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32화 (32/200)

32.

‘저놈이 눈깔이 뒤집힌 게… 만약 아까 그 방에서 내가 이 상자를 흔들어서 놈이 뭔가 이상 징후를 느꼈던 거라면?’

나는 심장 적출 저주에 걸려 내 심장을 빼앗겼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도 침입자 놈이 내 심장을 만지고 있다는 게 바로 느껴졌었어. 그렇다면 더스틴도 자기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그러니 저렇게 지랄 발광을 하며 비밀의 방으로 달려가는 것 아니겠는가?

‘저 리치 놈이 난리를 부리는 걸 보니까 기분은 좋네.’

난 씨익 미소를 짓곤.

행여나 누가 볼세라 얼른 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 안에 더스틴의 라이프베슬이 있다라…….’

난 작은 목각함을 바닥에 놓곤 생각을 이어 갔다.

‘이걸 통째로 마신의 제물로 바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만약 이 상자를 열 수만 있다면?’

그래서 내 손으로 직접 더스틴의 라이프베슬을 잡을 수 있다면?

‘그럼 내 뜻대로 더스틴을 통제할 수도 있는 거잖아?’

교수들도 한 수 접어 주는 리치 더스틴을 마음대로 다룬다?

‘워씨… 오금이 자리네.’

상상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겠지.’

일단 이 나무 상자에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거니와.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분명 더스틴이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이걸 열지 않는 이상 더스틴을 압박할 수는 없어.’

그렇다면 열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아. 더스틴의 집무실에 열쇠가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

막말로 더스틴이 열쇠는 다른 곳에 숨겨 뒀다면?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겠는가?

‘일단 마지막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찾아보고, 만약 그때까지 열쇠를 찾지 못한다면…….’

난 상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땐 그냥 상자째로 제물로 바치면 되겠지.’

* * *

다음 날, 아침.

아크 신관장의 예배가 끝난 뒤.

“하인장님,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랄프 님, 좋은 아침입니다.”

“음, 그래.”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과를 부여받기 위해 집합한 하인들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간 흑남 의식 때문에 미뤄 뒀던 일들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학생들 대부분이 외출했으니 청소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지.”

“예!”

“그럼 오늘 일과를 배정한다. 1번 방, 너희는 오늘…….”

내가 평소처럼 하인들에게 일과를 배정하려던 그때.

“이봐, 하인장!”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날 부른다.

‘이놈이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래?’

나는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베크 교수를 의아하게 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편안한 밤 보내셨습니까, 베크 교수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지…….”

“운반해야 할 게 생겼는데 하인들 좀 차출해 줘. 어차피 오늘 저녁에 돌아올 거야. 괜찮지?”

‘…괜찮냐고? 당연히 안 괜찮지.’

운반할 거라고 해 봐야 보나 마나 마물일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당분간 수업은 없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내가 검은 숲에서 뭘 발견한 줄 알아? 키클롭스라고, 키클롭스!”

눈을 반짝이는 베크 교수를 보며.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 그게 뭔데, 이 씹덕 새끼야! 갈 거면 혼자 가든가! 그렇잖아도 인원 부족해서 미치겠는데 하인들을 차출하면 또 몇이 죽어 나갈지 모르잖아?’

지난 5년간 베크가 직접적으로 하인을 죽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놈의 마물 운반이지. 아트캅이나 헤카립스 같은 무언가 특이한 마물이 베크의 눈에 띄었다 하면 그날은 줄초상을 치르는 날이었으니까.’

마물을 학생들에게 교육한답시고 그걸 흑카데미까지 운반하게 하는데.

그걸 운반하는 건 당연히 하인들의 몫이었다.

‘운반하다가 묶어 둔 밧줄이 풀리거나 마물이 발버둥 치면 그야말로 지옥이었지.’

오죽하면 하인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악의 없이 가장 많은 하인을 죽인 놈이 베크라는 소리가 있겠는가?

‘악의가 없는 게 더 문제지.’

악의는 악의를 품은 대상이 죽는 걸로 끝이 나지만.

무심함은 모든 이들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으니까.

“교수님, 교수님도 아시겠지만 요 근래 제물로 쓰이고 혈카데미의 학생들이 하수인을 만들겠답시고 하인들을 습격했던 탓에 하인의 숫자가 굉장히 줄어들었습니다.”

“나도 알지. 근데 키클롭스라니까?! 언제 또 놈을 포획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하…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대꾸하려던 찰나.

