고?’
내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점수를 바라보는 사이.
“저… 저건… 맙소사…….”
“이게… 말이 돼? 저딴 나무 상자가 마신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저 안에 뭐가 있던 거지?”
관객석에서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한다.
“점수에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그 말은 쉽게 못 넘기겠는데? 지금 베논 님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
“아… 아니, 그게 내 말은……. 하지만 저 점수는 말이 안 되잖아?!”
‘그래… 저 점수는… 말이 안 돼.’
한 관객의 비명 같은 고함에 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50점이나 받았다고?’
리치의 라이프베슬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걸까?
‘물론 라이프베슬이 희귀한 거긴 하겠지만 다른 선정자들이 가져온 것도 보통 귀한 게 아니었어.’
그런데도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럼 내가… 흑남?’
내가 벙쪄 있던 그때.
“내 선조님의 시체가 저깟 상자만도 못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당장 저놈을 붙잡아서 마신께 뭘 바쳤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선정자인 학생들과 교수들 전원이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 눈을 부라리고 있었으나.
“허허…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
아크 교수만이 허허롭게 웃는다.
‘하인이 흑남이 됐으니 난처할 만하지.’
아마 아크 교수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진 못했으리라.
‘흑남이라……. 결국 내가 흑남이 됐구나.’
5년간의 개 같은 흑카데미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흑남이 됐으니 베논이 엄청난 힘을 줄 테니까.’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하늘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툭-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내 콧등을 간질였으나.
‘달다, 달아……. 빗물이 달아…….’
나는 얼굴에 튀기는 빗물을 한껏 만끽했다.
그러던 그때.
‘뭐… 뭐지?’
잠시 상념에서 벗어난 나는 주변을 보곤.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거렸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관중의 소리가 들려왔었는데…….’
지금은 고요한 평원에 있는 것처럼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질 않았다.
‘이건 또 뭐야.’
어째선지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물이 멈춰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내가 도무지 상황을 짐작하지 못하던 중.
짝짝짝-
“네가 우승이야. 축하한다.”
돌연 내 등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온다.
‘저 남자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자.
비록 초면이라고는 해도, 나는 저 남자가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마신 베논…….’
워낙 석상을 닮았을뿐더러.
지금 같은 초월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신을 제외하고 없을 터.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만…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신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정중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질문? 까짓것 기분이다. 물어봐.”
“감사합니다. 왜 제가 바친 제물이… 그런 고득점을 얻었는지 잘 납득이 가질 않아서요.”
“지금 내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비꼬는 건가?”
콰득-
‘크으윽…….’
무형의 기운이 삽시간에 내 몸을 짓누르자.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닙니… 다. 저는 그저…….”
“맞아. 네가 바친 리치의 라이프베슬 자체는 평범했어.”
물론 이미 죽었을 더스틴이 들었다면 복장을 터트릴 일이겠으나.
다른 선정자들이 가져온 제물에 비하면 라이프베슬은 ‘그깟 라이프베슬’ 정도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리치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대체 저놈의 마신은 무엇 때문에 흥미를 느낀 것이란 말인가?
“그럼 왜 제가 흑남이 된 겁니까?”
나의 물음에 베논이 픽 미소를 흘린다.
“네가 라이프베슬과 함께 바쳤던 상자, 그게 좀 재밌었거든.”
‘뭐라고?’
내가 어처구니없이 마신을 바라보자.
그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10만 명이 넘는 영혼이 담긴 상자, 그런 건 오랜만에 봤단 말이지.”
‘뭐? 그러니까… 라이프베슬 때문에 고득점을 준 게 아니고, 상자 때문에 고득점을 준 거라고?’
나의 의문에 답하듯 마신이 말을 이어 간다.
“라이프베슬 2점, 상자 48점. 합쳐서 50점.”
“허…….”
그깟 상자에 그리 높은 점수가 책정되다니.
“10만의 영혼이 별것 아닌 것 같지? 맞아, 별것 아냐. 하지만 오랜 세월 농축된 10만의 영혼이라면 좀 다르지.”
“…예?”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전부 해 줬다고 생각했는지.
마신은 더 이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게도 흥미가 좀 동했지.”
몸을 잠식하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지자.
난 겨우 목을 쳐들고 물었다.
“…예?”
‘내게 흥미를 가졌다고?’
“신성력을 갖고 있는 흑마법사. 이건 본 적이 없거든.”
“아…….”
내가 침음하자.
베논이 비웃듯 말한다.
“아무래도 레바논이 먼저 침을 바른 것 같은데, 먼저 도장 찍는 놈이 임자지.”
딱-
마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나의 손등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갔다.
‘이건…….’
마신이 준 선물이다.
분명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터.
