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런 니미랄…….’
시작부터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를 대면하게 될 줄이야.
“아… 아크 교수……. 이제 우린 다 죽었어… 다 죽었다고…….”
아크 교수의 학살극을 본 하인들이 황급히 도망치려 하자.
“허허, 어째서 축복받은 길을 피하려 하는 겐지.”
지면을 디딘 아크 교수가 삽시간에 날아오듯 달려와.
하인의 옷자락을 잡아채어 그대로 바닥에 꽂는다.
쩌적-
“죽지는 않았을 거네. 자네들이 내 손에 죽어서야 쓰나.”
아크 교수는 파르르 몸을 떠는 하인을 내려다보다가.
“아직 숨이 붙어 있군. 허허, 잘됐어.”
갑자기 반쯤 죽어 있던 학생에게 손을 뻗어 그를 치유하는 것 아닌가?
‘뭘 하려고……. 아, 가만… 이런 미친?’
굳이 자기가 손을 쓰지 않고 죽어 가는 학생을 치유하는 이유.
그 이유는 너무도 뻔했다.
“으음… 으아아아악! 아… 아크 교수…….”
“살고 싶나?”
“…예?”
정신을 차린 학생이 두려움에 몸을 떨자.
아크 교수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도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인데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을 게야. 그렇지? 저기 하인들을 죽이게.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이곳에서 자네를 죽이진 않겠네.”
“저… 정말인가요?”
남학생이 피 묻은 메이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자.
아크 교수는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아… 알았어요. 정말 살려 주시는 거예요?”
남학생은 연신 아크 교수의 눈치를 살피면서.
우리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
난 속으로 혀를 찼다.
‘학생을 회복시킬 때부터 느낌이 싸하다더니… 진짜 저 순교에 미친 사이비 늙은이 새끼 같으니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크 교수를 욕할 시간이 없다.
“거만한 대지를 능욕하고 생명을 부정하는…….”
난 지팡이를 든 채 웅얼거리는 남학생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저 미친놈이 지금 무슨 마법을 쓰는 거야?! 진짜 우리를 다 죽이려고 작정했네?’
지금 놈이 구현하는 흑마법은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를 부패시키는.
고급 부패 마법 ‘재앙의 징조’였다.
‘고급 마법을 사용할 줄 알다니… 역시 4학년이라 이건가?’
하지만 감탄할 시간은 없다.
‘저걸 직격으로 맞았다간 삽시간에 몸이 썩어 들어 가겠지.’
이미 영창이 거의 끝난 이상.
놈의 마법을 저지하는 건 늦었다.
‘물론 난 살아남겠지만. 그래도 놈의 마법을 방어하는 수밖에 없어.’
다른 하인들은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는다면.
당연히 저들에게 의구심을 살 수밖에 없을 터.
‘차라리 조금이라도 의심을 덜 사는 쪽으로 가는 게 맞겠지.’
나는 몰래 지팡이를 잡은 채.
재빨리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죽어어어어어!”
영창을 끝마친 남학생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함을 지르던 그때.
으어어어어어어-
돌연 복도에서 누군가가 괴성을 터뜨리며 기둥만 한 팔뚝을 내지른다.
“크헉?!”
으직-
주먹에 정통으로 맞은 남학생의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혀 곤죽이 되자.
난 고개를 돌려 주먹의 주인을 확인했다.
‘저건… 오우거 아냐? 시팔? 오우거가 왜 아카데미 안을 돌아다니고 있어?!’
아카데미 안에 마물이 돌아다니고 있다니?
대체 이게 무슨 사달이란 말인가?
‘설마 인원을 더 빨리 줄이려고 마물까지 집어넣었던 건가?’
아크 교수에 이어 오우거라니.
“허허, 마물이 있었을 줄이야. 이건 조금 변수로군.”
“으어어어어어어!”
쾅-
“으헛?!”
오우거의 거대한 몽둥이가 아크 교수를 노리고 날아들자.
아크 교수는 낮게 신음하며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으어어어어어어!”
쾅, 쾅, 쾅-
“허허, 오우거에게 원한을 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희한하군.”
‘…뭐야?’
하인이라는 먹음직스러운 잔칫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오우거는 오직 아크 교수만을 죽일 듯이 공격했다.
‘설마 우리는 약해서 신경도 안 쓰는 건가?’
