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다행히 더스틴이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좋았어! 역시 자기 심장 이야기를 꺼내니까 아주 그냥 득달같이 달려드는구나.’
[또 놈이 뭐라고 했었지?]
“그 외에 특별히 언급한 건 없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더군요. 열쇠만 손에 넣으면 더스틴 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베크… 이놈이 끝까지 날 조롱했었구나…….]
더스틴은 베크가 있었던 자리를 노려보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상자에 대해서 특별히 말한 건 없었나?]
“예, 아무래도 중요한 사안이었던 건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습니다.”
[흠… 그런가. 그렇군. 잘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더스틴이 지팡이를 잡자.
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증인은 적을수록 좋은 법이지.]
“제가 알고 있는 대부분을 알려 드렸는데도 절 죽이신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더스틴이 픽 실소를 흘린다.
[그러니 더더욱 자네를 죽여야지. 자네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까.]
‘흠… 어쩐다……. 솔직히 싸우는 건 미친 짓이고, 라이프베슬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미끼를 던져 볼까?’
놈의 역린을 건드린다면 분명 반응을 보일 터.
‘아냐. 그건 시간 버는 것밖에 안 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결국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놈은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뭔가 좋은 방법이…….’
내가 급히 머리를 돌리며 눈을 굴리던 그때.
‘…음? 저건… 저 양반이 여긴 왜……. 아냐, 오히려 잘됐어!’
창밖의 등불을 든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난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과연 이곳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밖을 보시죠.”
나의 말에 더스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곤.
[아크 신관장!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친다.
그러자.
삐걱-
“허허,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하던 일을 하시지요.”
아크 신관장이 눈을 반짝이며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밖에서 제물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지요. 허허,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레바논 님께서도 장난을 참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장난?]
더스틴이 으르렁거리듯 읊조리자.
아크 교수는 웃으며 말을 돌린다.
“그보다 얼른 하던 일을 계속하시지요. 하인장을 죽이려고 하시던 것 아닙니까? 얼른 순교를 시켜 주시지요.”
아크 신관장의 재촉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저놈도 순교에 미친 놈이었지. 사자를 치우려다가 호랑이를 부른 셈이 된 건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하지만 생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더스틴이 아크 교수에게 시선이 끌린 틈을 타서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가능성은 있어.’
애당초 이 구도를 만들기 위해.
집무실을 엿보던 아크 교수를 이 안으로 끌어들인 거니까.
[네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며칠간의 외출로 인해 당연히 라이프베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아크 신관장.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묻는다.
“허허, 어디까지 알고 있다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거룩한 순교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거룩한 순교의 현장?]
“하인장을 죽이려고 하던 것 아닙니까? 계속하시지요.”
아크 신관장이 자꾸 부추기자.
더스틴은 내게 겨눴던 지팡이를 돌려 아크 교수를 겨눈다.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네놈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놔라.]
“허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의심에 잠식된 모양이군요. 정상적인 대화는 힘들겠습니다.”
그에 아크 교수는 멋쩍게 웃더니 메이스를 꺼내어 들고.
“그보다…….”
힐끔 눈을 돌려 날 바라본다.
“하인장은 상당히 운이 좋은 것 같군. 아니면 이 역시 레바논 님의 의도인 겐지…….”
갑자기 아크 신관장이 우악스럽게 내 멱살을 잡더니.
“우와아아아악!”
와장창-
창문으로 나를 냅다 집어 던진다.
“크윽…….”
그 반동으로 내가 바닥을 구르는 사이.
더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짓이지?]
“허허, 혹시라도 제 공격에 휘말려 죽게 되는 걸 방지한 것뿐입니다. 의심이 가라앉으시거든 찾아가서 순교시켜 주시지요.”
‘저 미친 사이비 신관장 놈이…….’
창밖으로 아크 신관장의 말이 뚜렷이 들려오자.
난 유리창을 털어 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 사이비 신관장 덕에 한숨 돌렸네.’
아이러니하게도 그놈의 순교가 나의 목숨을 연명시킨 꼴이 됐으니까.
