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29화 (29/200)

29.

“대단하다니요?”

내가 모른 척 묻자.

아크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빙긋 미소 짓는다.

“허허, 모른 척할 필요 없네. 어쨌건 자네도 정화의 성배를 찾아내지 않았나? 자네는 스스로에게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으허허허허허허허허!”

아크 교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무심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그라트니 요새가 정말 운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나?”

‘물론 그건 아니지.’

요새 주변을 휘감고 있는 신성력과 수많은 신관과 성기사들은 학생들에겐 분명한 위협이었으리라.

‘만약 나도 평범한 선정자였다면 꽤나 곤혹을 치렀을 테니까.’

내게 신성력이 없었다면 어쩌면 나 또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건 아닙니다만, 정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번 의식만큼은 학생들이 탑의 출신 여부를 떠나 모두 손을 잡을 정도로 어려운 의식이었네. 그런데도 정말 운이 전부였다고 생각하는 겐가?”

계속되는 아크 교수의 심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학생들이 다 만들어 놓은 길을 뒤따라 걷기만 했을 뿐이니까요.”

“흠…….”

내가 좀처럼 그라트니 요새를 나올 수 있었던 방법을 말하지 않자.

아크 교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허허, 분명 자네는 하인임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자꾸 눈길이 가게 만드는군. 가끔은 자네가 하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될 정도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아크 교수가 경기장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마 교수님만이 절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절 신경 쓰지 않고 있으니까요.”

“허허…….”

아크 교수가 덤덤히 웃던 중.

나는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들어 아크 교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화의 성배를 만져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을 거네. 정화의 성배는 저주를 푸는 데 효과적인 성물이지, 흑마법사들을 소멸하는 성물은 아니니까.”

아크 교수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허허, 정화의 성배의 효능이 궁금하다면 탈출을 시도해 봐도 좋네.”

“…예?”

‘날 떠보는 것 같은데, 탈출을 하는 건 의식이 끝난 뒤야.’

아크 교수의 말에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탈출이라니요? 이제 이곳이 제 집입니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네.”

나와 아크 교수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웅웅웅웅웅웅-

경기장 중앙에서 강렬한 빛이 연이어 터져 나오더니.

“으아아아아악!”

“뭐, 뭐야……. 여긴… 돌아왔어?”

“살았다! 난 살아남았다고!”

흑카데미와 혈탑의 선정자들이 빛 사이로 튀어나와 고함을 내지른다.

“홀슨이다! 홀슨이 살아 돌아왔어!”

“레나 님! 전 레나 님의 복귀를 믿고 있었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선정자들의 복귀에 경기장 안으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오는 사이.

난 다시 아크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화의 성배를 만지지 못한 선정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라트니 요새에 남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아크 교수는 묘한 미소를 보인다.

“반은 정답이네.”

“반만 정답이라 하심은…….”

“흠… 앞으로 얼추 3시간 정도 남았군. 일단은 기다리지.”

‘3시간이 남았다고? 설마 시간 제한도 있었던 건 아니겠지?’

아크 교수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하며 3시간을 기다렸으나.

선정자들이 대거 복귀한 이후로 나타나는 생존자는 없었다.

“허허, 시간이 됐군. 아까의 질문에 답해 주겠네. 지금까지 복귀하지 못한 선정자들의 시체는 그라트니 요새에 남게 될 걸세.”

“…시간 제한이 있었던 겁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그라트니 요새에서 탈출을 시도했다면.

나는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허허, 그건 자네가 어떻게 정화의 성배를 찾을 수 있었는지 알려 준다면 답해 주겠네.”

‘대답하겠냐?’

거기다가 그라트니 요새에 남은 놈들이 죽건 말건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허허, 그런가? 그럼 자네의 운이 계속 지속되는지 지켜봐야겠군.”

내가 아크 교수와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

“두 번째 의식이 종료됐다. 살아남은 선정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볼드 학장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린다.

