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의식을 진행 중인 학생들의 신원을 팔아먹는 건.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변명거리였다.
‘학생들 엿도 먹이고 적당히 변명도 되고. 딱 좋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성기사들이 당혹해하자.
나는 어두운 표정을 연기하며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제껏 제게 임하셨을 때는 추상적인 신탁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달랐다 하심은…….”
“제게 그라트니 요새의 정경을 뚜렷하게 보여 주시더군요. 마치 현실처럼 말이죠.”
‘확신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믿는 눈치네. 여기서 쐐기를 박자.’
성기사들이 내 말에 깊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난 목소리를 낮추고 무겁게 말을 꺼냈다.
“레바논 님께서 제게 보여 주셨던 그라트니 요새는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그라트니 요새는 수많은 성기사들의 비호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마의 종자들이 요새를 함락할 수 있다는 겁니까?”
“아무리 신관님이라고 해도 그건 좀…….”
‘하긴 곧 요새가 불탄다고 하면 누가 쉽게 믿겠어?’
그것도 신전에 정식으로 소속된 신관도 아니고.
떠돌이 신관의 말은 더더욱 믿기 어려울 터.
“정말일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만약 거짓말이면 어떡하지?”
“일단 대장께 보고는 하자. 경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성기사들은 저들끼리 작게 속삭이더니.
못 미더워하면서도 조금은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신관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요새 내의 경계를 늘리도록 요청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낼 수 있겠습니다.”
내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 성기사가 묻는다.
“그런데 신관님, 지내실 곳은 있으십니까?”
“저는 그저 비를 피할 곳만 있어도 족할 뿐입니다.”
“그럼 잠시 신전에서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신전? 들어가도 흑마력을 갖고 있는 걸 들키진 않겠지만, 좀 찝찝한데.’
“휴식을 취하고는 싶지만 간악한 놈들이 요새에서 난동을 피울 생각을 하니, 쉴 생각이 들질 않는군요.”
“그러지 마시고 조금 쉬시지요.”
“맞습니다. 혹시라도 흑마법사들을 발견한다면 곧바로 신관님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음… 이러면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데. 그래, 이참에 신전이나 좀 가볼까. 괜히 다른 학생들을 맞닥뜨리는 것보단 신전에 있는 게 안전할 수도 있잖아?’
물론 학생들을 피하려다 아크 교수를 맞닥뜨리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위험을 피하려면 다른 위험을 감안하는 수밖에 없어. 그라트니 요새의 성기사들이랑 신관 전원을 상대하는 것보단 아크 교수만 상대하는 게 상대적으로 나으니까.’
선택지가 최악과 차악뿐이라면.
차악을 선택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아크 교수가 날 보면 모른 척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뭐, 일단은 맞닥뜨릴 일이 없길 바라야겠다만…….’
“계속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테니 그럼 조금 신세를 지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따라오시죠. 제가 신전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 세이른입니다.”
성기사가 손을 내밀자.
‘음… 본명을 쓸 필요는 없겠지. 여기선 가명을 쓰자.’
“갈프 신관입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미소를 보였다.
“에른, 일단 대장님께 이 사실을 보고해.”
“알았어.”
그사이 성기사 한 명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다른 두 명이 내 좌우에 붙어 요새를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까르륵-
‘흠… 요새라고 해서 기사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민가도 많네.’
정비된 길거리 위로 울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흑카데미에선 느껴 볼 수 없던 생동감이 있었다.
“최전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평화롭군요.”
“레바논 님께서 저희를 지켜 주시는 것도 있겠습니다만, 요즘은 비교적 조용한 편입니다.”
“가끔 고위급 흑마법사들이 경계 일대에 출몰하는 걸 빼면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성기사들의 말에 난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놈들의 힘이 많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고위 흑마법사 100명 정도가 몰래 수도로 들어와 교황님을 노렸다고 하니까요.”
“허… 그런 큰일이 있었다니……. 외지에 있다 보니 몰랐습니다. 혹시 교황님께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요?”
내가 안타까워하며 혀를 차자.
성기사들이 빙긋 웃는다.
“다행히 교황님의 직속 성기사단이 놈들을 처부쉈다고 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거기다가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았던 이단들도 대거 솎아 냈다고 하니 모두 레바논 님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성기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도착했습니다. 저기가 그라트니 신전입니다.”