‘일단 얼른 자리를 떠야겠어.’
솔직히 누가 더스틴을 풀어 줬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다.
‘내일이면 더스틴의 라이프베슬을 제물로 바칠 거니까.’
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리치를 상대하는 건 오랜만이긴 합니다만, 최선을 다해 보지요.”
성스러운 빛이 집무실을 휘감듯 덮더니.
콰과과과과과과광-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박살 난 집무실의 지붕이 내가 있는 자리로 떨어져 내린다.
* * *
다음 날, 아침.
“들었어? 어제 호레이가 엄청난 걸 들고 돌아왔다던데?”
“엄청난 거?”
“그래! 듣자 하니 500년 전에 사장됐던 흡혈귀의 시체를 들고 왔다고 하더라. 자기 조상이라나 뭐라나…….”
“이야, 그럼 이번 의식에서 제물로 바치려고 자기 조상의 무덤을 판 거야? 하여간 혈탑 놈들도 어지간하네.”
식당 안은 학생들의 대화로 떠들썩했는데.
“레나 님은 뭘 들고 오셨을까?”
“듣자 하니 레바논의 10대 성기사 중 한 명의 심장을 들고 왔다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의식을 치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레나 님 말고 흑남이 될 사람도 없잖아? 이미 교수님들도 레나 님이 흑남이 될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던 것 같던데.”
“그건 모르지. 아크 교수도 있고 시련의 탑이랑 혈탑의 교수들도 뭔가 들고 왔을 테니까.”
어제 흑카데미로 복귀한 선정자들이 들고 돌아온 제물이 화젯거리였다.
“하아… 그보다 난 레나가 부럽다. 부탑주의 딸이란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고위 흑마법사들을 끼고 교육받았겠지?”
“글쎄… 어쩌겠냐? 잘 태어난 것도 능력인 걸. 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래도 우리는 저놈보단 상황이 훨씬 낫잖아?”
한 학생이 밥을 먹다 말고 눈짓으로 날 가리킨다.
‘말하는 싸가지하곤…….’
나는 슬쩍 학생을 쳐다보곤 다시 식탁을 치우는 데 집중했다.
‘아오… 아직도 팔이 쑤시네…….’
어제저녁, 내게 떨어지던 파편들을 피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을 굴렀던 탓일까.
아직도 몸이 얼얼한 것 같다.
‘그래도 그 소동 덕에 새삼 나와 교수 간의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
더스틴과 아크 교수의 전투.
그것은 흑카데미의 학생들이 벌이던 모의 전투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고.
또 매력적이기도 했다.
‘다만 학생들 사이에서 별말이 없는 걸 봐선, 볼드 학장이 소문이 나는 걸 통제한 것 같긴 한데.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미 더스틴과 베크 교수의 전투로 한바탕 시끄러워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소란이 일어나는 건 학장으로서도 원치 않았을 터.
‘더스틴이야 리치니까 그렇다고 쳐도 아크 신관장이 정상적인 놈이었다면 배울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하아…….’
아크 신관장이 발현한 찬란하고도 신성한 성마법을 봤을 때는.
정말 그가 진실된 신관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순교에 미친 놈이라는 것만 빼면 진짜 괜찮을 것 같은데.’
아크 신관장에게서 성마법을 배운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만사가 항상 내 뜻대로 돌아가던가?
‘아오…….’
내가 속으로 깊이 탄식하고 있던 중.
“하긴 그것도 그래. 하인으로 태어날 바에야 지금 이대로 살련다.”
“그보다 저놈은 제물로 뭘 준비했을까? 저놈도 선정자잖아?”
“선정자라고 다 같은 선정자냐? 쥐새끼처럼 기회만 엿보면서 살아남은 거겠지.”
다시금 학생들이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 떠들어 대기 시작한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냐? 물어볼까?”
“뭘 물어봐? 보나 마나 시체 소각장이나 기웃거리면서 시체 쪼가리나 주워 가지고 제물로 바칠 게 뻔한데.”
“아니면 우리가 닦고 버린 양피지를 바치는 것 아냐? 이야, 마신님께서 똥 묻은 양피지를 제물로 받으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푸하하하하하하!”
