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이 늙은이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하지만 딱히 아크 신관장의 말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난 아크 교수의 집무실에서 나의 개인실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그 망할 신관장… 왜 갑자기 나한테 베크 교수에 대해 물어본 거지?’
아크 신관장과 베크 교수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베크 교수가 콘스 교수와 손을 잡은 것만 빼면 말이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아크 신관장이 알고 있진 않을 텐데… 설마 단순히 감만으로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리 아크 신관장이라고 해도.
감만으로 베크 교수와 콘스 교수의 관계를 눈치챌 수는 없을 터였다.
‘왜 아크 신관장이 베크 교수에게 관심을 갖게 됐을까. 왜…….’
나는 고민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우거가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아크 교수만 노렸었지. 아크 교수가 자리를 피하려고 해도 미친 듯이 쫓아갔었고.’
상대적으로 허약한 학생들이나 하인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주변에 비홀더가 있었나? 아냐… 없었어.’
마치 그 광경을 비춰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베크 교수는 마물학 교수야. 그럼… 그 마물들에게 베크 교수가 명령하는 게 가능하다면? 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왜 아크 교수가 내게 베크 교수에 대해 물었는지 나름 납득이 갔다.
‘마물이 자기만 노리면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겠네.’
더욱이 의식이라는 매력적인 환경 속에서 마물로 아크 교수를 죽인다면.
그 누가 베크 교수를 의심하겠는가?
‘머리 잘 썼네. 하지만 아크 교수는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베크 교수와 콘스 교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마도 지금 콘스 교수의 집무실에선.
베크 교수가 콘스 교수에게 한 소리 듣고 있으리라.
‘하… 그보다 앞으로 3일 뒤에 다시 의식이 시작된다니. 대체 이놈의 의식은 언제까지 하려는 거야? 뭐, 설마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한다거나 그러는 건…….’
* * *
다음 날, 아침.
뎅, 뎅-
“기상! 기상!”
어느새 집합해 있는 하인들을 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선정자가 됐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네.’
물론 내가 학생이었다면 많은 관심 속에서 의식을 진행했겠으나.
저들에게 하인은 약간의 변수조차 못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우리가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아서라고만 생각할 테니까.’
엄밀히 따지면 틀린 사실도 아니잖은가?
‘뭐 어때? 살아남은 건 살아남은 거고, 그보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3일이야.’
볼드 학장은 의식이 진행될 때를 제외하고 선정자들 간의 전투를 금지했다.
‘하지만 놈들이 말한다고 그걸 들어 처먹겠어? 분명 이번 휴식기 동안 다른 경쟁자들을 몰래 제거하려고 하겠지. 개중에는 나를 비롯해 살아남은 하인들도 포함되어 있고.’
하나 구태여 하인을 노리려 하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사라질 경쟁자를 누가 수고하면서까지 없애려고 하겠어? 하… 그보단 일단 다음 의식이 뭔지 알아내야 할 텐데.’
점호를 끝내거든 콘스 교수에게 찾아가 봐야 할까?
‘언제든 내 등에 비수를 꽂을 년이라고 해도 지금은 내 편이니까 알려 주겠지.’
내가 거듭 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
“하인장님? 하인장님!”
8번방의 방장이 조심스럽게 날 부른다.
“음? 아… 각 방장들은 인원 확인하고 보고해!”
“1번 방 5명, 이상 없습니다!”
“2번 방 4명, 이상 없습니다!”
.
.
.
각 방의 방장들이 보고를 이어 가던 중.
“9번 방 총원 6명… 현 인원 2명입니다.”
“…뭐?”
나는 9번 방을 비롯하여 몇몇 방의 인원이 비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교수님께 호출이라도 됐어?”
“…그건 아닙니다.”
“그럼 어디 갔는데?”
나의 물음에 방장들은 한참을 머뭇거린다.
“비어 있는 인원들은 어디로 갔냐고.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 대답 안 해?”
“그게…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9번 방의 방장이 힘겹게 답하자.
난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어젯밤에는 이상 없었잖아?”
“예, 맞습니다.”
‘설마 탈출을 시도하진 않았을 거고…….’
몸에 저주가 걸려 있는데 어떻게 탈출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시체는? 확인했어?”
“그렇잖아도 주변을 확인해 봤지만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귀찮게 됐네.’
인원이 맞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해당 방장과 내 책임이 된다.
“이상한 점은 없었고? 아니면 네가 엄청 갈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닙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랑 웃고 떠들었는데… 저도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인원 안 맞는 방의 방장들은 시간 줄 테니까 오늘까지 사라진 인원이 어디로 갔는지 파악해. 시체라도 찾아내라고.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나의 명령에 하인들이 크게 대답한다.