“너희는…….”

살아남은 것을 축하함과 더불어.

일주일의 휴식기가 주어진다는 볼드 교수의 연설이 끝나고.

“저 새끼 하인장이라며?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듣자 하니 신전에 숨어 있었다나 봐? 다른 선정자들이 성기사들이랑 신관들을 죽일 때까지 기다린 거지.”

“재주도 좋네. 하긴 그 정도 눈칫밥은 있으니 오래 살아남은 거겠지? 5년이나 살아남았다며?”

난 선정자들의 빈정거림을 뒤로한 채.

숙소로 돌아갔다.

* * *

그날 밤.

흑카데미의 회의실 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혈탑의 학장 드레인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청중을 노려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인이 의식에서 살아 돌아왔어요. 어디 하나 잘린 곳 없이 말이죠. 도무지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데 누가 설명을 좀 해 주시겠어요?”

“그저 운이 좋았던 거겠지요.”

시련의 탑 학장 하이머의 말에 그녀는 코웃음을 친다.

“아아, 그럼 하이머 학장의 학생들은 운이 없어서 한 명만 살아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그건…….”

“볼드 학장님, 저희 탑의 학생도 겨우 4명만이 돌아왔어요. 4명이요. 그런데 어떻게 하인이 살아남은 거죠?”

그녀의 물음에.

“하긴… 겨우 10명 남짓이 살았으니 드레인 학장도 의심을 할 만하지.”

“저도 설마 하인이 살아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교수들이 작게 속삭이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아크 교수가 정보를 흘린 거라면… 단언컨대 저희 혈탑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허허, 드레인 학장님. 일단 진정하시지요. 레바논 님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전 이번 의식에 대해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드레인 학장의 사나운 눈매가 아크 교수로 향하자.

아크 교수는 얼른 반박한다.

“그럼 하인 따위가 살아남은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허허, 듣자 하니 그는 선정자들이 정화의 성배를 가는 길을 뚫는 걸 기다렸다고 하더군요.”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아크 교수.

“거기다가 무엇보다 그는 흑마력이 없으니 그라트니 요새의 신성력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오히려 다른 선정자들보다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후우… 그래요. 좋아요, 정말 그 하인 놈이 운이 좋았다고 쳐요. 하지만 그대로 놔두실 건가요?”

드레인 학장이 청중을 보며 소리친다.

“만약 하인 따위가 흑남이 되면 어쩌실 건가요? 모든 아카데미의 명예에 금이 갈 텐데 이대로 방치하실 건 아니겠죠?”

그녀의 말에 회의실에서 멋쩍은 헛기침 소리만이 울리던 찰나.

아크 교수가 입을 뗀다.

“허허, 어차피 그는 한낱 들러리일 뿐입니다. 그가 흑남이 될 일은 없으니 진정하시지요.”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니면 이런 방법도 있죠. 그냥 놈을 죽이면 되지 않나요?”

드레인 학장의 말에.

“뭐, 확실히 그깟 하인장 한 명 죽인다고 의식에 영향이 가진 않을 테니까요.”

“정 드레인 학장께서 거북하게 느끼신다면 죽여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 편이 깔끔하긴 하지.”

일부 교수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크 교수, 우리가 선정자를 죽인다고 해서 의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허허, 문제가 될 건 없…….”

아크 교수가 웃으며 고개를 젓던 찰나.

화아아아아악-

“크으윽…….”

갑자기 아크 교수의 몸 주변으로 검은빛이 솟구쳐 오르더니.

[생각보다 너희는 재미가 없구나.]

괴로워하던 아크 교수의 입에서 기괴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마신께서… 베논 님께서 내리시는 신탁이다!”

비록 한마디의 말뿐이었으나.

말에 담겨 있는 거대한 힘을 느낀 교수들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달라야 할 것이다. 나를 위한 제물을 가져와라.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그 말을 끝으로.

“으으윽…….”