눈을 반짝이던 베크 교수가 싸늘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럼 얼른 인원 차출해. 아니면 뭐, 내 말이 아니꼽냐?”

“…그럴 리가요? 다만 지금 인원이 워낙 줄어서 조금은…….”

“인원이 줄어든 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애당초 네가 인원 관리를 개떡같이 했으니 지금의 사태가 발생한 거고. 내 말이 틀려?”

베크 교수가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요즘 콘스 교수님이 뒤를 좀 봐주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정신 차려, 넌 그냥 소모품들의 장일 뿐이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네 일이라고.”

“…그렇지요.”

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잘해 줄 때 잘해라. 표정 펴고.”

베크 교수가 비로소 미소를 보인다.

“해 떨어지기 전에 사라지는 놈이니까 지금 당장 하인들 차출해서 보내. 알았어?”

‘이 새끼고 저 새끼고 하여간 시발 새끼들밖에 없네.’

이쪽의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망할 놈들이다.

아니, 애당초 언제는 저들이 하인을 생각해 준 적이 있던가?

‘개새끼들만 있는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난 제비뽑기로 하인들을 추려.

베크 교수 편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몇이나 살아 돌아올는지…….’

검은 숲은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공간이다.

잘해야 반, 아니 그 반의반이나 살아 돌아오면 기적일 터.

“하아… 다시 일과를 배정하겠다. 인원이 많이 비어 버린 관계로 오늘은 전원 아카데미의 보수 작업에…….”

“라… 랄프 님… 저기 좀 보십쇼.”

한 하인이 낮게 속삭이며 내 등 뒤를 가리켜 보이자.

‘아씨… 또 뭔데?’

난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고.

‘저건…….’

난 더스틴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슨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오는 놈들이 많아? 아니… 그보다 왜 더스틴이 이 시간에……. 설마 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난 애써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더스틴을 맞이했다.

“하하, 더스틴 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어제 순찰을 돌았던 하인들이 있겠지. 그들을 불러내라.]

‘역시 범인을 찾고 있는 건가?’

나는 순순히 어제 흑카데미의 순찰을 돈 하인들을 불러내어.

더스틴 앞에 정렬시켰다.

“저를 포함해 이들이 어제 순찰을 돌았던 인원들입니다.”

[그래?]

더스틴은 나를 쓰윽 보더니.

다짜고짜 팔을 뻗어 하인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잡는다.

[마인드 브레이커.]

“으으으으으…….”

하인의 몸이 축 늘어지자.

더스틴은 눈이 풀린 하인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네놈은 어딜 순찰했지?]

“저, 저는… 지하 감옥과 식당… 위주로 순찰을 돌았… 습니다…….”

[순찰 중에 특이한 걸 본 적은 없나?]

“예… 없습니다…….”

첫 번째 하인에게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더스틴은 뒤이어 다른 하인들에게 거듭 마인드 브레이커 저주를 시전했다.

[빌어먹을…….]

그러나 하인들의 입에서 딱히 쓸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은 탓인지.

더스틴은 혀를 차며 마지막으로 남은 나를 바라봤다.

[네놈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겠지.]

“…예? 그게 무슨…….”

내가 모르는 척 묻자.

더스틴은 질문은 됐다는 듯 내 머리를 잡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마인드 브레이커.]

화아아아악-

‘으음…….’

순간 내 머릿속으로 검은 기운이 흘러들어 와.

삽시간에 내 맑았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든다.

‘으으… 확실히 리치라 그런지 교수들이 거는 것보다 효과가 세네.’

미리 대비를 하여 신성력을 최대한 머리 위쪽으로 보내어.

저주를 막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스틴의 저주는 내 생각 이상으로 효력이 강했다.

‘여기서 무너지면 죽는다. 죽는다고! 으으! 으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이쪽도 목숨이 걸린 상황.

난 정말 모든 힘을 끌어모아 더스틴의 저주에 정면으로 대항했고.

‘후우… 확실히 신성력이 흑마력이랑 상극이긴 해.’

머릿속을 잠식해 가던 기운들이 안개처럼 사라지자.

난 비로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곤.

“으으으…….”

앞의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눈에서 최대한 힘을 풀고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제 네놈이 2층을 순찰했던 걸 알고 있다. 순찰 중에 뭘 봤지?]

‘뭘 보긴? 도서관 사서 도프랑 네 뒤통수를 봤지.’

그러나 난 조금도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놈이 아주 그냥 좋아 죽으려고 할까.’