물론 그럴 가능성이 높겠으나 문뜩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이 오우거는 베크 교수가 사육하던 놈일 텐데. 그럼 설마 베크 교수가 아크 교수를 죽이라고 사전에 명령을 해 둔 건 아니겠지?’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콘스 교수와 베크 교수는 아크 신관장을 죽이기 위해 손을 잡았다.
‘아크 교수도 선정자가 됐으니 의식을 진행하는 와중에 몰래 아크 교수를 죽이려고 손을 써 둔 걸 수도 있어.’
여하튼 이건 기회다.
‘저 미치광이 사이비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난 다급히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달려!”
나의 고함에 아크 교수와 오우거의 전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하인들이 그제야 몸을 움찔거린다.
“으아아아아아아!”
“최대한 멀리 도망쳐!”
나와 하인들이 다급히 복도를 내달리던 그때.
뒤쪽에서 아크 교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온다.
“꼭 순교들 하게! 영적 구원을 받게!”
‘저놈은 저 상황에서도 개소리를 하네.’
난 아크 교수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복도를 질주했다.
“후우…….”
“허억, 허억…….”
이윽고 아크 교수의 손아귀에서 멀찍이 떨어지자.
“저희… 살아 있는 겁니까?”
“그래. 살아 있어. 살아 있다고…….”
몇몇 하인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아크 교수가 있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오우거라니요. 무슨 의식이 이렇대?”
“낸들 알겠냐? 미친 흑마법사들의 속내를 나라고 어떻게 알까.”
겨우 말할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하인들은 조금 전의 상황을 두고 대화를 이어 간다.
“학생들 맞닥뜨리는 것도 무서운데 마물 걱정까지 해야 한다니……. 왜 하필 내가 선정자가 돼서…….”
“후… 그러니까.”
‘어쩌겠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살아남고 봐야지.’
분위기가 가라앉자.
난 그들을 보며 덤덤히 입을 뗐다.
“떠들 시간 없다. 언제 다른 학생들을 맞닥뜨릴지 몰라. 빨리 이동해야 돼.”
“그건 그렇지만, 하인장님… 저희가 도망칠 곳이 있을까요?”
“아카데미 곳곳에 학생들이 있을 텐데……. 거기다가 오우거가 있으니 다른 마물들도 있을 수 있고요.”
하인들의 걱정은 당연했기에.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안 걸릴 곳에 들어가 숨어 있어야지. 의식이 끝날 때까지 말이야.”
“하지만 아카데미 안에 그런 곳이 있습니까?”
하인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아카데미 위로 올라가는 건 멍청한 짓이야. 학생들이 도처에 숨어 있을 게 뻔해.’
기숙사와 교실이 있는 위층에서는 분명 학생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거나.
매복하여 다른 선정자를 노리고 있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밑으로 내려가자. 그래. 지하 감옥으로 가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요 며칠간, 혈탑과 시련의 탑 학생들은 흑카데미를 둘러보며 지형을 익혔었다.
‘하지만 지하 감옥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어.’
그렇다면 적어도 혈탑과 시련의 탑 학생들이 밑으로 내려갈 일은 없을 터.
‘흑카데미 학생들도 구태여 감옥까지 내려가진 않을 거야. 이미 지형의 이점을 갖고 있는 놈들이 뭐 하러 밑으로 내려가겠어?’
당연히 자신들에게 익숙한 공간에서 싸우고 싶어 할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지하 감옥으로 간다. 그곳까지 찾아갈 학생은 거의 없겠지.”
‘다른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그곳의 존재는 모를 거고. 그나마 갈 사람이라곤 아크 교수 정도인데 설마 그 미치광이가 거길 가겠어?’
* * *
우리가 지하 감옥에 틀어박히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여기까지 내려오진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슬슬 식량이 떨어지고 있단 말이지.’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며 몰래 식당에 들러 음식을 털어 온 덕에.
며칠 동안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빨리 못 죽이는 거야? 반만 죽이면 되는 거잖아?’
이제는 버티는 것도 점점 한계가 올 터.
‘다시 식당으로 올라가 봐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난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식량이 부족한 건 똑같을 거야. 좋으나 싫으나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결국 시간 싸움이다.
위에서 서로 숫자를 줄여 줄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버티기만 하면 될 뿐.
‘다만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
[생존자가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 의식은 종료된다.]
