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교수가 선정자가 된 것도 어이가 없는 판국에 하필 그 교수가 신관장이라니…….’
차라리 다른 흑마법 교수가 선정자가 됐다면.
조금은 납득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아크 교수 말고도 혈탑이랑 시련의 탑 아카데미 쪽 교수들 중에서도 선정자가 나온 것 같긴 한데…….’
흑카데미의 교수진 중에서 선정자가 된 교수는 아크 교수가 유일했다.
‘저 미친 신관장이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이거 의식이 잘못된 것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식에 문제가 생겼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아크 교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교수가 선정자라니요!”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크 신관장… 혹시 의식을 방해하실 계획이었던 겁니까?!”
그러한 상황 탓인지 학생들이 보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흑카데미의 교수들은 앞다투어 아크 교수를 질타했다.
“허허… 일단 진정들 하시지요. 그래야 저도 여러분께 이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크 교수가 볼드 학장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자.
“이야기해 보게.”
볼드 학장의 한마디에 주변이 숙연해진다.
“허허… 그게… 학장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의식이라는 게 준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주관하는 건 결국 신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혈탑의 학장 드레인의 질문에 아크 교수는 애써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아무래도 마신 베논의 뜻이 아닐는지…….”
아크 교수가 거대한 대검과 벼락을 든 남자의 석상을 보며 말꼬리를 흘리자.
교수들은 어처구니없이 그를 바라본다.
“의식을 준비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시작부터 매듭을 잘못 지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겠죠. 애당초 신관장이 흑남의 의식을 주관한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은데요.”
특히 콘스 교수가 이때다 싶었는지.
집중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그건…….”
“콘스 교수, 그쯤 하게. 그보다 아크 교수, 선정자가 됐다고 반드시 의식에 참여할 필요는 없잖은가?”
볼드 학장의 물음에 아크 교수가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선정자들은 모두… 의식에 참여해야만 하지요. 예외는 없습니다.”
“거부한다면?”
“증표는 곧 신의 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신의 뜻을 거부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아크 교수의 말이 끝나자.
‘그러면 우리 하인들도 예외 없이 의식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소리잖아? 이런 니미랄…….’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같은 학생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교수들까지 상대하라는 거잖아?! 이게 말이 돼?”
“그냥 우리보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되냐고!”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다래지고.
“조용!”
볼드 학장의 일갈에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약간의 변수가 발생하긴 했지만 이 또한 베논 님의 뜻이다.”
“학장님… 그럼 계속 의식을 진행하시겠다는 말씀인 건가요?!”
당황한 콘스 교수의 물음에 볼드 학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의식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선정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의식에 참여한다.”
볼드 학장의 지엄한 한마디에 한 학생이 버럭 소리친다.
“볼드 학장님! 이건 너무 불합리합니다! 그럼 교수들만 유리한 것 아닌가요?! 교수들은 의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부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이건 교수들한테 너무 유리한 싸움이야.’
상식적으로 그렇잖은가?
교수들은 사전에 의식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들어 뒀을 터.
‘거기다가 아크 교수는 의식의 주관자고. 그럼 의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전 다 꿰고 있을 것 아냐?!’
정보적인 측면에서나 가진 힘에서나 모든 것이 교수들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왜 유리하다고 생각하지?”
“그야… 아크 교수는 저희보다 강하잖아요!”
“맞네. 하지만 그게 대수인가?”
“…예?”
질문을 던진 학생이 순간 멍청한 표정을 짓자.
볼드 학장은 무심히 말을 이어 간다.
“힘이 부족하다면 다른 학생과 손을 잡으면 되지 않나?”
“그건…….”
“상대가 자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머리를 쓰게.”
그 말을 끝으로 볼드 학장은 학생들을 보며 말한다.
“흑남으로 선정된 학생과 그 호위에게는 그에 걸맞은 부상이 주어진다. 흑남으로 선정된 학생의 가문은 흑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될 것이며, 흑황과 버금가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
‘뭐? 흑황이라는 게 진짜로 있었어?’
흑황이라 함은.
레바논교의 교황을 본따 만든 자리라고 들었다.
‘이놈들이 진짜 레바논교를 본격적으로 따라 하려나 보네.’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사이.
“오오오! 흑황님과 버금가는 권위라니…….”
“만약 우리 시련의 탑에서 흑남이 나온다면 흑탑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겠어!”
“흑탑의 소속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베논교에 우리 혈탑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거니 나쁘진 않네요.”
보상이 생각 이상이었던 걸까.
연신 불만을 터뜨리던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흑황 이상의 권리를 얻을 수 있다면, 그래! 까짓것 교수들도 상대해 보자고!”