나는 어느덧 신전을 눈앞에 둘 수 있었다.
성기사는 수녀와 신관으로 보이는 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이쪽으로 오십쇼. 신관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데리고 신전 안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기둥을 몇 개나 지나쳤을 즈음.
“세이른, 날 찾았다고 들었네.”
하얗고 정갈한 의복을 입은 노인이 우리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으나.
난 그 미소가 어딘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이놈도 아크 신관장처럼 순교에 미친 놈은 아니겠지?’
워낙 아크 신관장이 순교 갖고 난리를 친 것 때문인지.
이제는 신관장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편견이 묻을 수밖에 없었다.
“예, 말카 신관장님. 이쪽에 계신 신관님께서 며칠 정도 신전에 머무르고 싶다고 하셔서 찾아뵙게 됐습니다. 각지를 떠돌며 레바논 님을 전파하시는 신관님이시랍니다.”
“오오… 그런가? 이 또한 레바논 님의 축복입니다. 기도를 드리러 오신 겁니까?”
말카 신관장은 반갑게 날 맞이하면서도.
성기사를 보며 묻는다.
“단순히 신관님을 소개하려고 날 찾은 건 아닐 것이고, 무슨 일인가?”
“그게…….”
세이른이 신관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이자.
“음…….”
말카 신관장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져 갔다.
“…자네의 말은 잘 알겠네. 하지만 쉽사리 믿기 어렵다는 건 자네도 잘 알 거라고 보네.”
“맞습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수비대장님께 제 동료를 보내 놨습니다. 여기 계신 갈프 신관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습니다만, 그래도 확인이 필요할 테니까요.”
“잘했네.”
말카 신관장의 칭찬에 세이른은 고개를 숙여 보이곤.
“그럼 저흰 다시 임무를 수행하러 가 보겠습니다.”
동료와 함께 신전을 나간다.
“갈프 신관님이시라고 하셨지요? 그라트니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쪽에 있는 수녀님을 따라가시겠습니까? 그녀가 쉴 곳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쉬기보단 밖에서 좀 더 상황을 보고 싶은데…….’
방 안에 들어가게 되거든.
바깥의 정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기가 어려울 터.
“하하, 그 전에 레바논 님께 먼지 기도를 올리고 싶군요. 하루라도 손에서 기도를 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내가 정면에 있는 레바논의 신상을 보며 빙긋 웃자.
“허… 이토록 신실할 수가……. 좋습니다.”
말카 신관장은 감탄하며 나를 신상 앞으로 안내한다.
“기도를 끝마치시거든 저기에 있는 안나 수녀님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는 업무가 있어 그럼…….”
“배려에 감사합니다.”
말카 신관장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사라지자.
‘기도는 무슨 기도……. 적당히 시간이나 죽이자.’
난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척하며 신전 안을 흘낏거렸다.
몇 시간 뒤.
‘이 정도로 살폈는데도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아크 교수는 없는 것 같네.’
다행히도 그라트니 신전 안에서 아크 교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난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오… 무릎 아파 죽겠네.’
몇 시간이나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다리가 저려 온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힘들긴 하네. 신전 안도 얼추 확인했으니 슬슬 안내해 달라고 할까.’
내가 안나 수녀를 흘끔 바라보던 그때.
“갈프 신관! 갈프 신관!”
말카 신관장이 내 가명을 부르며 황급히 뛰어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말이 맞았네! 간악한 흑마법사 놈들이 요새 안에 들어와 있었어!”
“잡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말카 신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잡힌 건 두 놈이네. 고문실에 보내 놨으니 머지않아 결과가 나올 걸세.”
“다행이군요.”
“자네의 공이 컸네! 자네의 경고 덕에 큰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
말카 신관장이 내 두 손을 잡자.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그보다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하지 않겠나? 자네가 걸어온 복음의 길도 듣고 싶군.”
결국 난 말카 신관장에게 붙잡혀.
몇 시간이고 레바논에 대해 토론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흠… 확실히 그런 관점으로도 생각을 해 볼 수 있겠군. 뛰어난 발상의 전환이야.”
“하하…….”
말카 신관장과의 대화는 내게 있어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거참 인생 아이러니하네. 빌어먹을 아크 신관장이 나눠 줬던 찌라시 같은 양피지가 도움이 될 날이 올 줄이야.’
