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28화 (28/200)

28.

“아… 아크… 신관… 게르륵…….”

목에 바람구멍이 난 탓일까.

말카 신관장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허우적거리던 팔을 곧 축 늘어뜨린다.

“마… 말카 신관장님!”

“지금 당장 치료를…….”

당혹한 이단 심문관들이 서둘러 성마법을 사용하여 죽어 가는 말카 신관장을 치료하고자 했으나.

“허허, 아무래도 자네들은 일의 우선순위를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서걱-

“아… 아크 신관장…….”

“헤르인! 이 배반자 노… 게르르륵…….”

“자네들을 기억하겠네.”

아크 신관장이 휘두른 단검에 채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을 붙잡은 채 바닥에 고꾸라진다.

‘뭔 놈의 미친 늙은이가 신체 능력이 저렇게 좋은 거지?’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보다 같은 레바논교를 믿는 사람은 안 죽이는 게 아니었어?’

신관장인 자신이 레바논을 믿는 이를 직접 죽이면 순교가 되지 않으니.

당연히 타인의 손을 빌릴 거라 생각했건만.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순교하라는 말을 쓰지 않긴 했는데. 젠장… 설마 일이 이렇게 돌아갈 줄이야.’

나는 단검을 든 채 날 바라보는 아크 교수를 보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되지? 흑마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저 늙은이를 이길 수 있을까? 신관장과 이단 심문관들도 순식간에 죽여 버리는 놈을?’

아마 내가 흑마법을 발현하려고 하는 순간.

단검으로 내 목을 도려 낼 터.

“자네는 안 덤비는 건가?”

“…제가 할 일은 악의 종자들을 고문하여 정보를 얻는 일입니다. 방금 전의 일은 신념의 차이로 벌어진 사고일 뿐이니 제가 아크 신관장님을 적대할 이유도 없지요.”

“…뭐?”

나의 대답에 아크 신관장은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으허허허허허허!”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신념의 차이로 벌어진 사고일 뿐이라고?”

“말카 신관장님의 이념에도 동의하지만, 어둠이 있어야 빛도 존재한다는 아크 신관장님의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니 제가 아크 신관장님을 적대할 이유도 없지요.”

“허허, 그렇게라도 내 고생을 알아주니 기쁘군. 그리고 고맙네. 순교가 아닌 무분별한 살인은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네.”

‘…뭐요? 무분별한 살인은 안 좋아해?’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행히도 아크 신관장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내 옆을 지나간다.

‘그래. 그냥 가라. 그냥 좀 가!’

끼이이익-

아크 신관장이 고문실의 문을 젖히던 찰나.

“그런데 말이네…….”

갑자기 그가 손을 멈추곤 고개를 돌린다.

“왠지 어딘가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 같은데. 혹시 날 만난 적이 있나?”

‘이런…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았는데 이걸 눈치챈다고?’

“그라트니 요새에 오기 전에는 대신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아크 신관장님께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허허, 그런가? 대신전 출신이 그라트니 요새에 왔다니. 흔치 않은 일이군.”

‘하긴… 흑탑의 유능한 흑마법사가 최전선으로 쫓겨난 꼴이니 이상하게 보겠지.’

아크 신관장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자.

난 얼른 대답했다.

“몇몇 분께서 제 소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던 모양입니다.”

“흠… 그런가……. 안타까운 일이군.”

윗사람에게 찍혀 그라트니 요새에 오게 됐다는 나의 변명이 먹힌 걸까.

아크 교수는 혀를 차다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자네의 이름은 뭔가?”

‘갈프는 가명으로 쓸 수 없어.’

“할프입니다.”

“할프… 할프라……. 기억이 나질 않는군. 아무래도 자네의 얼굴을 봐야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복면을 벗어 보겠…….”

아크 신관장이 내게 질문을 던지려던 그때.

우르르르르릉-

돌연 열린 문틈 사이로 커다란 굉음이 울려온다.

“흑마법사들의 기습이다! 악의 종자들이 신전을 급습했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은 당장 올라와!”

고문실 밖에서 남자들의 고함이 들려오자.

“허허, 제법 눈치가 빠른 학생들이 있는 모양이야.”

아크 교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사사사사삭-

갑자기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바닥에 고인 핏물을 잉크 삼아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뭘 하는 거지?’

“이걸 받게.”

“이건…….”