‘아주 염병들을 하네.’
이미 이쪽은 제물로 바칠 것도 구해 뒀다.
그런데 똥 묻은 양피지?
‘그래, 무시당하는 게 뭐 하루 이틀이냐. 계속 욕해라. 난 바칠 것만 딱 바치고 이놈의 의식이 끝나거든 다시 탈출 계획을 세울 거니까.’
어차피 이 빌어먹을 흑카데미를 나가기만 하면 다시는 볼일이 없을 얼굴들이다.
‘진짜 이곳을 나가기만 하면…….’
내가 속으로 거듭 다짐하던 그때.
“하인장님.”
한 하인이 다가와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제 곧 제단 설치를 마무리 한다고 합니다. 하인장님도 원형 경기장으로 오셔서 마무리 작업에 참석하시라는 콘스 교수님의…….”
“알았어. 곧 가마.”
제단, 마지막 의식이 진행되는 곳.
‘그걸 준비하느라 몇 날 며칠을 고생했는지…….’
난 고개를 젓곤 천천히 식당을 벗어났다.
* * *
“…….”
당일, 저녁.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원형경기장 안으로 학생들의 고함이 울려 퍼진다.
“우와… 저 제단 좀 봐. 어마어마하네.”
“확실히 흑탑은 흑탑이군……. 꽤나 많은 돈을 썼겠어.”
원형 경기장의 중심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금상들이 있었는데.
마신 베논을 비롯하여 열둘의 대악마들이 저마다 기괴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선정자인데 마지막 날까지 작업에 참여시킬 줄이야. 그보다… 저거 하나만 훔쳐다가 팔아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금상을 보며 속으로 군침을 삼키던 그때.
저벅, 저벅-
커다란 단상 위로.
볼드 학장을 필두로 각 아카데미의 학장들과 교수들이 올라와 마련된 자리에 착석한다.
그 뒤로 선정자들이 모습을 보이자.
우와아아아아아-
“레나 님! 레나 님! 전 레나 님에게 걸었습니다!”
“호레이! 호레이! 호레이!”
학생들은 다른 아카데미의 함성에 밀릴세라.
환호성을 내지른다.
‘후우… 이게 뭐라고 다 떨리냐.’
함성이 워낙 큰 탓일까.
난 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눌러야만 했다.
“오늘은 흑남 의식의 끝을 맺는 마지막 의식의 날이다. 숭고하고도 경건한 이날, 마신 베논 님께서 우리의 의식을 보고 있음을 기억해라. 최후의 의식을 시작해라!”
마법으로 증폭화한 볼드 학장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리자.
우와아아아아아아-
“내가 1번이라……. 너희의 운을 원망해라. 어차피 흑남이 되는 건 나일 테니까.”
1번 제비를 뽑았던 혈카데미의 학생이 선정자들을 비웃곤.
당당히 원형 경기장의 중심에 있는 제단을 오른다.
“베논이시여! 저 호레이의 노력을! 제 조상에서부터 이어져 온 비원을 이뤄 주십시요! 제물을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 혈탑에 무한한 영광과 찬란한 길을 허락해 주십시요!”
하늘에 대고 호레이가 버럭버럭 소리치자.
웅웅웅-
제단에 놓여 있던 흡혈귀의 시체 위로 어둠이 드리우더니.
삽시간에 제물이 사라져 버렸다.
“오오오오! 시체가 사라졌어!”
“베논께서 제물을 받으셨다!”
“베논 님! 제 조상님을 기쁘게 받아 주십시요! 그리고 저를 흑남으로…….”
그에 신이 난 호레이가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소리를 지르던 그때.
콰과과과과과과광-
“끄아아아아아악!”
선명하고도 검은 벼락이 떨어졌다.
‘뭐, 뭐야……. 설마 준비한 제물이 마음에 안 들면 죽이는 거였어?’
내 머릿속에 걱정이 스쳐 가던 중.
“으으으으…….”
