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22화 (22/200)
  • 22.

    “크헉!”

    내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난 상대의 몸에 정확히 주먹이 꽂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콰작-

    벽면에서 작은 파열음이 울리자.

    난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촛불에 불을 붙였다.

    “으으…….”

    “그걸 맞고도 살아 있어?”

    분명 내 온 힘을 실어 후려쳤건만.

    아무래도 꽤 몸이 단단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만약 죽었다면 누가 시켰는지도 몰랐을 것 아냐?’

    “누가 시켰어?”

    내가 놈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쿨럭… 네놈은… 뭐냐? 분명 하인장이라고 들었… 쿨럭, 쿨럭…….”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하긴, 평범한 하인 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당황할 만도 하지.’

    난 빙긋 웃으며 놈의 머리를 잡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됐다. 직접 들으면 되니까.”

    “으으…….”

    스스슥-

    갑자기 놈의 몸이 안개처럼 변해 가자.

    “어딜 도망가려고. 마인드 브레이커.”

    난 재빨리 저주를 발동했다.

    “으으… 이럴 수… 안…….”

    곧 놈의 몸이 축 늘어지자.

    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만 엿들어서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히 확인을 해 볼까.’

    확실히 놈의 몸에 저주가 걸렸으니.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누가 너한테 명령한 거지?”

    “으으… 드… 드레인… 학장님이…….”

    “목적은?”

    나의 물음에 곧 남자의 입이 달싹거린다.

    “흑탑 부탑주의 딸 레나를… 피의 하수인으로… 만들라는 명령… 을 받았… 습니다.”

    ‘레나?’

    레나라면 흑카데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망주 아니던가?

    ‘그런데 왜 그년을 노리는 거지?’

    “레나를 노린 이유는?”

    “그건 저도 잘… 모르겠… 습니다…….”

    ‘흠… 그저 학장에게 명령만 받은 건가?’

    “그년을 노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면서 나한테 온 이유는?”

    “그건…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가 않아… 일단… 아카데미의 관계자들을…….”

    “흠…….”

    ‘그러니까 레나를 노리기엔 쫄리니까 만만한 나와 하인들부터 깨물려고 했다? 이 새끼들… 진짜 마법사가 아니라 뱀파이언가?’

    그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어 내가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으으… 으으으…….”

    남자의 목이 축 늘어진다.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설마 죽은 건 아니지?’

    난 급히 놈의 상태를 살폈다.

    ‘하 씨… 진짜 죽었네.’

    놈이 죽은 건 상관없다.

    ‘레나를 노렸다고 했으니 나보단 레나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을 할 테니까.’

    하지만 놈의 입에서 좀 더 정보를 캐내지 못한 건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솔직히 그년이 혈탑에 노려지는 거야 내 알 바는 아니고, 이참에 혈탑의 관계도와 마법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난 시체를 바라보다가 놈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쓸 만한 게 없으려나.’

    놈의 몸에서 나온 건 약간의 금화와 장신구.

    그리고 작은 주머니가 전부였다.

    ‘이 새끼… 완전 빈털터리였네. 주머니도 작으니 별것 없겠지.’

    당연히 주인이 거지이니 주머니도 텅 비었을 거라 생각하고.

    난 주머니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뭐야, 이건…….’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생각보다 주머니 안이 넓다.

    ‘설마… 아공간 마법이 걸린 주머니?! 오오오! 진짜네?’

    비록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고 해 봐야 혈탑의 마법서 몇 권에 불과했으나.

    이 ‘아공간 주머니’는 내게 있어 그야말로 보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게 있으면 아카데미의 물건을 몰래 훔쳐다가 넣어도 된다는 것 아냐?! 물론 주머니의 용량이 그리 넓지는 않으니 최대한 필요한 것만 넣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저건 확실히 처리를 해야겠지.’

    난 흡족한 미소를 거두곤 시체를 내려다봤다.

    행여나 걸릴 가능성이 있으니 옷가지는 부패시켜야 한다.

    나는 곧장 지팡이를 들어 시체에 부패의 저주를 시전했다.

    사사삭-

    ‘확실히 콘스 교수에게 배워서 그런지 효과는 확실하네.’

    옷가지와 시체가 급속도로 부패하여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난 비로소 지팡이를 거두어들였다.

    ‘깔끔하네.’

    * * *

    혈탑의 관계자가 내 방에서 죽은 지 3일이 흘렀다.

    ‘레나를 노린 것치곤 생각보다 조용하네.’

    혈탑의 하수인이 내 방에 침입한 이후 무언가 사건이 벌어질 법도 했으나.

    “혈탑이라고 해 봐야 결국 흑탑의 밑이지. 지금 검은 대지를 지배하고 있는 게 누군데? 흑탑이잖아? 그것만 봐도 확실한 것 아냐?”

    아카데미 안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할 뿐이었다.