“일단 우리가 먼저 힘을 합쳐서 선정자가 된 교수들을 죽이면 되는 것 아닐까?”
“그래.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일단 교수들부터 죽이면 되는 거잖아?”
‘뭐… 그게 정석이긴 한데… 학생들이 떼거지로 달려든다고 교수를 이길 수 있을까?’
“학장님, 질문이 있어요.”
그러던 중 갑자기 흑탑의 선정자가 된 레나가 손을 들자.
“뭐지?”
볼드 학장은 비교적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흑남을 선정하는 의식인데 만약 제가 의식에서 선택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흑녀라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레나의 물음에 볼드 학장이 고개를 젓는다.
“흑남은 말 그대로 호칭에 불과하다. 성별에 관계없이 최종적으로 의식을 끝마치는 학생은 흑남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게 될 거다.”
“흠…….”
레나가 낮게 침음하던 사이.
볼드 학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번쩍 손을 쳐든다.
“이 혼란스러움 또한 마신 베논 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시련일 뿐이다. 극복하고 정복해라. 그것이 선정자가 된 너희의 사명이다. 열둘의 대악마와 마신 베논의 이름으로 선정자가 된 너희를 축복한다.”
볼드 학장의 축사를 끝으로 선정자를 정하는 의식이 마무리되고.
학생들이 연회장을 나가던 그때.
“학생들이 교수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콘스 교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볼드 학장에게 묻는다.
“못 할 건 또 뭔가? 교수도 결국 사람일 뿐이야.”
“신관장에게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아시지 않나요?”
“해결책은 학생들이 생각할 일이야.”
다소 무책임하게까지 보이는 볼드 학장의 대답에 콘스 교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를 보인다.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만약 아크 교수가 흑남이 되면요?”
“레바논의 노예가 베논 님의 종이 되는 일이니 축복받을 일이지. 이야기는 이쯤하지.”
“허…….”
멀어지는 볼드 학장을 보며 콘스 교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크… 딱 보니까 단단히 빡쳤네. 괜히 눈 마주쳤다간 피 보겠어.’
그리고 멀찍이서 청소하는 척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난.
얼른 바닥에 고개를 돌렸다.
“랄프.”
그러나 콘스 교수의 부름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당장 내 집무실로 따라와.”
‘괜히 사족을 붙였다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러죠.”
난 일을 다른 하인에게 인계하곤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덜컥-
내가 조용히 방문을 닫자.
“으아아아아아아! 젠장! 젠장!”
갑자기 콘스 교수가 미친년처럼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엎어 버린다.
‘뭐… 뭐야, 왜 저래?’
내가 있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한참 히스테리를 부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진정했는지 날 바라본다.
“완전히 당했어. 당했다고!”
“당했다고 하심은…….”
“아크가 노리고 있던 게 이거였다고! 그 너구리 같은 늙은이가 설마 흑남을 노리고 있었나? 성수를 퍼부었는데도 의식을 완성시킬 줄이야…….”
콘스 교수가 까득 입술을 깨물자.
‘아크 교수가 흑남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난 그녀의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순교에 미친 늙다리가 흑남 자리를 왜 노려?’
레바논을 믿게 한 뒤에는 강제로 사람을 순교시키는 데 혈안이 된 늙은이가.
이제 와서 갑자기 흑남을 노릴 이유가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하지만 난 내 생각을 숨긴 채, 그녀에게 물었다.
“아크 교수가 흑남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요?”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가 선정자가 될 수 있었겠어!”
“그야 그건… 마신님의 뜻 아니었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녀가 픽 웃음을 흘린다.
“그건 모르지. 그 늙은이가 의식을 주관하면서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지.’
내가 속으로 수긍하던 사이.
그녀가 사납게 말한다.
“흑남의 지위를 차지해서 나중에는 흑황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게 분명해. 그래, 신관장이 아카데미의 교수로 왜 왔나 했더니 이제야 말이 되네.”
‘너무 나가는 것 아냐?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크 교수가 선정자가 됐을 당시.
그가 눈에 띄게 당혹해했던 걸 기억한다.
“어떻게든 이번 의식을 망쳐야겠어.”
“하지만 의식에는 선정자만 참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널 부른 거야.”
그녀는 날 바라보며 계속 말한다.
“너도 선정자잖아?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겠네.”
“설마… 아크 교수를 죽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아직 제겐 그럴 힘이 없습니다.”
나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콘스 교수는 실소를 흘린다.
“누가 죽이래? 아크 교수가 흑남이 되지 못하게 방해만 해. 죽이면 더 좋고.”
