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틀이라는 외출 기간은 삽시간에 지나갔다.
“하인장님! 돌아오셨습니까?!”
“밖은 어떻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이게 실환가?’
난 정신없이 질문하는 하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슨 이틀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
왜 달콤한 시간은 항상 짧게만 느껴지는 걸까.
‘하아… 그래. 지금은 이게 현실이지. 하지만 이번 외출에서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이번 외출로 마법진 너머에는 뭐가 존재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 보석을 좀 지출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베크 교수가 계속 옆에 붙어 있던 탓에.
그를 떨어뜨리고자 바깥의 어둠 상인에게서 탁월한 효과를 가진 수면약을 구매한 탓이었다.
‘그 탓에 오밤중이 되고서야 겨우 자유로워졌었지.’
베크 교수가 없었다면 좀 더 자유로운 외출이 됐겠으나.
빌어먹을 상황 속에서도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돌아왔다.
“조용, 조용!”
나의 일갈에 하인들이 침묵한다.
“바깥에 뭐가 있었냐고? 일단 바깥에 나가면 가장 먼저 데스나이트를 맞닥뜨릴 수 있지.”
“데, 데스나이트요? 바깥에는 그 귀한 게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까?”
“진정해. 데스나이트는 그냥 마법진을 지키는 경비일 뿐이니까.”
난 질문 공세를 펼치는 하인들을 진정시키곤 말을 이어 갔다.
“여하튼 데스나이트를 지나치면 가장 먼저 검고 거대한 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설마…….”
“그래. 흑탑이지.”
‘정말 아카데미 지척에 흑탑이 있을 줄은, 나도 긴가민가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웅장한 탑을 직접 목격한 덕에 난 나의 가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흐, 흑탑이 있다면 흑마법사들도 엄청나게 많겠군요.”
“그렇지만은 않았어. 결국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그들도 먹고 마셔야 하니 당연히 주점이나 여관 같은 건 있었지.”
결국 그들도 악인이기 전에 사람이다.
당연히 생존의 기초가 되는 욕구들을 해결해야 했을 터.
“그럼 그냥 평범한 마을 같았나요?”
“그럴 리가? 도굴꾼이나 암살자들은 당연하고, 전쟁상인들은 특히나 많더라. 아무래도 흑탑에서 판매하는 약들을 구매하러 온 거겠지.”
텅 빈 수레들을 끌고 흑탑으로 향하던 이들이 좀 많았던가?
“그런데 하인장님, 그들이 물건을 구매한 거야 그렇다 쳐도, 돌아갈 땐 어떻게 돌아간답니까? 검은 대지에서 대륙으로 돌아가려면 큰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예전에 달프 교수가 그랬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호오… 제법 질문을 할 줄 아는 녀석이네.’
나 역시 탈출을 위해 그 사실을 확인하려 밤새 발품을 팔았었기에.
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흑탑은 거대한 섬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에 다른 왕국으로 가기 위해 마법진을 운용하고 있었지.”
흑탑의 영역 외곽에는 각 나라로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포탈 존’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경계가 엄청나게 삼엄했던 걸 기억한다.
‘뭐, 경계가 삼엄할 수밖에 없지. 막말로 다른 왕국의 군대가 그 마법진을 타고 넘어오면 어쩔 건데?’
그리고 그러한 사안은 내게 악재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입구의 마법진을 지키는 데스나이트도 문제이긴 한데, 그 마법진을 타고 무사히 나가는 게 더 힘들 거란 말이지.’
수천의 언데드 병사들과 그들을 통솔하는 흑마법사들을 무슨 수로 넘는단 말인가?
‘멀리서 본 탓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신원 검사 같은 걸 하고 있었지.’
어찌 보면 신원 검사는 당연한 것이리라.
‘레바논 왕국의 신관이나 밀정 같은 놈들을 솎아 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선 어느 정도 생각을 해 봤다.
‘탈출하기 전에 교수의 신분증을 훔쳐 나갈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그곳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교수들은 저마다 아카데미에서 제공한 마법 카드를 갖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주민등록증처럼 얼굴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그 마법진으로 다른 왕국이 쳐들어올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흑탑의 마법사들은 엘리트들이다. 우리가 생각한 걸 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런 조치를 한 거겠지.”
“아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말로 듣기보다도 직접 나가서 보고 싶네요.”
한 하인의 슬픈 넋두리에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외에 이종족도 있었지.”
“이종족 말입니까?!”
“다크 엘프들 말이야. 확실히 사람과는 다르게 생겨서 꽤 매력적이었어.”
오오오오-
하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어느덧 밤은 흘러갔고.
아침이 찾아왔다.