“해산해! 그리고 식당 청소 인원은 바로 나랑 이동한다.”
하인들을 해산한 뒤.
나는 곧바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개판이네.’
나는 아직도 피가 낭자한 식당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제 시체를 정리하는 데만 시간을 전부 써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인원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교수 놈들이 곧바로 하인을 보충해 줄 리도 없을 터.
“조금 있으면 학생들이 올 시간이다. 빨리 움직여!”
“예!”
나와 하인들은 바삐 의식이 남긴 흔적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어느덧 식당이 평소의 모습을 찾아가던 그때.
덜컹-
식당의 문이 열리고 저마다 무리를 지은 학생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얼추 시간은 맞췄나.’
“어후… 뭔 놈의 침대가 그렇게 불편한 건지……. 흑카데미 놈들도 불쌍하네. 그딴 침대에서 어떻게 잠을 자?”
“그렇다고 식사가 맛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다.”
불평을 늘어놓는 혈탑의 학생들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어제 혈탑 놈들 레나 님의 손에 쓸려 나가는 것 봤냐?”
“혈탑의 수준은 잘 봤지. 저런 놈들이 우리랑 같은 마법사라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다니까?”
흑카데미의 학생들도 그들을 꼬나보며 말한다.
“뭐라고?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냐?”
“아, 너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들렸어?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잖아? 지금 혈탑의 선정자는 절반도 안 남았고 이쪽은 반이 넘게 생존했는데?”
“그, 그건, 너희 교수가 활개 치고 다녀서 그런 것 아냐!”
혈탑 학생의 반박에 흑카데미의 학생이 코웃음 친다.
“그러는 너희 교수는 놀고 있었냐? 우리가 대처를 잘한 거지. 그게 흑탑과 혈탑의 차이인 거고.”
“이… 이 새끼가?!”
“뭐? 불만 있으면 덤비든가.”
흑카데미와 혈탑의 학생들이 지팡이를 들고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이려던 그때.
식당 안으로 교수와 학장 일동이 들어선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지랄하고 있네.”
학생들은 조용히 지팡이를 내린다.
‘이게 식당인지 전쟁터인지.’
분명 학장과 교수들이 자리에 착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학장들의 대화 소리만이 오갈 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식사가 끝나 갈 무렵.
“가지고 와라.”
볼드 학장이 나지막이 말하자.
“허허, 그러지요.”
아크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놓는다.
‘저건…….’
난 아크 교수가 갖고 온 것을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저건 성 같은데……. 아닌가? 요새 같기도 하고……. 근데 저걸 왜 꺼내 놓은 거지?’
“이것이 마신 베논 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다음 의식의 단서다. 선정자들은 다음 의식을 대비해라.”
볼드 학장의 말이 끝나자.
“저게 다음 의식의 단서라고?”
“뭐야. 이번에도 그냥 단서만 던져 주고 끝난다고?”
“저게 뭔데?”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한다.
‘저게 다음 의식의 단서라고? 저 모형 요새가?’
대체 저 요새가 의미하는 게 뭘까.
‘요새를 방어하라는 건가? 근데 아카데미 주변에 저런 건 없을 텐데. 아니면 요새에 무언가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안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해야 할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 외에 다른 건 없나요? 그 모형만 갖고 다음 의식을 유추하라는 건가요?”
“그래. 생각은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다. 생각하고 유추해라.”
볼드 학장의 말을 끝으로.
학장들과 교수진 일동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 이걸로 대체 뭘 어떡하라는 건데? 이게 뭔지는 알려 줘야 할 것 아냐!”
“하씨… 머리 쓰는 건 자신 없는데…….”
‘하긴… 단순히 저것만 갖고 뭔가를 유추한다는 게 쉽지가 않지.’
고민에 빠진 학생들의 심정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교수들이 다음 의식에 대해서 알려 주겠지.’
콘스 교수가 내게 첫 번째 의식에 대한 단서를 던져 줬듯.
다른 학생들도 각 교수들에게서 두 번째 의식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터.
‘일단 일을 하면서 생각을 하는 수밖에.’
내가 등을 돌리려던 찰나.
“저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요새인데…….”
내 옆에 있던 하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방금 뭐라고 했어?”
“그게… 저 성문 옆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어금니 같은 두 개의 첨탑 말입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물론 이 하인이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래도 구체적으로 특이 사항을 말한 걸 봐선 이 녀석 기억 속에 있을 확률이 높아.’
나는 상냥한 미소를 보이며 하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잘 생각해 봐.”
“그게… 음…….”
잠시간을 고민하던 녀석이 갑자기 눈을 부릅뜬다.
“하인장님! 기억이 났습니다!”
“작게 말해, 작게.”
행여나 학생들이 들을까 싶어.
난 목소리를 낮춘 채로 말했다.