‘…이상하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하지만 어째선지 흑남 문양에선 조각 같은 흑마력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뭔가 진짜 이상한데? 이게 맞나?’
그래도 명색이 마신이 준 선물인데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니?
“저… 베논 님? 문양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만…….”
“당연하지! 그건 평범한 문양이니까.”
“하지만! 그 문양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지. 하나는 나를 섬기는 베논교의 검은 사제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네가 악행을 저지르면 그에 따라 너의 흑마력이 늘어나게 되는 능력이다.”
‘오오… 그러니까 베논교의 사제들을 굴복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건 엄청나네.’
그렇다면 막말로 내가 베논교로 가서 문양을 보이면.
모든 검은 사제들이 내게 고개를 조아린다는 것 아닌가?
‘거기다가 악행을 저지르면 흑마력이 늘어난다고? 이야씨…….’
즉, 내가 쓰레기 짓을 거듭할수록.
내 흑마력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그래. 이게 보상이지. 이게 흑남이지! 어휴, 진짜 아무것도 안 주는 줄 알았네.’
그래도 명색이 마신이라 그런지.
나름의 상도덕은 있는 모양이었다.
‘보상 괜찮네. 하지만…….’
“저 마신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이게 전부입니까?”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화아아악-
“방금 뭐라고 했지?”
“크윽…….”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마신이 내 멱살을 잡고
땅에서 끌어 올린다.
“보상이 이게 전부인지…….”
[내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건가?]
마신의 입에서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오자.
나는 목을 붙잡힌 채로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아닙니다……. 흑남의 자리는… 당연히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그 외에도 혹시 무언가 또 주시는 게 있나 궁금해서…….”
“나의 선택을 받은 흑남이라는 위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거냐? 크하하하하하하! 욕심이 많군.”
‘아니, 미친놈아! 그냥 뭔가 더 있는지 물어본 것뿐이잖아?!’
내가 속으로 고함을 지르던 그때.
“이게 무슨 짓이죠?”
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온화한 미소가 유독 돋보이는 여인이 하늘에 자리하고 있었다.
‘레바논?!’
내가 지금의 상황에 혼란해하던 중.
베논이 입을 뗀다.
“무슨 짓이라니? 나의 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당신의 종이요? 말은 똑바로 하세요. 애당초 그는 제가 먼저 선택했어요.”
레바논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베논은 도리어 입꼬리를 올린다.
“그랬었지. 하지만 그는 흑남이 됐다. 너조차 이 상황을 엎을 수는 없어.”
“이 상황을 엎을 수는 없지만 변화는 줄 수 있죠.”
레바논이 싱긋 웃자.
베논은 불길함을 느끼곤 얼굴을 찌푸린다.
“무슨 생각이지?”
“그가 신성력을 갖고 있는 건 아시죠? 그는 성남이 제격이에요.”
성남?
그런 것도 있었나?
성녀는 많이 들어 봤지만 성남은 처음인데.
베논도 같은 의문을 가진 모양이다.
그가 레바논의 속셈을 눈치챘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너… 그동안 여자만 뽑았잖아. 의식을 방해하려고 이러는 거라면…….”
레바논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닌데요? 남자도 뽑았는데요?”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지금껏 전부 성녀만을 뽑았으면서 거짓말을… 잠깐만…….”
으르렁거리던 베논의 말이 멈추었다.
“너… 혹시?”
베논과 레바논의 눈길이 천천히…….
나의 특정 부위를 향한다.
‘이런 씨발?’
그에 나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곤.
나의 소중한 곳을 가렸다.
“허… 성별은 중요치 않다, 이건가?”
“바로 그거예요. 성스러운 힘이 그의 그곳을 어루만질 거예요.”
‘…뭐? 뭐라고? 시팔? 이거 미친년인가?’
거세다.
이건 백 프로 거세다.
나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완전한 성남이 되면 거세가 된다니.
이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그럼 설마 역대 성녀들 중에는 성남도 있었는데, 그 성남들이 거세를 당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도 있겠으나.
저 미친 레바논 년이 말한 걸 봐선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 보였다.
‘거세를 당할 바에는 흑남을 하고 말지, 이 미친년아!’
“하지만 그는 이미 흑남이 됐다.”
“흑남도 하고 성남도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는 성남도 원할걸요?”
‘아냐, 필요 없어! 고자가 되는 힘은 필요 없다고!’
레바논이 날 가장 위대한 성남으로 만들어 준다고 해도 싫었다.
거세를 당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세를 당할 바에는 죽고 말지!’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네가 내 종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이런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군.”
베논이 이 상황이 재밌었는지 한바탕 웃음을 쏟아 내자.
레바논은 정색하며 그를 바라본다.