‘아니, 아크 교수를 혐오하는 건 알겠는데 그 양반은 흑남이 될 생각이 1도 없다니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적당히 그녀의 말에 답했다.
“하지만 전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릅니다.”
“그건 알려 줄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오오오! 그건 좋네.’
일단 의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내 나름대로 계획을 구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첫 번째 의식은 3일 뒤에 진행될 거야. 일단 거기서 살아남아.”
“…예?”
‘살아남으라니?’
나의 반문에 다시 콘스 교수가 말한다.
“첫 번째 의식은 생존자 절반이 남을 때까지 진행될 거니까.”
“…예?”
살아남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내 마법은 이미 학생들을 상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학생들 앞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만약 제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죽겠지. 거기다가 의식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비홀더들이 의식의 진행 과정을 밖에다가 전송할 거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이런 개 같은 년이… 비홀더까지 돌아다닌다고?’
비홀더라 함은.
커다란 눈알이 달린 비행 마물로서 주로 탐색에 쓰이는 녀석이건만.
이번에는 의식의 진행 과정을 송출하는 일종의 돌아다니는 카메라 같은 역할을 맡았나 보다.
‘그러잖아도 보는 눈이 많을 텐데 거기다가 비홀더까지 있다면…….’
그렇잖아도 마법을 쓰다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는 꼴 아닌가?
“후우… 알겠습니다.”
“좋게 생각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흑남이 될 수도 있잖아?”
정작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고.
난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그녀의 집무실을 나갔다.
‘후… 그래. 어차피 선정자가 된 이상 의식을 피할 수는 없었어.’
오히려 콘스 교수가 단단히 착각한 덕에 의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니.
조금은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 아닐까?
‘다행은 니미랄… 학생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아크 교수를 어떻게 상대해?’
고민만 깊어지는 밤이었다.
* * *
3일 뒤.
시답잖은 축제가 끝나고.
“하, 하인장님… 이게 정말 맞는 걸까요?”
“나라고 알겠냐.”
난 벌벌 떠는 하인들과 함께 아카데미에 들어와 있었다.
‘첫 번째 의식은 아카데미 안에서 시작된다고 했었지.’
이미 대다수의 학생이 빠져나간 아카데미 안에서.
선정자의 절반이 죽을 때까지 버텨야만 하는 게 첫 번째 의식이라고 했었다.
‘절반이 죽어 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긴 한데… 당연히 우리를 놔둘 리가 없겠지.’
당연히 하인은 가장 만만한 상대이자 숫자를 줄이기 위한 최상의 먹잇감.
그런 우리가 먼저 타깃이 될 거라는 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 어디에 숨어 있는 게 어떨까요? 학생들이랑 싸울 수는 없잖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다 죽을 때까지 숨어 있다가 의식이 끝나면 그때 나오는 게 최상책이긴 하지. 근데 숨을 곳이…….”
내가 하인들과 바삐 생존할 길을 도모하고 있던 그때.
으직-
“으아아아아악!”
1층 복도 한쪽에서 굉음과 함께 핏덩이가 날아와.
내 발치를 나뒹굴었다.
‘이건… 학생인 것 같은데…….’
내가 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
으적-
두개골이 함몰된 혈탑 학생의 시체가 또 내 앞으로 날아왔고.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체가 날아온 방면을 살폈다.
“허허, 안타깝구나…….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순교를 시켜 줬을 텐데……. 영혼이 지옥에 떨어질 걸 알면서도 구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그곳에는 메이스를 든 채 씁쓸히 미소를 짓는 아크 신관장과.
“닥쳐! 이 미치광이 늙은이 새끼야! 그냥 죽어! 죽으라고!”
“으아아아아아!”
그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혈탑의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허, 오늘은 참으로 슬픈 밤이 되겠구나.”
으적, 콰작-
신관장의 메이스가 하늘을 가를 때마다.
혈탑 학생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선정자가 되지 않았다면 살았을 것을……. 아니, 내가 선정자가 된 게 문제인 건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어, 어떻게 좀 해 봐! 왜 우리 마법이 안 먹히는 건데?!”
“젠장… 난 모르겠다!”
“야! 어디 가! 아직…….”
퍼어억-
“안타깝구나. 순교했어야 할 영혼들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
이윽고 아크 교수의 주변이 잠잠해지자.
아크 교수는 메이스의 피를 닦으며 낮게 침음했다.
“음…….”
‘이런…….’
그러던 그때 난 아크 교수와 눈이 마주쳤음을 느꼈고.
“허허, 그렇지만도 않군. 아직 순교할 수 있는 자들이 있었군. 허허허… 오늘은 참으로 은혜로운 밤이 되겠어.”
그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