    “결국 혈탑은 흑탑의 밑에 있고 너희의 마법도 우리 밑이라는 거지. 시련의 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럼 뭐 해? 그것도 네가 흑탑에 들어가야 의미가 있는 거지. 설마 네 실력으로 흑탑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뭐, 이 새끼야?! 연무장으로 따라와, 이 새끼야!”

    ‘또, 또 지랄이네!’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흑탑과 혈탑 산하의 학생들을 보며.

    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련의 탑 학생들은 얌전하던데 어떻게 저놈들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시비가 붙을까.’

    저 망할 학생들 사이에서 쌈박질이 벌어질 때마다.

    놈들이 박살 낸 기물들의 처리와 청소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빨리 의식이 시작됐으면 좋겠네.’

    그래야 저놈의 싸움도 멈출 것이고.

    나도 탈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어휴…….’

    “읏차!”

    나는 고개를 젓곤 열심히 석상을 미는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더 힘줘서 밀어! 더! 오늘 내로 전부 연회장 안에 들여놔야 돼!”

    아직 저것 말고도 기다리고 있는 악마의 석상의 숫자가 10개가 넘는다.

    ‘의식을 치르는 데 무슨 놈의 석상이 필요하다는 건지. 그나저나 흉측하게도 생겼네.’

    난 어딘가 뒤틀리고 기형적으로 생긴 악마들의 석상을 보다가.

    “조금만 더 힘내라! 이것만 끝내면 오전 작업도 끝이야!”

    하인들의 뒤에 붙어 함께 석상을 밀었다.

    “후우… 겨우 끝냈네.”

    “하루 종일 걸릴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떻게 잘 끝냈다.”

    “조금만 숨 돌렸다가 밥 먹으러 가자.”

    나와 하인들이 석상을 일렬로 진열하고.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던 그때.

    “비켜라! 비켜! 거기 너희! 당장 거기서 나와라! 당장!”

    갑자기 아크 교수의 다급한 고함이 울려온다.

    덜컹-

    ‘뭔데? 아…….’

    다급히 달려오는 아크 교수의 뒤로.

    “으으으… 뒈지겠다…….”

    “시팔…….”

    하인 여럿이 거대한 조형물을 들고 힘겹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악마의 석상이랑은 조금 달라 보이는데.’

    손에 거대한 대검과 벼락을 들고 포효하는 남자의 모습은.

    악마라기보단 인간에 가까워 보였다.

    “아, 아크 교수님… 이건 어디다 내려놓을까요…….”

    “저기 악마들의 석상 사이에 있는 빈자리에 두게.”

    ‘그래서 가운데를 비워 놓으라고 한 건가?’

    쿵-

    마침내 하인들이 거대한 조형물을 내려놓자.

    “허허, 이제 얼추 구색을 갖췄군. 남은 건 선정자를 뽑는 일뿐인가…….”

    아크 교수는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석상들을 훑어본다.

    ‘선정자? 흑남의 의식에 참여하는 학생을 말하는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호기심이 든 난 슬며시 아크 교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석상들은 단순히 연회장을 꾸미는 용도가 아니었습니까?”

    “허허허, 그럴 리가 있나? 선정자를 뽑는 용도로 놔둔 게지.”

    “선정자 말입니까? 그럼 그 선정자가 흑남이 되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아크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허허, 그렇지. 다만 어느 선정자가 흑남이 될지는 오롯이 신의 뜻에 달린 게지.”

    “아아…….”

    ‘그러니까 선정자는 여럿이 선출될 수 있고, 개중 가장 강한 한 명이 흑남이 된다는 건가?’

    내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던 사이.

    아크 교수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허허, 선정의 날이 기대되는군.”

    * * *

    일주일 뒤, 연회장 안.

    “드디어 오늘인가?”

    “듣자 하니 아카데미에서 가장 강한 학생이 선정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몇 명이나 뽑는대?”

    “나야 모르지.”

    세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모인 터라.

    연회장 안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선정자가 되면 어떡하지? 만약 선정자가 되면 흑탑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거고, 흑탑의 거물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냐?”

    “그렇겠지. 근데 네가 되겠냐?”

    “뭐?!”

    ‘이렇게 정신이 없던 적이 얼마 만인지…….’

    난 그런 그들의 앞에 차와 다과를 내놓으며 바삐 움직였다.

    ‘선정자를 선택하는 의식이 끝나도 쉬지를 못한다는 게 좀 서글프네.’

    선정자가 선택되고 나면.

    의식을 시작하기 전까진 아카데미에서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축제를 즐기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으니.’

    어차피 ‘흑남 의식’은 저들만의 축제다.

    나 같은 하인은 그저 청소하며 곁눈질로 저들의 행동을 구경하는 데에 만족해야 할 터.

    ‘하인만을 위한 축제 같은 건 없나?’