“내 이름이 적힌 추천서네. 이걸 갖고 대신전에 가거든 훗날 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네. 그럼 다음에 보세.”

아크 신관장은 양피지를 던지듯 내게 넘기곤.

죽은 이단 심문관의 복면을 벗겨 착용하고 재빨리 문밖으로 몸을 날린다.

‘간 건가?’

아크 신관장이 계단을 타고 곧 사라지자.

‘후우… 살았다……. 진짜 꼼짝없이 걸리는 줄 알았네.’

난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살다가 흑마법사 따위에게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놈들이 밖에서 난동을 피운 덕에.

아크 교수의 관심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그보다 추천서는 또 뭐야?’

난 아크 신관장이 남기고 간 추천서를 재빨리 훑어봤다.

‘그러니까 내가 굉장히 생각이 열려 있는 인재이니까 대신전에서 받아 줬으면 좋겠다는 건데…….’

솔직히 이딴 추천서를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또 알아? 쓸 일이 있을지. 일단 챙겨 두자.’

난 추천서를 비롯해 고문 도구들과 말카 신관장이 쓰고 있던 옷가지와 지팡이를 챙겨.

아공간 주머니에 잘 집어넣곤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학생들이 그라트니 신전을 습격한 거지? 이번 의식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건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왜 그들은 그라트니 신전을 습격한 걸까?

‘그라트니 신전에 이번 의식을 끝마칠 단서가 있으니까 그랬을 확률이 높아 보이긴 한데, 그 단서라는 게…….’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문뜩 한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정화의 성배……. 그래. 아크 교수가 말카 신관장에게 이곳에 아직 정화의 성배가 있냐고 물었지. 왜 물었을까? 그냥? 아니야, 분명 이번 의식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라트니 신전을 습격한 학생들.

그리고 정화의 성배의 유무를 물은 아크 교수.

이 사항들을 조합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정화의 성배가 이번 의식의 키구나!’

그러나 정화의 성배가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학생들이나 아크 교수가 정화의 성배를 차지할 때까지 기다려 볼까? 그게 가장 나은 것 같긴 한데…….’

사태를 관망하는 게 현실적인 선택지긴 했으나.

불현듯 나의 가슴에 한 가지 불안감이 자리했다.

‘막말로 정화의 성배라는 게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 같은 거라면… 혹시 인원 제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첫 번째 의식 때 절반만 살아남는 게 의식의 목적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리라.

‘결국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바로 행동에 옮기는 수밖에 없는데. 흠… 그러려면…….’

난 생각을 정리하곤.

죽어 있는 이단 심문관 옆에 놓여 있던 창을 잡아 들었다.

“놈들의 공격이 거세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 이단 심문관들도 당장 올라와 가세해!”

지상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난 속으로 미소 지었다.

‘지금 가세하러 갑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갑자기 흑마법사들이 왜 그라트니 신전을 공격하는 거야?”

난 불만을 토로하는 이단 심문관들 사이에 섞여.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워…….’

신전 안은 이미 난장판인 상태였다.

덜그럭-

“이 저주받은 마물 따위가!”

수십 구의 스켈레톤들이 성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끼기기기기기긱-

혈탑의 학생들로 보이는 박쥐 떼가 신전의 천장을 돌아다니며 활개를 친다.

“아아아아악! 목을 물렸어! 아아… 뭔가 느낌이… 으으…….”

“일반인들은 물러나라! 신성력이 없으면 놈들의 하수인이 될 뿐이야!”

목을 물린 수녀들이 무기를 잡고 성기사들과 신관들을 공격했고.

“으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빈틈을 보인 이들의 머리 위로 흑카데미 학생들의 저주가 쏟아진다.

‘설마 학생들이 연합한 건가?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놈들이?’

그만큼 두 번째 의식이 학생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반증이리라.

‘그보다 신전 측의 방어 병력을 이끄는 놈이 있을 텐데… 어디에 있는 거지?’

워낙 신전 안의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대장급의 인물을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단장님!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지원병은 멀었나?!”

“아직인 것 같습니다!”

‘저기 있었구나.’

난 백색의 갑옷을 두른 채 대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발견하곤.

얼른 그의 옆으로 뛰어갔다.

“말카 신관장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냔 말이다! 신관장님이 성마법을 사용하신다면 이깟 놈들은…….”

“단장님! 단장님!”

나의 부름에 단장이라 불리던 남자가 날 바라본다.