아크 교수가 몸을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괜찮으십니까, 아크 교수님?!”

“허허, 아무래도 레바논 님의 종이다 보니… 마신의 신탁을 받을 때마다 몸에 부담이 가는군요.”

달프 교수가 아크 교수를 부축하는 사이.

혈탑의 교수가 묻는다.

“그런데 제물이라니요? 이미 의식에 필요한 제물은 전부 바친 것 아닙니까?”

“당연히 새로운 제물을 말씀하신 거겠지요.”

“허… 제물이라……. 뭘 드려야 할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데, 다른 교수님들께선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러나 그 어떤 교수도 질문에 선뜻 답하질 못한다.

“여하튼 마신님께서 흡족해하실 제물을 바치는 것, 그게 선정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의식 아니겠습니까? 판단은 선정자들이 할 것이고 결정은 베논 님께서 내리실 겝니다.”

달프 교수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느낀 것인지.

일부 교수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하지만 정말 제물을 바치는 게 끝인 건지 모르겠군요. 앞의 두 의식과는 너무 다르잖아요? 아크 교수! 뭔가 다른 건 없었나요?”

“허허, 비록 잠시뿐이긴 했지만 전 마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지요.”

아크 교수의 말에 교수들이 눈을 부릅뜬다.

“…네?”

“그러니 이번에 선정자들이 올릴 제물 또한 단순한 제물이 아닌 참신한 제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허.”

“혹시 저희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없겠죠?”

드레인 학장이 그를 쏘아보자.

아크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허허, 의식의 모든 건 공평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전 이미 의식의 주관자로서 책임을 지고 죽음을 맞이했겠지요.”

“음…….”

아크 교수의 당당함에 드레인 학장이 낮게 침음하는 사이.

한 교수가 묻는다.

“그런데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잖습니까? 만약 이번 마지막 의식도 그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허허… 그야 선정자들을 비롯하여 그의 노여움을 산 흑마법사들이 죽을 수도 있겠지요.”

“맙소사…….”

말도 안 되는 마지막 의식을 두고 회의실에선.

나지막한 한숨 소리만이 연달아 울린다.

* * *

다음 날, 아침.

“허허, 레바논 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영적 구원을 받는 길이며, 나아가 순교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제는 당연한 하루의 일과가 된 아크 신관장의 예배가 끝난 뒤.

“오늘 하루도 힘차게! 그리고 살아남자!”

“살아남자!”

나는 평소와 같이 하인들에게 일과를 부여하곤.

아직 채 수리가 끝나지 않은 곳을 마무리하기 위해 흑카데미 안으로 들어섰다.

‘젠장… 인원 좀 늘려 달라니까. 하여간 이 빌어먹을 의식 때문에 일거리만 자꾸 늘어나네.’

학생들이 난장판으로 만든 아카데미를 복원하는 것.

당연히 잡일은 우리 하인들의 몫이었다.

‘어차피 하루 안에는 못 끝내니 조금은 느긋하게 해 볼까.’

나는 금이 간 벽면들과 목이 달아난 석상들을 살피다가.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학생들이 거의 안 보이네? 다 어딜 간 거지?’

원래 이 시간이면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거나 연습장에서 서로의 마법을 봐 주는 게 그들의 일반적인 일과였다.

‘어딜 간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난 흑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녔다.

‘남은 녀석들은 각 학파에서 힘이 없거나 말재간이 없는 놈들뿐인데…….’

하지만 내 눈에 보인 학생들이라곤.

파멸, 악마, 저주학파들에서도 소외된 학생들이 전부였다.

‘할 수 없나.’

난 의문을 해소하고자.

“콘스 교수님, 랄프입니다.”

“들어와.”

내 할 일을 다른 하인에게 떠넘기곤 콘스 교수의 집무실을 찾았다.

“거기 앉아.”

콘스 교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곤 날 바라봤다.

“잘 살아남았어.”

