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단어가 꽤나 요상하긴 했으나.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흑남을 뽑는 의식? 흑남이라……. 흑남이 대체 뭐지?’
하인들을 죽여 벌판을 피로 물들였던 걸 봐선.
필시 평범한 의식은 아닐 것이었다.
‘가만… 혹시 뭐, 레바논 왕국의 성녀와 비슷한 그런 건 아니겠지? 성녀, 흑남. 흠… 어감은 비슷한 것도 같은데.’
“흑남이라 함은 혹시 성녀의 대항책 같은 겁니까?”
요새 콘스 교수와 함께한 덕에 난 조금은 편안히 질문을 던졌고.
“…….”
나의 물음에 덤덤하던 콘스 교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마법에 대한 재능은 떨어져도 눈치는 빠르네.”
‘…뭐야. 진짜였어?’
그녀가 순순히 수긍하자.
‘그런데 하고 많은 이름 중에 흑남이 뭐냐, 흑남이.’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맞아. 레바논 왕국에만 존재하는 성녀에 버금가는 존재를 만드는 것. 그게 흑남 계획의 본질이지.”
“그럼 엄청난 계획일 게 분명한데 그걸 망쳐 버려도 되는 겁니까?”
“망쳐도 되냐고? 물론이지. 이 계획을 주관하는 사람이 누굴까?”
그녀의 물음에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그야 흑탑의 수뇌부들과 학장님 그리고 아크 교수도 끼어 있겠지요.”
“잘 아네. 핵심은 아크 교수야. 만약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그는 아카데미에서 지금보다 더 큰 입지를 얻게 될 거고.”
‘그렇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의식이 진행되려는 것 같으니.’
이 커다란 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아크 교수는 학장의 비호 아래에서 아카데미 최고의 권력자가 될지도 모른다.
‘콘스 교수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어떻게든 견제하려는 거고. 만약 의식이 실패로 끝난다면 아크 교수의 입지도 좁아지겠지.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거나, 잘만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 아냐?’
아크 교수의 파면 혹은 죽음.
어느 쪽이건 나쁘진 않았으나 난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갔다.
‘잠깐…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콘스 교수에게 개인 과외를 못 받게 되잖아? 거기다가 최악의 경우에는…….’
콘스 교수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아크 교수가 사라진다면 그녀도 더 이상 날 필요로 할 이유가 없으니까.’
분명 아크 신관장이 천하의 개새끼인 건 맞다.
하지만 그 개새끼가 사라진다면…….
‘그다음은 내 차례가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슬쩍 콘스 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콘스 교수와 한배를 타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크 교수의 편에 서야 할지도 모르겠어.’
다만 이 사실을 콘스 교수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
난 슬며시 이번 일의 위험성을 그녀에게 알렸다.
“그런데 아크 교수만을 견제하기에는 교수님께 너무 리스크가 큰 것 아닐까요?”
그렇잖은가?
만약 정말 의식을 망쳤는데 그 사실이 흑탑 수뇌부의 귀로 들어간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콘스 교수 역시 중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걸린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 정말 걸리게 된다면 증거를 인멸하면 되니까.”
“…예?”
“왜? 설마 몰랐어?”
‘알고야 있었지. 오히려 대놓고 알려 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나겠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래. 이번에는 티가 나지 않게 아크 교수의 편에 서야겠어.’
“하하… 당연히 알고 있지요.”
“잘됐네. 그럼 오늘 당장 이동해.”
그녀의 말에 난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장 이동하라고? 정보라도 던져 주고 가라고 하든가!’
“오늘… 당장이요? 전 그곳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인들이 벌판에서 학살당한 뒤로.
교수와 마물들이 삼엄하게 경계하여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던가?
“별것 없어. 스켈레톤과 임프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잖아?”
“히드라는 어떡합니까? 대가리 9개에 몸이 찢겨 나갈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히드라는 내가 따로 빼 놨으니까.”
‘히드라를 따로 빼 놨다고?’
내가 의문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한다.
“히드라도 의식을 위해 배치한 마물인데, 당연히 사전에 학생들에게 경험은 시켜 놔야 할 것 아냐.”
“아…….”
그러니까 그녀의 말인즉슨.
학생들의 경험을 위해 히드라는 지금 다른 곳에 배치해 뒀다는 뜻일 터.
“히드라도 의식을 위해 데려온 거였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갔다 와. 아마 이 며칠간이 최적기일 테니까. 아, 혹시 모르니까 이건 챙겨 가고.”
‘이건…….’
그녀가 던진 것은 웬 양피지였는데.
양피지에는 미로처럼 복잡한 길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지도 아닙니까?”
“아직 미로가 완성은 안 됐겠지만 챙겨 둬.”
‘미로도 만들고 있었어? 대체 무슨 놈의 의식을 그리 거창하게 하려는 건지…….’
난 다시 깃펜을 잡는 콘스 교수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난 그녀가 지도와 함께 준 물병들을 보며 물었다.
“최상급 성수. 일이 끝나거든 그걸 의식의 중심지에 뿌려.”
“…예?”
‘최상급 성수라고? 이년이 그런 걸 왜 갖고 있는 거지?’