“이단 심문관인가. 지금 상황을 봤으니 알겠지. 자네도 무기를 들고 가세해야…….”

“큰일 났습니다! 저 악마의 주구들의 기습에 말카 신관장님께서 그만…….”

“…뭐라고?”

나의 말에 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간다.

“그럴 리가 없다! 말카 신관장님께서 이깟 놈들에게…….”

하지만 내가 말카 신관장의 피 묻은 로브 자락을 꺼내어 보이자.

단장을 비롯하여 신관들과 성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대체 이게…….”

“신관장님께서 정말로 놈들에게 당했다고? 이럴 수가 있나…….”

저들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난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이단 심문관들 중에 배반자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홀로 올라왔던 이단 심문관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크 교수가 이단 심문관의 복면을 쓰고 올라갔으니까.’

“한 사람이 있긴 했는데…….”

한 성기사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놈입니다! 놈이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대체 왜…….”

“놈들은 정화의 성배를 노리고 있습니다! 말카 신관장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놈들에게서 정화의 성배를 보호하라고 제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미 그 배반자 놈이 정화의 성배가 있는 곳에 도달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악마들이 감히…….”

나의 보고에 성기사단장의 얼굴에 점차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에반스! 카른! 루탄! 지금 당장 날 따라와라!”

“예!”

“그리고 남은 인원들은 전력을 다해 신전을 사수해라! 알았나?!”

‘뭐야. 나도 데려가야 할 것 아냐!’

명령 하달을 끝마친 성기사단장에게 난 재빨리 물었다.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그런데 자네의 이름이 뭔가?”

‘…이름?’

여기선 떠돌이 신관 갈프라는 이름은 댈 수 없다.

지금의 난 이단 심문관이니까.

‘그렇다고 새로운 가명을 쓸 수도 없어. 성기사단장이면 이곳의 사람들 이름도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난 이단 심문관의 이름 하나를 알고 있었다.

‘놈이 죽기 전에 소리쳤던 이름이… 헤르인이라고 했었지.’

“헤르인입니다.”

난 아크 교수의 손에 죽었던 이단 심문관들 중 한 명의 이름을 댔다.

“헤르인이었군. 자네의 의지는 알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네. 자네는 이곳을 지켜 주게.”

“하지만…….”

“명령이네!”

‘끙… 여기서 더 밀어붙였다간 오히려 의심만 사겠어. 차라리 일단 수긍하고 이놈들의 뒤를 쫓든가 해야지.’

“알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와라!”

성기사단장과 성기사들이 전선을 이탈하여 내달리기 시작했고.

‘얼른 쫓아야겠어.’

나는 적당히 창을 휘두르는 척을 하다가.

냅다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분명 이곳으로 갔는데…….’

성기사단장이 예배실 부근으로 달렸던 걸 생각하며.

난 예배실 주변을 살폈다.

‘어디로 갔지? 여기는 끝 쪽이라 더 이상 이동할 곳도 없는데. 가만… 저건…….’

어째선지 레바논의 신상은 뒤로 밀려 있었고.

본래 레바논의 신상이 있던 자리에서는 지하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비밀 통로가 있었구나!’

아마도 이 밑으로 가면 정화의 성배를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지금 바로 들어갔다간 성기사들을 맞닥뜨릴 수도 있겠지.’

아무리 내가 비약적인 마법 발전을 이뤄 냈다고 해도.

성기사 3명에 성기사단장을 상대하는 건 꽤나 까다로운 일일 것이다.

‘일단 구석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자.’

예배실의 구석의 커다란 단상 뒤에 몸을 감추고 기다리길 몇십 분.

“얼른 돌아간다! 시간이 없다!”

“예!”

마침내 성기사들이 지하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에반스, 너는 이곳을 지키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전원 무사히 나온 걸 봐선 밑에 아크 신관장은 없다고 생각해도 될 거고, 그렇다면 정말 성배가 흑카데미로 이동하는 키인 모양이네.’

그렇다면 어떻게든 저 안으로 들어가야만 할 터.

‘저 성기사 놈의 시선만 돌린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어.’

생각을 끝마친 난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스켈레톤을 풀면 잠시간 시선을 끌 수는 있겠지.’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 몰래 빼돌렸던 뼈들을 꺼내곤.

흑마력을 불어넣었다.

덜그럭-

스켈레톤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이 악마의 종자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것이냐!”