‘어디 보자, 오늘 일정이…….’
습관처럼 기상한 난 8번 방의 방장이 내게 다시 인계했던 계획표를 훑었다.
‘흠… 음? 뭐야, 이건?’
그러곤 평소와는 많이 다른 계획표를 보곤.
난 의문에 잠겼다.
‘벌써 준비를 끝마쳤을 리가 없을 텐데? 설마 구체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건가? 아니야, 아크 교수가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했을 리가…….’
똑똑-
“하인장님, 아침점호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날 부르는 하인의 음성에 난 계획표를 갖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오늘의… 일정을 설명하겠다. 오늘 야외 작업은 따로 없고, 전원 아카데미의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예? 야외 작업이 없다고요? 아직 수리하지 못한 스켈레톤이 태반인데…….”
“혹시 오늘 외부에서 방문자가 오기라도 하는 겁니까?”
1번 방 방장의 질문에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시련의 탑과 혈탑 산하의 아카데미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의 말이 끝나자.
하인들이 놀란 듯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그래서 주말에도 청소를 시켰던 거였구나.”
“하… 여기 학생들만으로도 죽을 맛인데 이젠 다른 곳에서까지 악마들이 온다고? 환장하겠네…….”
‘놀랄 만도 하지.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니까.’
분명 콘스 교수는 학기의 기말고사가 끝난 뒤.
의식이 진행될 거라고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이제 곧 기말고사가 시작되려는 찰나에 의식을 진행한다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걸까?
‘나중에 콘스 교수에게 찾아가 조심스럽게 떠보든가 해야겠어.’
하인들의 구시렁거림이 커지자.
난 손을 들어 그들을 정숙시켰다.
“일단 오늘은 전원 아카데미 청소를 진행한다. 혹여나 교수에게 책잡힐 일 없도록 깔끔하게 청소해!”
“예!”
아카데미 안의 교실과 복도는 물론이거니와.
커다란 호수와 훈련장 등 아카데미의 안팎을 쓸고 닦길 몇 시간.
“이쯤 하면 됐다. 이제 식당으로 이동한다!”
어느덧 아카데미 안에 어둠이 깔릴 무렵.
날 비롯하여 하인 전원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일손이 줄어서 그런지 바쁘네.’
하인들과 함께 바삐 식당 안을 세팅하고 기다리길 몇십 분.
덜컹-
식당의 문이 열리고.
오늘만큼은 파멸, 악마, 저주 학파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의 기다란 테이블에 착석한다.
“대체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이긴? 못 들었어? 오늘 혈탑이랑 시련의 탑에서 학생들이 온다고 했었잖아.”
“아니, 그건 아는데 왜 갑자기 다른 탑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부른 건가 해서.”
“이런 멍청한 새끼. 오늘부터 중요한 의식을 시작한다고 콘스 교수가 그랬었잖아! 벌써 까먹었어?!”
‘학생들에게는 사전에 정보를 좀 흘린 모양이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흑남’이라는 중요한 인물이 자신의 아카데미에서 나오길 바랄 테니까.
‘아카데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 그 정도야 의식을 진행하는 아카데미가 가질 수 있는 권리니까.’
난 힐끔 시선을 돌려.
식당의 끝에 위치해 있는 교수들을 바라봤다.
‘교수들도 전원… 아니, 달프 교수만 안 보이네. 인원 보충을 하러 나간 건가?’
내가 교수들의 면면을 살피던 사이.
한 하인이 내게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인다.
“하인장님, 손님들이 입구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그의 말에 난 곧장 식당 입구로 가 슬쩍 문을 열어 두곤.
콘스 교수에게서 미리 받아 놨던 양피지를 꺼내어 살폈다.
‘들어올 타이밍에 맞춰서 이걸 읽어 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거지? 언제 오려나…….’
내가 문밖의 동향을 살피던 그때.
끼기기기기기기기긱-
‘뭐… 뭐야?!’
갑자기 복도 저 너머에서 날아드는 박쥐 무리에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혈탑의 마법사들은 박쥐로 변한다더니 진짜였어?’
하지만 난 서둘러 마음을 가다듬고.
문 앞에 서 있는 두 하인에게 신호를 주며 목에 힘을 주었다.
“혈탑 아카데미의 교수진과 학생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내 외침이 천장을 울리자.
두 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좌우로 문을 젖힌다.
끼기기기기긱-
그러자 열린 문 사이로 박쥐 떼가 들이닥친다.
‘워…….’
삽시간에 박쥐 떼가 득실거리던 빈 테이블에는.
