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물론 실천하기엔 불가능한 상상이었으나.
괜히 멀어지는 리치 놈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인들을 응급 약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하는 놈이니…….’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그라트니 요새에서 큰 부상을 입은 학생들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하인들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았던가?
‘나야 당시 그 자리에 없었으니 망정이지…….’
내가 선정자건 뭐건 간에 더스틴이라면.
아무런 주저 없이 날 치료제로 사용했으리라.
‘실험 재료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놈도 저놈이고.’
이 흑카데미 안의 모든 사람들 중.
아마도 저 리치의 손에 죽은 하인들이 가장 많을 터.
‘다른 교수 새끼들도 반쯤 미쳤지만 저 늙은 망령 새끼는 더하지.’
그런데 만약 저 미치광이의 라이프베슬을 훔쳐 제물로 바친다면?
‘리치도 족치고 적당한 제물도 바치게 되니 딱 좋을 것도 같은데.’
하지만 무슨 수로 더스틴의 라이프베슬을 찾는단 말인가?
‘보통 리치들은 자신의 라이프베슬을 은밀한 곳에 숨겨 놓는다고 하던데, 분명 저놈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 놨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리치의 라이프베슬을 무슨 수로 찾겠어. 막말로 흑카데미 밖에다 숨겼으면 찾지도 못할 텐…….’
상상을 상상만으로 놔두고 포기하려던 중.
잠시 잊고 있던 한 가지 기억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라트니 요새에서 학생 놈들이 그런 말을 했었지.’
더스틴이 수상쩍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봤다.
그곳은 학생들도 모르는 곳이었다는 게.
그들을 심문하며 얻은 정보였다.
‘그럼… 설마 그곳에 더스틴의 라이프베슬이 있는 건 아닐까? 에이… 설마?’
솔직히 말이 안 된다.
‘자신의 심장을 흑카데미에 두고 다니는 미친놈이 있을까? 당연히 더 음습한 곳에 놔두는 게 맞지.’
하나 그렇다면 더스틴은 왜 그런 비밀스러운 공간을 이용한단 말인가?
‘이건…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물론 그 안에 라이프베슬이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더스틴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공간이라면, 그 안에 귀중한 게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더스틴의 하얀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음…….]
돌연 걸음을 멈춘 더스틴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이봐, 하인장.]
‘뭐… 뭐야?’
“예?”
갑작스러운 그의 부름에 난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답했다.
[지하 감옥에 실험체들이 얼마나 남아 있지?]
“고급 실험체들은 20명 남짓 정도 남아 있습니다.”
[일반 실험체들은 없나?]
더스틴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더스틴 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일반 실험체들은 전부 하인으로 일하는 중입니다.”
‘그 탓에 이쪽도 신참 새끼들 가르치는 게 골치 아프니까, 달프 교수한테 가서 얼른 일손 좀 데려오라 하든가.’
[흠… 그럼 하인 스무 명만 내 집무실로 보내면 좋겠군.]
“스무 명이나… 말입니까?”
그의 말에 난 마른침을 삼켰다.
‘더스틴이 하인을 호출하는 일은 거의 없지. 딱 한 가지 경우만 빼고.’
더스틴은 비정기적으로 하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하곤 했으나…….
‘호출당한 하인들이 살아서 돌아온 적은 없었지… 단 한 번도.’
그렇기에 ‘더스틴의 호출’의 의미를 알고 있는.
나를 비롯한 고참급 하인들은 그의 호출을 굉장히 꺼려 했다.
‘여기서 20명이 더 빠지면 남은 하인들만 죽어 나겠네. 망할…….’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곤 나지막이 말을 던졌다.
“더스틴 님, 더스틴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일손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달프 교수가 새 실험체들을 포획하기 전까지만 호출을 미뤄 주시면 어떨까 하고……. 하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마치며 슬며시 그를 바라봤다.
‘보통 이 정도로 말하면 교수들도 어느 정도 납득을 했으니까, 놈도 납득을 하겠지.’
흑카데미의 교수 놈들이 하인을 소모품 취급 하긴 해도.