물론 적당한 변명으로 이 상황을 무마하는 것도 괜찮겠으나.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작은 의심조차 받지 않으려면 내 도둑질을 대신할 사람을 말하는 게 좋겠지. 누가 좋을까…….’

일단 콘스 교수나 아크 교수는 안 된다.

‘이미 두 사람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스틴이 한쪽 편에 서게 된다면, 그 균형이 무너지게 돼. 그럼 나한테까지 그 영향이 올 거고. 나한테 큰 영향은 안 오면서도 평소에 꽤나 귀찮았던 놈이… 그래… 그놈이 딱 좋겠네.’

이른 아침부터 내 속을 긁어 놓고 간 놈이 있지 않던가?

“으으…….”

찰나간의 고민을 끝낸 나는 침을 흘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더스틴 님과… 다른 하인들을 맞닥뜨렸… 습니다.”

[그게… 전부라고?]

더스틴의 말에 실망감이 가득 묻어 나오던 찰나.

‘이 정도 거리면 다른 하인들에게 들리지 않겠지.’

나는 나지막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리고… 베크 교수를… 봤습니다…….”

[베크 교수를 봤다고?!]

내가 마인드 브레이커에 단단히 걸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의심조차 안 하네. 하긴… 설마 한낱 하인이 저주를 풀었다고 생각하겠어?’

목소리에 바짝 힘이 들어간 더스틴을 보며.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습니다. 분명 새벽에… 베크 교수가 2층의 복도를… 거닐던 걸… 봤습니다…….”

[설마 베크 이놈이…….]

더스틴은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며 흑카데미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내게 묻는다.

[그 외에 또 본 건?]

“베크 교수가… 나무 상자를… 들고 있던 걸… 봤습니다…….”

[나무… 상자를?]

마침내 원하던 답을 들은 것일까.

더스틴의 노란 안광이 새빨갛게 변해 간다.

[베크 이놈… 내가 그렇게 배려를 해 줬는데도… 감히 내 뒤통수를 쳐?!]

더스틴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효하자.

‘그렇지! 계속 의심해! 베크 교수랑 사생결단이라도 내라고! 네 심장을 가져간 놈은 베크 교수야!’

난 속으로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베크…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

더스틴이 내게 건 저주를 해제하고 자리를 뜨자.

“랄프 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혹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겠죠?”

하인들이 내게 다가와 걱정스럽게 묻는다.

“으으…….”

그에 난 잠시 머리를 붙잡고 어지러운 척을 하다가.

“망할…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야? 일단 일들 하러 가.”

툭 말을 내뱉었다.

“예? 예…….”

업무를 배정받은 하인들이 자리를 뜨자.

‘베크 교수가 흑카데미로 돌아오면 꽤 재밌어지겠어.’

난 흑카데미의 장엄한 외관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당일 저녁.

‘저녁 전에는 돌아온다고 했으니 슬슬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내가 출입 금지 지역인 검은 숲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조심해서 끌어! 밧줄은 적당히 잡고 있어! 키클롭스가 다치잖아!”

어두운 숲 가운데서 등불을 단 수레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온 건가? 허… 그래도 반은 산 것 같네.’

수레에 묶여 있는 마물을 흘낏 본 나는.

‘반이나 살아남은 건지, 반밖에 못 살아남은 건지…….’

하인들의 숫자를 확인하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장! 잘 썼어! 덕분에 아주 건강한 놈을 잡았다고!”

“아… 예.”

“이것 봐. 오우거랑 사이클롭스의 혼혈이라고! 혼혈종은 진짜 보기 드문 거야. 잘 봐 두는 게 좋을…….”

베크가 신이 나서 자신이 잡아 온 마물을 열심히 설명해 주던 중.

[베크… 드디어 돌아왔군.]

난데없이 허공에서 더스틴의 목소리가 울려오더니.

쇄애애애애액-

거대한 검은 구체가 베크 교수가 있던 자리로 쏘아져 간다.

‘저건… 이런 미친…….’

그에 난 최대한 수레와 멀리 떨어지기 위해.

반사적으로 몸을 힘껏 날렸다.

‘크윽…….’

내가 지면에 부딪쳐 바닥을 구르던 그때.

촤아아아아악-

구체가 덮친 자리는 삽시간에 녹아들어.

수레의 형체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

수레가 있었다가 없어진 탓일까.

베크 교수는 멍하니 수레와 키클롭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더스틴… 이게 무슨 짓이죠?”

천천히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슨 짓이냐고? 도리어 내가 묻고 싶군. 네가 내게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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