아카데미 안에 볼드 학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오오… 드디어 끝난 건가?’
“하, 하인장님! 저희 몸이…….”
“이건…….”
그러나 갑자기 하인들이 하나씩 사라지자.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다 끝난 게 아니었어?’
사사삭-
그리고 곧 나도 무형의 힘이 내 몸을 덮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내 귀를 먹먹하게 울려오자.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긴… 경기장이잖아?’
경기장의 자리에는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학생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전원 이곳으로 이동된 건가.’
옆에 있는 하인들과 살아남은 학생들을 봐선.
아무래도 생존자들은 전원 이곳으로 전송이 된 모양이었다.
‘근데 왜 여기로 전송이 된 거지? 설마 살아남은 놈들끼리 서로 또 싸우라는 건 아니겠지?’
비단 나만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이 아닌지.
로브에 말라붙은 피를 뭍인 학생들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지팡이를 겨눈다.
“살아남은 선정자들이여, 마신 베논의 이름으로 너희를 축복한다. 걱정 마라. 다음 의식은 3일 뒤에 진행될 예정이다.”
“3일 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하세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각 아카데미의 학장들이 선정자들을 독려하는 사이.
“레나! 레나! 레나!”
경기장 안으로 흑카데미의 학생들이 내는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왜 저렇게 환호하는 거지? 엄청나게 활약했나? 가만, 그렇단 건…….’
팔을 든 채 미소를 보이는 레나를 보며 내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화아아아악-
경기장 위로 웬 영상이 선명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영상에선 선정자들이 서로를 죽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왔는데.
난 영상을 쏘아 내는 마물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했더니… 콘스 교수가 말한 비홀더를 놔둔 거였구나.’
비홀더.
마물이자 흑마법사들이 감시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종의 날아다니는 감시 카메라다.
‘아크 교수를 맞닥뜨렸을 때 비홀더는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런데… 엄청나네……. 몇 명이나 죽인 거야?’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레나의 활약상.
발록을 필두로 한 악마 군단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휩쓰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환장할 만하네.’
내가 봐도 그녀의 무력은 반할 만한 것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흑카데미의 홈그라운드.
그녀가 이만한 응원을 받는 것도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3일간 충분히 휴식해라. 이제 의식은 시작됐을 뿐이다.”
선정자들이 하나씩 경기장을 뜨자.
그에 맞추어 학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짖는다.
이윽고 나와 하인이 경기장을 나가려 하자.
“야야, 근데 저 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그러게? 영상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데? 어디 계속 숨어 있던 것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아남았겠어?”
“푸하하하하하하하! 하긴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겠지.”
“야! 그런데 시련의 탑 새끼들도 던전에 처박혀 있었잖아. 하인이나 그놈들이나 다를 게 뭐야?”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폭소하며 조롱을 퍼부었다.
‘시련의 탑? 던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놈들이 있었나?’
하지만 난 그들의 조롱보단.
시련의 탑 아카데미 학생들의 활약 여부에 관심이 갔다.
‘어떻게 던전에 숨어 있었던 건진 잘 모르겠지만 현명하네.’
도망치는 게 뭐 어떤가?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3일 뒤에 두 번째 의식이 있다고? 하아… 이번에는 또 무슨 개 같은 의식을 치를지…….’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
“허허, 잘 살아 있었군.”
어느새 다가온 아크 교수가 슬며시 말을 걸어온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허허, 자네는 운만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대단하군.”
아크 교수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간다.
“허허, 정말 단순히 운만 좋았던 건 아닐 터인데. 정말 운이 좋았던 건가? 아니면 베크 교수와 친분이라도 있었던 겐가?”
‘이 늙다리가… 설마 오우거가 자기만 공격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게 이런 질문을 하진 않았을 터.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베크 교수와 친분이 있어서라기보단, 콘스 교수와 베크 교수가 손을 잡아서 그런 거겠지만.’
하나 내가 그런 사실을 친절하게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기에.
난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런 기적이 어떻게 제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지하 감옥에 숨어 있었는데 아무도 오질 않더군요.”
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흐음…….”
하지만 아크 교수는 쉽사리 의심을 풀지 않았고.
나와 하인들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오늘 밤, 내 집무실에 들르겠나?”
“저 혼자 말입니까?”
“허허, 자네를 비롯해 선정자가 된 하인 전원이 다 왔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