인원이 부족하다 말하면 대부분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흑카데미가 돌아가려면 최소한의 하인은 있어야 하니까.’
그러니 더스틴 또한 납득을 하고 돌아설 터.
[일손이 부족하면 남은 인원들이 빈자리를 채우면 되는 것 아닌가?]
‘이 미친놈아! 지금도 인원이 부족하다니까? 적어도 살려서 돌려보내기라도 하든가?! 그것도 아니잖아, 이 미친 뼈다귀 새끼야!’
더스틴의 음습한 한마디에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붓곤.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답하려 했다.
“그게…….”
[인원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게 하인장의 일 아닌가?]
“그야 그렇지요.”
[인원이 모자란 것도 결국 자네의 역량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지.]
‘…뭐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미소만 흘리는 사이.
더스틴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저녁 전까지 스무 명을 내 집무실로 보내 놓게.]
그 말을 끝으로 더스틴은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 * *
그날 저녁.
[수고했네. 가 보게.]
‘후…….’
결국 난 뭣도 모르는 신참 스무 명을 선별하여.
더스틴의 집무실로 보내야만 했다.
‘늘상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입맛이 쓰냐…….’
하인의 죽음은 너무도 당연시되는 곳에서 5년을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는 쉽사리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적응하는 게 이상한 거겠지.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이 개떡 같은 공간이라고.’
난 짜증 나는 마음을 달래고자.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보다 매번 저렇게 하인들을 데려다가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겠네.’
다른 교수들은 하인들을 소모하여 자기들의 연구나 실적 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더스틴은 그런 적이 없었다.
‘설마… 먹는 건 아니겠지?’
생각해 보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서 다른 놈한테 주기도 하는 놈인데 뭔들 못 할까?’
내가 더스틴의 집무실 문을 노려보던 그때.
덜컥-
갑자기 집무실 문이 열리는 것 아닌가?
‘이크…….’
그에 난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악마의 석상 뒤에 몸을 숨기곤 상황을 살폈다.
[음…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당분간은 어떻게든 되겠군.]
열린 집무실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더스틴.
그는 손에 쥔 무언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저건…….’
난 리치 놈의 손에 들린 백탁의 덩어리를 보곤.
저게 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인들에게 라이프 드레인을 썼구나…….’
전에 달프 교수의 교실에서 봤던 그 저주.
그걸 스무 명의 하인들에게 쓴 것이리라.
‘5년간 더스틴의 호출에 날 차출하지 않은 전 하인장들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농땡이 안 치고 열심히 일 한 나를 칭찬해야 하는 건지…….’
저걸 보고 있으니 괜스레 내 마음만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저걸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거지?’
지금 더스틴의 주변에는 치료가 필요한 학생이 없다.
그런데도 하인들의 진기를 빼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흠…….]
내가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더스틴은 백탁의 진기 위로 검은 천을 덮고는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저걸 들고 어딜 가는 거지?’
나는 슬며시 일어나 더스틴의 뒤를 밟았다.
저벅-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내려가는 더스틴.
그가 2층의 우측 복도 쪽으로 사라지자.
‘계속 쫓아가 볼까.’
나는 슬며시 뒤를 따라 복도로 들어가려고 했다.
‘지금쯤이면 복도 중간쯤에는 있겠…….’
그러던 그때.
슥-
[흠…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 같은데…….]
갑자기 더스틴이 복도 끝으로 얼굴만 내민 채 노란 안광을 좌우로 굴린다.
‘이런 미친…….’
그에 난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기둥 뒤에 몸을 날렸다.
[희한하군… 분명 발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학생이라면 단단히 혼을 내야겠어.]
점점 더스틴의 목소리가 가까워져.
[…설마 여기에 숨었나?]
어느덧 기둥 옆에서 더스틴의 음습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발… 좆됐다…….’
더스틴이 조금만 더 걸어온다면.
난 분명 들킬 수밖에 없을 터.
‘젠장… 어쩐다. 싸워야 되나? 하지만 상대는 몇십 년을 살았을지 모르는 리친데 상대가 될까? 하지만 신성력을 사용한다면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만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가던 그때.