“그래서, 저게 뭔데?”
“저건 그라트니 요새가 분명합니다!”
“…그라트니 요새?”
들어 본 적이 없는 요새다.
“정말 존재하는 거긴 하지?”
“예! 하지만… 조금 희한한 점이 있습니다.”
“희한한 점?”
나의 물음에 하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아는 그라트니 요새는 분명 레바논 왕국의 것이거든요.”
“…뭐? 잠깐만.”
‘레바논 왕국에 있는 요새라고?’
그렇단 건 이번 의식은 레바논 왕국에서 진행된다는 뜻인 걸까?
‘다른 곳도 아니고, 하물며 레바논 왕국이라니……. 베논이라고 했나? 이 미친 마신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이야?’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득실거릴 게 뻔한 장소를 의식의 장소로 삼다니.
그 마신이라는 놈도 어지간히 미친놈인 게 분명했다.
‘미친놈들의 신이니 미친 게 당연한 건가……. 혹시 녀석이 착각한 건 아닐까?’
난 하인을 보며 입을 뗐다.
“확실해?”
“학생들에 가려져서 다시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하인은 어느새 학생들에 의해 가리어진 테이블을 보곤.
단호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
“그야 하인장님도 아시다시피 전 레바논 왕국 출신이거든요. 거기다가 제 마을에서 3일 정도 마차를 타고 가면 그라트니 요새가 있기도 했고요.”
하인이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이자.
난 녀석을 보며 말했다.
“넌 오늘 일과 다 빼고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몇 시간 뒤.
‘녀석의 말에 거짓은 없어.’
마인드 브레이커를 통해 하인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니.
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레바논 왕국에 가는 것도 미친 일이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
다음 의식의 장소가 그라트니 요새라는 건.
선정자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인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할 수 없어.’
마리오네트 저주에 걸린 이상 하인들은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없다.
‘외출을 했을 때야 임시로 저주를 풀어 줬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저주를 풀어 줄까?’
아니, 아마도 교수들은 관심도 없을 것이다.
‘젠장… 콘스 교수를 만나 봐야겠어.’
난 잠시 고민하다가 콘스 교수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야?”
다행히 회의는 없었는지 그녀는 집무실에 있었다.
“다음 의식에 대해서 여쭤보려고 합니다.”
“…다음 의식?”
하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힘없이 실소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다음 의식은 나도 몰라.”
“…예? 하지만 첫 번째 의식 때는 단서를 주셨잖아요?”
“그건 아크 교수가 정보를 공유했으니까.”
콘스 교수의 대답에 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아크 교수가 정보를 공유했다고? 가만… 그럼 설마 다음 의식은 아크 교수 빼고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아크 교수만 정보를 알 수 있는 거죠?”
“그야 그놈이 의식의 주관을 맡았으니까. 마신께서 주는 단서도 그놈을 통해서 내려오는 거고.”
“허…….”
‘그러니까 아크 교수만이 의식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데 지금 그 정보를 풀지 않고 있다고?’
이 무슨 불합리한 상황이란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니고 아크 교수는 선정자가 됐다.
그런데 그만이 정보를 알고 있다니?
‘뭐, 그건 그렇다 쳐. 근데 왜 흑남 의식을 주관하고 있는 놈이 신성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데?’
레바논에게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짓을 당당히 벌이고 있건만.
왜 아크 교수는 신성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 흑남도 레바논이 원하는 일이라는 건가? 에이, 설마…….’
하지만 내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없었기에.
난 의문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모른 척 물었다.
“너무 불합리한 처사 아닙니까?”
“맞아. 그래서 나도, 다른 아카데미의 학장들과 교수들도 정보를 공유할 걸 요청했지.”
“…하지만 묵살된 겁니까? 그럼 저주라도 걸어야 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신관장쯤 되면 저주도 잘 듣지 않아. 그렇다고 학장님이 놈에게 저주를 걸 것 같아?”
“물론… 아니지요.”
“그래서 다음 의식은 나도 알 수가 없다고 한 거야.”
나는 최대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아카데미의 학생을 죽여도 무방합니까?”
물론 죽여도 무방하겠다만.
지난번, 최상급 성수를 마신 덕분에 저주에서 해주되었음을 몰래 아카데미의 학생에게 마법을 걸어 확인했지만.
콘스 교수는 내가 아직 저주에 걸려 있다고 알고 있을 터.
‘여기서 미리 확답을 받아 둬야 마음이 편하지.’
괜한 의심을 받는 건 사절이다.
“그래. 너도 선정자잖아?”
“그럼 왜 진작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으신 겁니까?”
내가 억울하다는 듯 묻자.
콘스 교수가 차갑게 답한다.
“나도 첫 번째 의식에서 하인이 아카데미의 학생을 공격하는 걸 보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아아…….”