    내가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

    연회장 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볼드 학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친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선정자 의식을 시작해라.”

    “허허, 그러지요.”

    아크 교수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까딱거리자.

    화아아아아아악-

    갑자기 멀쩡했던 창문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뭐… 뭐야?’

    난 밖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붉은빛을 보곤.

    슬며시 창밖을 바라봤다.

    ‘저긴… 미로가 있는 곳이잖아? 그보다 저건…….’

    분명 내가 몰래 기운을 훔치고자 몰래 잠입했던 미로는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그 모습은 꼭 교수들이 사용하던 마법진과 생김새가 비슷해 보였다.

    ‘설마 단순한 미로가 아니라 정말 마법진 같은 거였나?’

    내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쿠르르르르릉-

    붉게 빛나던 미로 위로 핏빛의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고.

    ‘미… 미친?!’

    그 소용돌이는 어째선지 내가 있는 연회장 방향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도망을…….’

    머릿속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콰창-

    핏빛의 소용돌이는 연회장으로 들이닥치더니.

    어째선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뭐지? 분명 소용돌이에 다 휩쓸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너무도 혼란하여 도무지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는다.

    “저… 저것 봐! 가운데서 빛이 나고 있어!”

    그러던 그때, 빛이 사라진 연회장 안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저건… 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데?”

    “저 벼락은 장식 아니었어?”

    ‘저건…….’

    어둠 가운데서 벼락과 대검을 쥔 남자의 석상에서 불길한 잿빛이 피어오르는 걸 시작으로.

    화르르르륵-

    악마들의 석상에 하나씩 잿빛의 불길이 피어오르자.

    우와아아아-

    학생들은 거듭 감탄사를 연발한다.

    “방금 휘몰아친 소용돌이도 그렇고 뭔가 엄청난데? 이번에 교수들이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아. 안 그래?”

    “멋있긴 한데… 이게 선정자를 고르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야?”

    “뭐긴? 흑카데미가 이 정도라는 걸 보여 주려는 구경거리 같은 거겠지.”

    옆에 있던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자.

    난 잿빛으로 타오르는 석상들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단순한 쇼일까? 그런 것치곤 저 잿빛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그러던 그때.

    웅웅웅웅웅웅-

    돌연 발밑의 커다란 원형의 마법진이 빛을 발한다.

    ‘이 마법진은 미로랑 생김새가 비슷한 것 같은데 이게 왜 여기에…….’

    내가 조금 놀라 마법진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이.

    화아아아악-

    “우와아아아악! 이건 뭐야?!”

    한 학생의 몸에서 붉은 빛기둥이 올라온다.

    “서… 설마 이게 선정자가 됐다는 증표? 맙소사… 그럼 내가 선정자가 됐다고?!”

    “젠장… 왜 하급 파괴 마법도 구사하지 못하는 놈이 선정자가 된 거야?”

    어둠 사이로 질시와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울리던 그때.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이건… 나도 선정자가 된 건가?”

    “왜 나한테도 이게…….”

    “그래! 이거지!”

    수많은 학생들의 몸 위로 빛기둥이 올라온다.

    ‘뭐야. 설마 저게 다 선정자라고?’

    난 곳곳에서 올라오는 붉은 빛기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딱 봐도 족히 100명은 넘는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나?’

    해 봐야 각 아카데미별로 한 명이나 두 명 정도나 나올 줄 알았건만.

    저 숫자는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저렇게 인원이 많아서야 의식이 제대로 진행될…….’

    웅웅웅웅웅-

    ‘…미친?’

    어째선지 내 발밑에서도 붉은 빛기둥이 올라오자.

    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어째서 나한테도…….’

    “야! 저것 봐! 저 하인도 선정자가 된 것 같은데?!”

    “저기! 저놈 발밑에도 있어!”

    “하인도 선정자가 될 수 있는 거였어?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뿐만이 아닌 여러 하인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기에.

    나에게 쏠린 관심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하, 하인장님,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저, 저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정자가 되어 당혹해한 하인 몇이 얼른 내게 다가와 물었으나.

    나라고 알 도리가 없었기에 난 그들을 진정시켰다.

    “뭐, 우리가 선정자가 됐다고 해도 하인이니까 의식에서 제외시키겠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그, 그렇겠죠? 하하…….”

    한 하인이 애써 미소를 보이던 그때.

    “교수들도 생각이 있을… 무슨… 하… 하인장님… 저것 좀… 저것 좀 보십쇼!”

    교수진을 바라보던 하인이 황급히 교수들이 있는 자리를 가리켜 보인다.

    웅웅웅웅웅-

    “허허… 이럴 수가… 이게 어떻게…….”

    그곳에는 붉은 빛기둥에 휘감긴 채.

    당혹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아크 신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친… 신관장이 흑남 의식의 선정자가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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