기쁘게도 성기사가 곧장 고함을 지르며 반응을 보였다.

“죽어라!”

성기사가 스켈레톤들에게 달려드는 사이.

‘이틈에 얼른 들어가 보실까.’

난 몰래 바닥을 기어가려 했다.

그러나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가만…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곤 아크 신관장밖에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두 번째로 도착한다는 건데…….’

과연 그게 맞는 걸까?

‘아냐. 그래선 안 돼.’

한낱 하인장이 수많은 학생들보다 빨리 의식을 벗어난다면.

그때부턴 분명 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을 터.

‘냉정하게 생각해. 빨리 간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살아남으면 그걸로 족한 거지, 다른 교수들의 의심을 사면 안 돼. 나중에 탈출조차 하기 힘들어질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구석에 몸을 숨기고 다른 선정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놈들이 예배실로 간다! 막아! 막… 커헉!”

“뚫었다! 달려!”

예배실 저 멀리서 병장기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곧 학생들이 예배실로 뛰어 들어온다.

“분명 이쪽에 정화의 성배가 있다고 했는데…….”

“저거! 저기 봐! 저기에 지하로 가는 입구가 있어! 저것 아냐?!”

“저쪽이다! 빨리 달려!”

학생들이 앞다투어 계단을 타고 사라지자.

‘딱 1분만 세고 따라가면 되겠지.’

난 바깥의 정황을 살피다가 헐레벌떡 신상 밑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행여나 학생들이 있을까 경계하며 지하의 긴 길을 정신없이 걷던 중.

‘저긴…….’

난 길의 끝에 있는 작은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정화의 성배인가?’

은은한 빛이 감도는 작은 방.

그 중심, 성배로 보이는 커다란 황금 잔이 제단 위에 있었다.

‘저걸 만진다면 정말 이 빌어먹을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주변에서 학생들이 보이질 않는 것으로 봐선 역시 저게 일종의 포털 같긴 한데…….’

솔직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진 않았다.

‘흑남을 선정하는 의식인데 성배를 만지면 흑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긴 하네. 근데… 정말 만져도 괜찮은 거겠지?’

그래도 명색이 신전에서 귀하게 보관하던 것인데.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에이씨… 여기까지 왔어. 더 물러설 곳은 없다.’

난 침을 꿀꺽 삼키곤 천천히 정화의 성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내 생각이 맞아라. 제발!’

웅웅웅웅웅웅-

나의 손이 성배에 닿자.

갑자기 정화의 성배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나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이건 또 뭐야?!’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웅웅웅웅웅웅웅웅웅-

성배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점점 강렬해지더니.

사삭-

빛이 있던 자리로 묘한 정적만이 흐른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흑카데미의 경기장.

“이야아아아! 역시 흑카데미야! 우리 선정자들이 제일 많이 살아남았잖아?!”

“혈탑이나 시련의 탑이나 결국 흑탑의 밑이라는 게 확실히 증명된 거지.”

“저 음침한 새끼들이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비쩍 말라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너희 혈탑 새끼들보단 차라리 음침한 게 낫지. 불만 있으면 덤비든가?”

학생들이 자아내는 숙연함과 수군거림만이 가득한 경기장을 보며.

난 빠르게 벗었던 복면을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곤 생각했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그 빌어먹을 환경에서도 난 살아남았다.

‘후… 다행이야. 정말로…….’

난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누르곤 주위를 힐끔 살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이미 경기장 주변에서는 앞서 성배를 만졌던 학생들이.

환호성에 보답하고자 손을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관심은 전부 다 너희가 가져가라.’

그깟 관심?

내게는 단 1도 필요 없는 사치일 뿐이고.

오히려 무관심이야말로 내게 더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어? 저것 봐! 하인장도 살아남은 것 같은데?”

“그러네? 이야, 저 새끼는 재주도 좋아. 어떻게 살아남은 거래?”

“선정자들이 의식을 해결할 때까지 어디에 몰래 처박혀 있던 거겠지. 야! 넌 왜 살아남은 거냐!”

일부 학생들은 살아남은 나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지만.

난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얼마든지 욕해. 난 꼭 이 개 같은 곳을 나갈 거니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흑카데미를 나가는 것이지.

저들의 관심을 사는 게 아니었기에 내가 도리어 속으로 미소를 짓던 그때.

“허허, 이번에도 살아남다니. 대단하군.”

아크 교수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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