아크 신관장 때문에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 레바논교에 대해서 배웠으니 말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대화였네. 내일도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
나와 말카 신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덜컹-
방문이 열리고 수녀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신관장님, 심문이 끝났다고 합니다. 이단 심문관들이 흑마법사들의 처우를 물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처리하라고 하게. 악의 싹을 남겨 둘 필요는 없으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흠… 어떤 머저리들이 잡혀 왔나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아 참, 그리고…….”
“…뭐라고? 그게 정말 사실인가?”
수녀의 소곤거림이 이어질수록.
말카 신관장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간다.
“놈들이 진실을 말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단 심문관들께선 놈들이 빠르게 자백한 걸 봐선 그럴 확률이 높다고 전달하라 했었습니다.”
“허어…….”
‘뭔데? 대체 무슨 일인데?’
대체 붙잡힌 학생 놈들이 무슨 자백을 했기에.
말카 신관장의 표정이 저렇게 어두워진 걸까?
“그럼 전…….”
수녀가 방을 나서려던 찰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난 말카 신관장을 보며 말했다.
“왜 그러나?”
“비록 그들이 흑마법사가 됐다고는 하나, 그들도 흑마법사 이전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안식의 기도를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자네는 참… 자애롭군. 자네 같은 신관들이 많아야 할 텐데. 후우… 그렇게 하게.”
말카 신관장이 한숨을 내쉬며 허락하자.
난 깊게 고개를 숙이곤 수녀에게 안내를 부탁하여.
계단을 타고 신전의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이곳입니다. 들어가시지요.”
“혹시 들어가기 전에 저분들이 쓰고 있는 걸 빌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단 심문관들이 쓰고 있던.
도둑놈들이 쓸 법한 눈과 입만 드러내고 있는 복면을 가리키자.
수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 복면은 왜 필요하신지…….”
‘그야 만약이라도 내 얼굴을 학생들에게 들킬까 봐 그렇지.’
어차피 붙잡힌 학생들은 죽임을 당할 거긴 하지만.
난 좀 더 확실히 내 신원을 숨기고 싶었다.
“저들이 제 얼굴을 보고 제 기도마저 거부할까 봐 그렇습니다. 제 얼굴이라도 가린다면 저들도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요.”
솔직히 뭔가 내뱉고 보니 말 같지도 않은 궤변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아… 이해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복면을 가져다드릴게요.”
의외로 수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곧 검은 복면 하나를 가져와 내게 건넸다.
‘좀 크긴 한데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난 복면을 뒤집어쓰고 수녀가 가리킨 방문을 천천히 젖혔다.
‘여긴…….’
곳곳에서 핏자국과 수많은 고문 기구들이 보인다.
‘저놈들이 잡혀 온 놈들인가. 근데 겨우 두 명만 잡은 거야? 생각보다 많이 안 잡혔네.’
복면이 씌워진 채 밧줄에 묶여 있는 두 남학생.
이미 사실을 실토한 건진 몰라도 몸 곳곳에 고문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이참에 의식에 참여한 놈들이 싸그리 잡히면 얼마나 좋을까.’
난 속내를 숨긴 채 이단 심문관들을 바라봤다.
“그럼 최후의 기도를 올리기 전에 심문관님들과 수녀님께선 잠시 밖으로 나가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난 슬쩍 문을 살폈다.
‘고문실이라 그런가, 이 정도 문짝이면 안의 대화가 밖으로 나갈 일은 없겠네.’
조금 전에 피를 뒤집어쓴 이단 심문관이 다른 방에서 나왔는데도.
그 안에서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걸 봐선 방음은 철저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다.
‘좋아. 시작해 볼까.’
모든 확인을 끝낸 뒤.
난 놈들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복면을 벗겨 냈다.
“읍! 읍읍!”
눈물을 줄줄 흘리는 두 학생의 얼굴이 드러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어이구, 하필 또 아는 얼굴들이 잡혀 왔네.’
이놈들의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마인드 브레이커를 걸어서 얼굴 평가를 받았던 놈들 아냐?’
“읍? 읍! 읍읍읍읍읍읍!”
경기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보며.
난 천천히 그들의 입에 물려 있던 밧줄을 풀어 줬다.
“제발…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알려 드렸어요! 정말이에요! 뭐든 할게요! 레바논의 개가 되라고 명령하면 바닥이라도 길 테니까 제발…….”