아마도 그녀는 하인에게 걸린 저주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확답도 받았으니 다음부턴 흑카데미의 학생도 주저 없이 상대할 수 있겠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 * *
콘스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어느덧 2일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레바논 왕국의 수호와 번영을 위해!”
“교황님과 성녀님을 위하여!”
‘이곳이…….’
난 웬 골목길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었다.
‘그라트니 요새인가. 검은 대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더니. 확실히 신성력이 엄청나게 짙네.’
허공에 맴도는 신성한 기운이 피부를 자극해 온다.
‘이거… 신성력이 없었다면 꽤나 고통을 받았겠는데?’
다행히 내 몸에는 신성력이 있었기에 난 허공에 맴도는 신성력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흠…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거지?’
마신 놈이 이 빌어먹을 곳을 의식의 장소로 삼은 데는 이유와 목적이 있을 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전부는 아닐 거고……. 씁… 의식만 아니었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도망치는 건데.’
그러나 지금은 흑남 의식이 진행 중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도망쳤다가 의식을 기권한 걸로 간주되기라도 한다면…….’
만약 도주자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이 떨어진다면?
물론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긴 했으나.
“허허, 물론 하인들이 도망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아크 교수의 말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런 말을 했던 거겠지. 쯧…….’
결국 나는 도망가는 것보다 의식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결정했다.
물론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아카데미로 돌아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차피 내가 뭘 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탈출할 방도를 찾아내겠지.’
그게 어떤 물건을 발견하는 것이건, 아니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건 말이다.
‘설령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만약 이대로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신 안전하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
레바논 출신이라고 했던 하인에게 들은 바론.
이 그라트니 요새는 최전선에서 흑마법사들을 상대하고자 만든 곳이라고 했다.
‘그 탓에 숨을 곳이 마땅히 없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야.’
난 당당하게 골목을 나가 그라트니 요새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오오… 성기사들이 엄청나게 많네. 신관들도 꽤 보이고. 저건 레바논의 신상인가? 엄청 크게도 지어 놨네.’
비교적 최근에 외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이외의 공간을 마주한다는 새로운 경험은 내 심장을 들뜨게 했다.
‘혹시 교수들은 고급 제물들을 이 요새 주변에서 수급하는 걸까?’
내가 도시로 상경한 시골 촌뜨기처럼 널따란 요새의 내부를 구경하던 그때.
“이봐! 이 주변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신분증 줘 봐.”
“복장도 허름한 게 흑탑에서 보낸 첩자일지도 몰라. 주변을 계속 살피는 것도 수상하고.”
내 행동이 수상하다고 여긴 것인지 성기사 몇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신분증?’
5년을 흑카데미에서 살아왔으니.
당연히 신분증 같은 건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이 정도 의심은 예상하고 있었어.’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 않게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예? 하하, 저는 레바논 님의 인도를 따라 그의 뜻을 전하는 방랑객일 뿐입니다.”
“…뭐라고? 확실히 그런 떠돌이 신관님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 없는 건 아니지.’
아크 교수의 말에 따르면.
투철한 믿음 아래에 신전이 지어지지 않은 오지까지 가 복음을 전파하는 신관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흠…….”
성기사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그렇습니까?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혹시 증명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조금은 예의를 갖춰 내게 묻는다.
“실례라니요? 최전선에서 흑마법사들을 막기 위해 분투하시는 분들의 부탁인데 그 정도야 못 할 것 없지요.”
화아아아악-
내가 심장에 자리하고 있던 신성력을 모아 손바닥에 응집해 보이자.
“오오오오… 이 경건한 빛……. 확실히 악마들의 하수인은 가질 수 없는 그분의 축복이로군요.”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신관님.”
성기사들은 깊이 감탄하면서 내게 용서를 구한다.
“하하, 사과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의심은 익숙하거든요.”
“그런데 신관님께서 이 위험한 곳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이곳에는 전도할 신도들도 없을 텐데…….”
‘아…….’
성기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난 순간 아차 싶었다.
‘레바논의 복음을 전파하러 왔다고 하기엔 장소가 너무 안 좋아.’
이곳은 레바논 왕국의 최전선 그라트니 요새다.
당연히 이곳 사람들은 거의 레바논을 믿는다고 봐도 될 터.
‘뭔가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아!’
“맞습니다. 전 이곳에 복음을 전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레바논 님께서 제게 내리셨던 신탁을 전하러 왔습니다.”
성기사들의 눈이 동그래지자.
난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오늘 이곳에 많은 흑마법사들이 침입한다고, 그라트니 요새가 위험하다고 경고를 하러 왔습니다.”
“…예?”
‘흑남 의식? 엿이나 먹어라, 이 개 같은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