“애당초 침은 제가 먼저 발랐는데요? 그리고 그가 신성력을 사용해도 당신의 종들이 못 알아채게 한 것도 전부 제가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마인드브레이커에 신성력으로 저항해도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차렸던 게, 레바논이 보호했기 때문이었다고?’
레바논의 말에 나는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고자는 아니지!’
나를 보호해 준 거라면 그 부분은 감사하지만.
그래도 고자는 아니잖은가?
“제 신도에게서 손 좀 떼 주실래요? 그는 앞으로 성남이 될 재목이니까요.”
“헛소리 집어치워라. 이미 흑남의 의식까지 끝마쳤다.”
베논이 으르렁거리자.
레바논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하아… 이렇게 이야기해 봐야 끝이 안 나겠네요. 좋아요. 그럼 한 가지 내기를 하는 게 어때요?”
“…내기?”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내기. 흑마력과 신성력을 둘 다 가진 그가 어떤 성향으로 기울지 내기를 하는 거죠. 궁금하지 않나요? 양쪽의 선택을 받은 그가 어떻게 변할지?”
“음… 그건 조금 흥미롭군.”
베논도 관심이 갔는지.
레바논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내가 이기면?”
“500년간 봉인을 당하도록 할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어떤가요?”
“흠… 흥미롭군. 좋다!”
두 신이 저들끼리 내기 종목을 지정하자.
‘당사자가 동의도 안 했는데 연놈들이 쌍으로 무슨 지랄이야?’
나는 그들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봤다.
“단, 규칙을 하나 추가하는 건 어떤가요?”
“규칙?”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 그가 악행을 하면 흑마력이 높아지는 권능을 허락했죠? 그럼 이렇게 해요. 그가 선행을 하면 신성력이 높아지고, 반대로 악행을 행하면 흑마력이 높아지도록 하는 거죠.”
“그래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높아지게 되면 승부가 결정 나는 식인 건가?”
“그렇죠. 어떤가요?”
레바논이 눈을 반짝이자, 베논이 고개를 젓는다.
“거절하지.”
“…네?”
“지금의 그는 선에 가깝다. 내게 너무 불리해.”
그에 레바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빈정거리기 시작한다.
“그럼 당신이 악하게 만들면 되는 거죠.”
“거절하지.”
“음…….”
그에 레바논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다시 베논을 응시한다.
“좋아요. 그럼 재미를 위해 제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죠. 지금 그가 아카데미에 있죠? 그럼 적어도 그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악행을 저지르면, 신성력보다 3배의 흑마력을 얻게 해 줄게요. 어떤가요?”
“흠… 그럼 괜찮을 것도 같군. 좋다! 승낙하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기를 하는 그들을 보며.
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니까 선행을 베풀면 신성력이 오르고 악행을 저지르면 흑마력이 오르는데, 아카데미에서 악행을 저지르면 흑마력이 3배로 오른다? 허…….’
나의 행동만으로 힘이 증가한다니?
절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보상이긴 했으나.
난 고민이 됐다.
‘그럼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흑마력 3배도 없어진다는 건데…….’
그렇다고 내가 탈출을 해서 딱히 악행을 저지를 것 같지도 않았다.
‘애당초 흑마력을 얻으려고 타인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좀 그런데…….’
반면, 이 빌어먹을 흑카데미에선 내가 쓰레기 짓을 해도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쓰레기들을 상대로 쓰레기 짓을 하는 건 그래도 가책이 덜하긴 한데… 어쩐다…….’
분명 두 신이 내게 내린 보상은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흑마력 3배를 얻으려면 아카데미에 있어야 하고, 선행을 하면 고자 직통 열차를 타는 거라니……. 후…….’
내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사이.
“대신 이 순간부로 더 이상의 개입은 금지하기로 하죠.”
“좋다.”
어느새 계약을 성립한 두 신이 손을 들고 내게 뻗자.
사사삭-
‘음…….’
무형의 기운들이 내 몸에 내려앉더니 스며들듯 사라져 버린다.
“들었지?”
“…예? 뭐, 아… 예. 들었죠.”
“최대한 악행을 저질러라. 피를 흩뿌리고 죽음을 몰고 다니는 존재가 되는 거다!”
베논이 광소하던 그때.
내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정말 뭐 더 없습니까? 레바논 님은 저한테 뭐 더 주실 것 없어요?”
“…뭐?”
두 신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곤 홀연히 자리에서 사라져 갔다.
몇 분 뒤.
툭, 툭툭-
멈춰 있던 비가 다시 지면에 떨어져 부딪침과 동시에.
“당장 저 하인장을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인이 흑남이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 의식을 취소해야 합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
관객들의 고함 소리가 다시 내 귀로 울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