“저는 할머니를 홀로 봉양하고 있어요. 제가 죽으면 할머니도 머지않아 돌아가실 거예요. 그러니…….”
‘복면을 쓰고 있어서 날 이단 심문관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거야 그렇다 치고… 이거 꽤 재밌네.’
아카데미에선 오만하기 짝이 없던 그들이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애원하는 모습은 꽤나 절경이었다.
‘이참에 놈들에게서 정보나 좀 얻어 내 볼까?’
날 이단 심문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놈들에게서 돈이 되는 정보라도 캐내면 좋을 터.
“지금부터 너희에게 기회를 주마.”
난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들을 내려다봤다.
“기, 기회라 하심은…….”
“지금부터 두 명 중에서 양질의 정보를 내뱉는 한 명만 살려 주겠다.”
“한 명만… 이라고요?”
두 학생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 전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어요. 가문의 비자금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요!”
“전 저놈보다 더 대단한 걸 알아요! 흑탑의 마법사들의 체계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앞다투어 자신이 은밀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들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흠… 생각보다 쓸 만한 정보가 없는데?’
하지만 학생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뭔가 엄청난 정보라고 생각될 그런 정보는 없었다.
“별것 없군.”
가문의 비자금도, 은신처 등 나름 비밀스러운 정보를 언급했음에도.
내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저… 저희 아카데미에선 스켈레톤들이 작업을 해요!”
“교수들은 모두 흑탑에서 선별한 인재들만 채용하고요!”
학생들은 어떻게든 내 흥미를 끌어 보기 위해 별 시답잖은 소리까지 지껄이기 시작했다.
‘다 아는 사실들이잖아?’
그러나 그마저도 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래. 학생들한테서 뭘 기대하겠냐.’
살려 달라 애원하는 학생들을 뒤로하려던 찰나.
“저희 아카데미에는 은밀한 공간이 있어요! 저만 아는 사실이라고요!”
‘…은밀한 공간? 그런 곳은 없을 텐데.’
“은밀한 공간?”
내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난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친다.
“예! 더스틴이라고 미친 리치 놈이 있는데 그놈이 아카데미의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호오… 아카데미 안에 나도 모르는 숨겨진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더스틴이 이용하고 있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숨겨진 공간은 어디에 있지?”
“저도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2층에 있는 복도 끝의 벽을 만지니까 갑자기 몸이 사라졌어요!”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일까.
학생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기가 아는 모든 정보를 털어놓는다.
“사실인가?”
“예! 정말이에요!”
“네 말이 진실일지 거짓일진 확인해 보면 알겠지.”
난 두 학생의 머리를 붙잡은 채 나지막이 읊조렸다.
“마인드 브레이커.”
“…뭐? 무슨… 너… 누구야! 누구… 으윽…….”
내 입에서 익숙한 저주가 흘러나오자.
두 학생의 얼굴이 경악과 고통으로 물들어 간다.
“글쎄? 누굴까.”
“으으으으으윽…….”
몇 분 뒤.
“기도는 잘 끝마치셨나요?”
내가 고문실을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수녀가 말을 걸어온다.
‘그럼. 잘 끝마쳤지. 덕분에 놈들의 고백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까. 알찬 기도 시간이었어.’
“예. 레바논 님의 배려 덕에 저들에게 최후의 복음을 무사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올라가실까요?”
난 수녀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지하 계단을 올라갔다.
‘더스틴의 은밀한 방이라…….’
흑카데미의 치료사이자 리치이기도 한 더스틴.
내가 흑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활동 중이던 녀석의 은밀한 방이라니.
‘흑카데미로 돌아가거든 한번 살펴봐야겠어. 리치의 방이니까 엄청난 게 있을지도 몰라.’
내가 생각에 잠긴 채로 계단을 올라가던 중.
“복면은 안 벗으시나요? 답답하실 것 같은데…….”
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어서 잊고 있었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웃으며 복면을 벗으려 손을 집어넣던 그때.
“허허,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들은 정말 그 악마의 종자들이 한 말을 믿는 건가?”
‘이 목소리는…….’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온다.
난 반사적으로 복면을 벗으려던 손을 내리곤.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죄송합니다, 아크 신관장님.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허허… 이해할 수가 없군.”
‘저, 저건 미친 늙다리 아냐?!’
그곳에는 어째선지 두 성기사에게 붙들려 지하로 내려오는 아크 교수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