벼락을 맞은 호레이와 학생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후… 죽는 건 아닌가 보네. 근데… 저건 뭐야?’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웬 숫자가 적혀 있었다.
‘6? 6이 왜 적혀 있… 설마… 아니겠지.’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흘리던 그때.
“호레이, 베논 님께서 네게 내리신 6점에 감사하도록.”
증폭된 볼드 학장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울려온다.
‘…진짜였어?’
“가… 감사… 그르륵…….”
호레이와 학생들이 실려 나가는 사이.
“역시 저딴 하찮은 제물을 베논 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지. 나야말로 흑남에 어울리는 인재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
마찬가지로 혈탑 출신의 학생이 자신만만하게 손짓하자.
“으으…….”
어딘가 동공이 멍한 것처럼 보이는 하인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다.
‘저 녀석들은… 얼마 전에 점호 시간에 없어진 놈들이잖아?’
내가 당혹해하는 사이.
“시작해라!”
남자의 명령이 떨어지고 박쥐 떼가 경기장 중심에 난입한다.
“저 거트! 베논 님께 최고의 살육극을 선보이겠습니다!”
푸확-
‘저 미친놈이…….’
난입한 혈카데미의 학생들이 하인들을 무참히 죽이자.
‘왜 하인들 숫자가 줄어들었는데도 별말 없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난 그제야 하인들이 없어졌음에도.
교수들이 내게 책임을 묻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보다 설마 하인들을 제물로 바칠 생각을 하다니. 쯧쯧… 저놈은 글렀네.’
이 개떡 같은 ‘흑남 의식’의 주관자는 다름 아닌 마신이다.
‘살인쇼 같은 걸 보여 준다고 영겁의 세월을 살았을 미친 신이 좋아하겠냐?’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사이.
콰르르르릉-
“끄아아아아아악!”
역시나 놈의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진다.
“멍청한 놈. 그깟 살육극을 퍽이나 마신께서 좋아하시겠다. 마신님은 진귀한 걸 좋아하신다고! 잘 봐라!”
세 번째 선정자가 실려 나가는 두 번째 선정자를 비웃고는.
자신이 준비한 제물을 제단 위에 올린다.
“아니, 저건… 고요의 돌이잖아?!”
“고요의 돌? 그게 뭔데?”
“희대의 천재 세공사 알리만이 직접 세공한 보석이라는데, 대륙에 딱 3개밖에 없는 거라고! 저건 일국의 왕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거야!”
“오오! 그럼…….”
콰과과과과과광-
“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어째선지 그녀 또한 8점이라는 처참한 점수와 함께 경기장 밖으로 실려 나갔다.
“마신께서 보석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하긴… 우리한테는 귀한 거여도 신께는 평범한 돌덩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
뒤이어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보검을 바친 3번째 선정자도.
콰과과과과광-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제물이랍시고 바친 4번째 선정자이자 혈카데미의 교수마저.
콰과과과과광-
나름 준비했을 무대들 위로 검은 벼락이 떨어지자.
“와씨… 설마 마신께서 저 귀한 걸 다 마다하실 줄이야……. 제일 높은 점수가 몇 점이었지?”
“8점이야. 오늘 흑남이 나오긴 하는 걸까? 괜히 마신님의 분노만 사는 건 아니겠지?”
학생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간다.
그러던 그때, 한 학생이 제단 부근을 가리키며 소리친다.
“저, 저것 봐! 30점이야! 벼락도 안 떨어졌어!”
“뭐야! 누구 차롄데?!”
“아크 교수!”
‘…뭐?’
학생들의 아우성에 나 역시 반사적으로 제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허, 30점이라……. 점수가 후하시군.”
아크 교수는 썩 기쁘지 않았는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제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크 교수가 30점이라고? 도대체 기준이 뭐야?’
아크 교수가 제물로 바친 것은 다름 아닌.
세계수의 가지였다.
‘정령사들이 봤으면 게거품을 물고 지랄을 했겠지만……. 아무튼 저게 고요의 돌보다 값어치가 높을까?’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비슷하다고 생각했건만.
베논의 점수는 너무도 달랐다.