‘이년이 웬일로 칭찬을 다 한대?’

“…감사합니다.”

“네 흑마력을 눈치챈 사람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잘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콘스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마지막 의식을 준비하러 나갔어.”

“…예?”

‘나가다니? 설마 흑카데미 밖으로 나갔다고?’

난 생각을 가다듬곤 말을 이어 갔다.

“학기 중에는 외출을 할 수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었지.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야. 볼드 학장의 허가가 났으니까.”

“학장님의 허가가 났다고요?”

대체 마지막 의식이 무엇이기에.

학장이 흑카데미의 규율을 무시하면서까지 허가를 내린 걸까?

‘대체 그놈의 마지막 의식이 뭔데?’

“마지막 의식이 대체 뭡니까?”

“베논 님이 흡족해하실 제물을 바치는 것. 그게 마지막 의식이야.”

‘제물을 바치는 게 마지막 의식이라고?’

이제껏 벌였던 의식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허…….”

난 그제야 왜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 줬는지 납득이 갔다.

‘밖에서 가문의 지원을 받건 뭘 하건 간에 마신이 흡족해할 제물을 갖고 돌아오라는 거겠지. 흑카데미에선 제물을 구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보다… 이거 나한테 너무 불리한 것 아닌가?’

다른 학생들은 밖에서 발품을 팔며 끝내주는 제물을 찾을 텐데.

난 계속 흑카데미 안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에이씨…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딱히 흑남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대충 하인들이랑 치던 카드를 제물로 바쳐 볼까? 아니면…….’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저도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교수님께서 제물을 마련해 주신다거나…….”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터.

“당연히 안 되지.”

‘역시…….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흑카데미 안에서 제물을 구하라고?’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베크 교수가 구해다 줄 테니까.”

콘스 교수의 말에 난 쓴 미소를 지었다.

‘전에 나갔을 때 밖에서도 뭔가 마땅한 게 없던데 뭘 구해 줘?’

결국 흑카데미 안에서 적당한 제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 터.

“…알겠습니다.”

덜컥-

나는 콘스 교수의 집무실을 나가며 생각했다.

‘적당히 구색도 갖추면서 제물처럼 보일 만한 게… 뭐가 없을까. 아무리 그래도 카드는 좀 그렇지?’

명색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하인들이 쓰던 카드를 제물이랍시고 내밀었다가 천벌이라도 받는 건 사양이었다.

‘마신이 만족해하진 않더라도 제물스러운 것… 그런 게 필요한데. 그런 게 있나?’

상대는 무려 마신이다.

온갖 제물들은 다 받아 봤을 터.

‘누군가의 피나 목숨 같은 거야 질리도록 받아 봤겠지. 음…….’

실제로 악마 학파에서 고위급 악마들을 소환하고자.

제물로써 사람의 목숨과 피를 바치지 않던가?

‘악마들도 받는 걸 받고 싶어 하진 않을 거고……. 그렇다면 대체 뭘 제물로 삼아야 하는 걸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거라고 해 봐야 약간의 보석이랑 아공간 주머니 그리고 성마법과 관련된 책들이 전부인데…….’

제물이라는 건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신에게 바치는 행위다.

‘그런데 이 한정된 공간에서 무슨 제물을 구해? 아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좋은 거라고 해 봐야.

콘스 교수에게서 받았던 낡은 지팡이나 아공간 주머니 정도였다.

‘지금 학생들이 자리를 뜬 사이에 기숙사를 털어 볼까? 아냐… 내 흑마력으로 문에 걸린 마법을 파훼하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도무지 적당한 구색 갖추기식 제물이 떠오르지 않은 탓에.

나는 머리를 붙잡고 고뇌했다.

그러던 중.

[음음…….]

흑마법사 치유사이기도 한 리치, 더스틴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옆을 지나친다.

‘흠…….’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중.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리치의 라이프베슬을 제물로 바쳐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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