어느새 변신한 건지 적색 로브를 두른 교수들과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야… 혈탑의 마법사들은 피를 기반으로 한 마법을 다룬다더니 진짠가 보네. 어떻게 하나같이 얼굴이 저렇게 새하얗게 질려 있을 수가 있지?’
흑탑이 시체와 저주 그리고 계약 위주의 마법을 구사하는 반면.
혈탑은 오롯이 마법을 시전하는 시전자의 피만으로 마법을 구사한다고 들었다.
‘혈탑의 창시자가 뱀파이어라는 소문도 진짜 아냐?’
“어서 오시지요, 드레인 학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이오, 볼드 학장.”
‘뭐야, 학장이 직접 온 거야? 어지간히도 중요한 의식인 모양이네.’
두 학장이 무심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이번에는 청색 로브를 두른 무리가 오와 열을 맞춘 채로.
식당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문 너머로 보인다.
“음음… 시련의 탑 아카데미의 교수진과 학생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다시 목청을 높인 뒤.
문을 지나가는 그들을 힐끔 바라봤다.
‘이놈들은 혈탑 아카데미랑 달리 좀 평범해 보이네. 제작 마법 쪽에 몰빵 한 놈들이라 그런가?’
시련의 탑.
그들은 조금 특이했다.
‘시체나 피를 이용하는 것보다도 마물을 길들이는 것과 던전 제작을 주업으로 삼는 탑이라고 그랬지.’
그렇기에 시련의 탑은 흔히 마법사들이 필요로 하는 ‘재능’이 없어도.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탑이라고도 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도리어 멸시당하기도 하지만…….’
“어서 오게, 하이머 학장.”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볼드 학장님. 귀한 의식의 자리에 저희 아카데미를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네. 검은 대지의 번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의 자리에 시련의 탑이 빠져서야 되겠나?”
오가는 메마른 안부 인사 사이로.
학장들의 눈빛이 맞부딪쳐 번뜩 튄다.
“의식의 이름이… 흑남이라고 하셨지요?”
“문제 있습니까, 드레인 학장님?”
“이름이 좀 심심한 것 같군요. 차라리 적남이라고 했으면 의식에 좀 더 활기가 돌았을 것 같아서 말이죠.”
드레인 학장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자.
볼드 학장이 옅은 미소를 머금는다.
“의식을 주최한 게 우리이니 당연히 흑남이라고 칭해야 맞지 않습니까?”
“하하, 흑남이면 어떻고 적남이면 또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어느 탑이 됐건 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작도 전에 기 싸움부터 하는 건가?’
하이머 학장이 두 학장들을 중재하는 걸 보니.
벌써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
‘뭐, 이제 난 할 일을 다 끝냈으니 나가 볼까.’
이제 식당 안은 임프들이 관리할 터.
난 하인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제발 의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갔으면 좋겠는데…….’
흑탑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다른 탑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흑탑 아카데미에 비해 의식에 대한 정보가 적으니까 분명 정보부터 모으려고 하겠지. 그런 정보를 얻기에 가장 만만한 상대는 당연히… 하인들이고.’
물론 그들이 하인들을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대우가 개같아도 우리는 엄연히 흑마법사 아카데미 소속의 하인들이었으니까.
‘다만 걱정되는 건 폭행이나 고문인데.’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오늘 밤은 조용히 흘러가는 듯했다.
‘조용한 걸 보니 오늘은 그냥 적당히 아카데미만 탐색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건…….’
나는 그제야 조금 안도하여 침상에 몸을 누이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스륵-
갑자기 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그 사이로 스산한 안개가 스며들어 온다.
‘저건… 혈탑의 고유 마법일 텐데.’
그럼 침입자는 혈탑의 관계자인 걸까?
‘일단 자는 척을 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자.’
내가 침대에 누워 꼼짝을 않자.
스르륵-
스산한 안개 위로 사람의 신형이 드러난다.
‘교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학생인 것 같지도 않고.’
난 실눈을 뜬 채 늙은 남자를 훑곤 눈을 감았다.
‘만약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면 어떡하지? 해치워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가 그 사실이 혈탑의 윗선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내가 침입자를 두고 고민하던 그때.
후욱-
흔들리던 촛불이 바람에 꺼져 버렸다.
‘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진 몰라도 일단 대비를 해야겠어.’
난 얇은 모포 아래에 감춰진 주먹에 서서히 흑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얼굴 위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선명해지자.
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와 거래를 하고 싶었던 거면 날 깨우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깨우지 않고 내려다보고 있다는 건…….’
분명 좋지 않은 목적을 갖고 내게 접근한 것일 터.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조금만 더…….’
이윽고 숨소리가 목 언저리에서 울려오자.
“으아아아아!”
난 기다렸다는 듯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