“…30점이라고? 설마 이대로 아크 교수가 흑남이 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럼 진짜 재앙이라고.”
학생들이 불안감에 수군거리던 그때.
한 여학생이 천천히 제단 위로 올라가자.
“그래! 아직 레나가 남았잖아?”
“분명 부탑주님의 지원을 받고 엄청난 걸 들고 왔을 거라고!”
“레나! 레나!”
동요하던 흑카데미의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마신 베논이시여! 제 제물을 기쁘게 받아 주세요!”
마침내 레나가 제단 위에 백골 한 구를 올리자.
“저건… 그냥 백골이잖아?”
“기껏 나가서 가져온 게 저거라고?!”
“하… 완전 조졌네…….”
학생들이 실망하여 푸념을 내뱉는다.
그러던 그때.
웅웅웅-
제단에 놓여 있던 백골이 사라지고.
파칭-
곧 그녀의 점수가 떠올랐다.
“4… 40점이라고?!”
“미친… 최고 점수잖아!”
“평범한 백골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 그녀가 평범한 걸 가지고 왔을 리가 없지!”
그에 흑카데미의 학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반면 이미 탈락이 확정되어 들러리 신세가 된 시련의 탑과 혈탑 산하의 학생들은 침묵을 지켰다.
‘40점이라니… 대체 저 백골이 뭔데 저렇게 후한 점수를 받은 거야?’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볼드 학장의 나지막한 설명이 들려온다.
“…선정자 레나가 가지고 온 백골은 전대 백탑주의 유골이었다.”
‘전대 백탑주의 유골이라고? 그런 건 또 어떻게 들고 왔대?’
물론 흑탑의 부탑주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백탑주의 유골이라니?
‘이 사실을 백탑 놈들이 알면 눈이 뒤집히겠네. 아니, 당장 전쟁을 치르려고 할지도 모르지.’
나는 혀를 내두르다가 손으로 내 뺨을 세게 후려쳤다.
‘지금 저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곧 내 차롄데… 혹시 라이프베슬도 마신한텐 썩 내키지 않는 것 아냐? 아씨… 머리에 벼락 떨어진다는 소리는 없었잖아?’
다행히도 저걸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이미 준비한 거, 시원하게 바치고 벼락 한 방 맞자.’
마침내 내 차례가 되자.
레나! 레나! 레나!
나는 심호흡을 하곤 레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저것 봐! 하인장이다! 저놈은 뭘 보여 주려나?”
“하인장이라며? 그런 놈이 보여 주긴 뭘 보여 줘? 보여 준다고 해도 마신님께서 기뻐하시겠어? 1점이나 받으면 다행이지.”
날 조롱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놈들의 조롱은 신경 쓸 거리도 아니었다.
저벅, 저벅-
마침내 제단의 새하얀 대리석 위에 도착하자.
‘후우… 많이 안 바란다. 10점 정도만 줘.’
난 고운 비단으로 감싸 놓았던 상자를 풀어 제단에 올려 뒀다.
그러자.
푸하하하하하하-
“저것 봐! 저게 뭐야! 상자를 들고 왔잖아?!”
“진짜 안쓰러울 정도네. 쯧쯧… 그러게 왜 주제넘게 선정자가 돼서.”
“1점이 뭐야? 저건 0점이야, 0점!”
경기장 곳곳에서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니, 저건……! 저놈이 날 속였구나……! 날 속였어! 안 돼! 안 돼!]
어디선가 분노에 휘감긴 목소리가 울려오긴 했으나.
학생들의 고함에 금세 묻히고 말았다.
‘그래. 웃어라, 웃어. 난 할 것만 하고 가려니까.’
난 낮게 심호흡을 하곤.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몇 점이나 주려나. 많이 안 바란다. 10점!’
웅웅웅-
제단에 놓여 있던 상자 위로 어둠이 드리우고.
삽시간에 상자가 사라지자.
[안 돼! 안 돼……!]
‘음? 무슨 소리가…….’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울려오다가 금세 잦아들었고.
파칭-
제단 위로 선명하고도 검은 숫자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