덜그럭-
계단 쪽에서 순찰 중이던 스켈레톤의 발소리가 적막함을 찢고 울려왔다.
[스켈레톤이었나……. 순찰 인원을 줄이라고 하든가 해야겠군.]
더스틴의 중얼거림이 점점 멀어지자.
‘후우… 갔구나……. 망할 리치 새끼, 쓸데없이 감만 좋아가지고.’
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얼른 따라가자.’
확실하게 더스틴이 복도 중앙에 있는 걸 보고서야.
난 다시 놈의 뒤를 쫓았다.
사삭-
어느덧 동쪽 복도 끝에 다다르자 난 미행을 멈추고 더스틴의 동태를 살폈다.
‘근데… 여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곳인데…….’
주변에 교실도 기숙사도 없어서.
나를 비롯한 하인들은 이곳을 거의 청소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곳에 숨겨진 게 있다고?’
내가 의문에 잠겨 있던 그때.
[앗실라마시 엔드라미스…….]
갑자기 더스틴이 아무것도 없는 벽에 기이한 술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설마… 진짜로?’
뭔가 있는 걸까?
‘더스틴의 은밀한 공간은 단순히 학생들이 내뱉었던 헛소리가 아니었던 건가?’
[…앙게하 드라스!]
더스틴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드드드드득-
‘…어어?’
벽돌들이 퍼즐 뒤집히듯 뒤집히며 검은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뭐야… 이게 진짜로 있었다고?’
내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더스틴이 검은 공간 사이로 사라지고 벽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대체 뭐 하는 곳이지?’
더스틴의 은밀한 공간에 대한 의문도 잠시뿐.
‘아니, 그것보다 저기에 어떻게 들어가지? 내가 들어갈 수 있긴 한 건가?’
그것보다 원초적인 의문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까 보니까 기이한 말을 내뱉던데……. 흑마법 같긴 한데 일반적인 흑마법은 아니었어.’
내가 알고 있던 흑마법과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설마 무슨 리치만의 오리지널 마법 같은 건 아니겠지? 앗실라마시 엔드라미스…….’
난 더스틴이 내뱉었던 단어들을 속으로 되뇌며.
일단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단은 이 단어가 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야.’
솔직히 더스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그러니 저 비밀 공간을 열 방법을 알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도서관을 뒤져 보자. 책들을 살펴보면 뭔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난 곧장 3층의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도프! 도프!”
내가 낮게 속삭이듯 외치며 사서의 탁자를 툭툭 치자.
[뭐야, 랄프 아냐? 자주 온다더니 오랜만에 왔다? 너도 알다시피 이 일이 좀 심심하냐?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말이야. 어? 섭섭하다, 섭섭해.]
스켈레톤이 날 보곤 덜그럭거리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도프, 도프도 잘 알잖아요? 하인장이 좀 바빠요?”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얼굴이라도 비쳐야 더 의미가 있는 거지. 에휴, 내가 잘못 키웠다, 잘못 키웠어…….]
“알았어요. 자주 올게요, 자주요!”
내 말에 도프가 고개를 빠딱 쳐들고 노란 안광을 뿜는다.
[진짜지?]
“그럼요.”
[좋았어. 그보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도프의 물음에 난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옛 흑마법에 대한 책이 있나요?”
[옛 흑마법? 흑마법이면 흑마법이지 옛날 건 또 뭐야? 그런 건 없어.]
‘무슨 이상한 말을 해서 고대 마법 같은 건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없다고? 잘못 짚었나……. 망할…….’
고대의 흑마법이 아니라면.
그럼 더스틴은 대체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거란 말인가?
‘어쩐다…….’
“앗실라마시 엔드라미스…….”
‘일단은 까먹기 전에 적어 놓기라도 해야겠어.’
더스틴이 외쳤던 문장들을 곱씹으며.
난 도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프, 양피지 좀 주실래요? 깃펜도요.”
[어려울 것 없지. 근데… 방금 전에 중얼거리던 거…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네?”
갑작스러운 도프의 말에 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네가 방금 말한 그거, 백탑의 마법사들이 쓰는 술식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