콘스 교수는 외부에 나간 적이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자주 외부로 나가는 교수를 통해 얻었거나 아니면… 아크 교수의 집무실에 몰래 들어가서 훔친 건가? 아니야. 그랬다면 아크 교수가 분명 반응을 했겠지. 하지만 딱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어.’
그렇다면 이 최상급 성수는 외부에서 들여왔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설마 콘스 교수 말고도 아크 교수를 싫어하는 교수가 있는 거였나? 자주 외부에 나가는 교수라면… 베크 교수, 달프 교수도 있지.’
생각보다 선택지가 많은 탓에 난 선뜻 콘스 교수의 조력자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히드라를 옮겼다고 했지. 그래도 의식을 위해 배치해 둔 마물인데 그 대형 마물을 마음대로 옮긴다? 학생들의 실습을 위해?’
콘스 교수의 입김만으로 그게 가능한 사안인 것일까.
‘설마 베크 교수가 조력자는…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난 최상급 성수를 주머니에 욱여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직접 가서 보면 알게 될 거야.”
‘단순히 성수를 뿌리면 된다니… 정말 그걸로 되는 건가? 성수를 뿌리는 것만으로 의식을 망칠 수 있는 걸까?’
난 솟구치는 의심을 억누르곤.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입니까?”
“뭐?”
“만약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다면 아크 교수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도 있는데, 제게도 무언가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눈가가 싸늘하게 내려앉자.
‘괜히 말을 꺼냈나? 아냐, 어차피 아직까진 난 그녀에게 꽤 유용한 장기짝이야. 이 정도 제안을 했다고 해도 바로 날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난 침을 삼키며 그녀의 시선을 받아 냈다.
“보상. 보상이라…….”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작게 실소하더니.
날 보며 묻는다.
“원하는 게 뭔데?”
“마법진 사용을 허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녀의 표정이 굳자.
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교수님께 외출 허가증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쯤은 아카데미 바깥의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긴 하지.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깃펜으로 양피지를 톡톡 건드리더니.
곧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네. 좋아. 네가 성공적으로 일을 끝낸다면 외출 허가증을 줄게.”
‘예스!’
그녀에게야 별것 아닌 외출 허가증일지 몰라도.
내게는 아니었다.
‘그 외출 허가증으로 마법진 밖에 뭐가 있는지 미리 확인을 해 놔야 나중에 탈출을 할 때 도움이 되겠지.’
아카데미 탈출을 위한 사전 작업.
바깥의 동향을 살피는 일.
탈출을 꿈꾸는 내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난 의문을 접어 두고 그녀의 집무실을 나갔다.
하인장이 콘스 교수의 집무실을 나가고 몇 분 뒤.
스스슥-
깃펜을 놀리던 콘스 교수의 뒤로 웬 사람의 인형이 들어선다.
“정말 저걸로 될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베크 교수?”
“정말 저 하인장이 믿을 만한지 불안해서요. 만약 저놈이 일을 그르친다면 저희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베크 교수가 불안감을 보이자.
콘스 교수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언뜻 멍청해 보이긴 해도 눈치는 빠른 놈이에요.”
“그럼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만약 저희의 계획을 눈치챈 거라면 어떡하죠? 아니, 것보다 스켈레톤도 못 이길 텐데…….”
“걱정 말아요. 만약을 대비해서 제가 손을 써 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콘스 교수의 대답에 베크 교수가 묻는다.
“손을 써 뒀다는 건…….”
“그에게 흑마법을 좀 가르쳐 뒀어요.”
“…예? 하인에게 마법을 가르치셨다고요?!”
베크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콘스 교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걱정 말아요. 그래 봐야 저희의 손가락 하나 건들지 못할 테니까요.”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요? 만약 그가 걸리기라도 한다면 저희도 무사하진 못할 것 같은데요.”
막말로 그가 일을 그르쳐 마인드 브레이커에 걸린다면.
하인장의 뒤에 콘스 교수가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들의 관계 역시 발각되고 말리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잡히면 곧장 끌려갈 텐데요…….”
“그에게 인공 심장을 주면서 약간의 안배를 해 놨어요. 그가 일을 잘 끝내면 그걸로 좋은 거고, 실패한다면 그를 죽이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죠.”
콘스 교수의 의미심장한 말에 베크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배요?”
“네. 제가 설마 아무런 안배도 안 해 놓고 그에게 심장을 줬을까요. 저주를 걸어 뒀어요. 제가 마음먹으면 그는 삽시간에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급속도로 부패해서 녹아내리겠죠.”
“오오…….”
베크 교수는 비로소 안도하곤 미소를 보인다.
“아무쪼록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흑마법사 아카데미에 신관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체 왜 볼드 학장님께서는 그런 늙은이를 편드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당연히 흑탑에서 내린 지시 때문이겠죠. 애당초 신관장이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그야 흑탑이 레바논 왕국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밖에는…….”
순간 흠칫한 베크 교수가 콘스 교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아크 신관장을 죽이게 되면… 저희도 위험한 것 아닌가요? 흑탑의 수뇌부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하인장을 이용하려는 거잖아요?”
“아아…….”
베크 교수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콘스 교수는 그런 베크 교수를 흘낏 보곤 다시 깃펜을 잡는다.
* * *
한편.
‘하아… 어떻게 해야 되나.’
그녀와 한배를 탔으니 그녀의 명령은 어느 정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아크 교수가 파면당하거나 죽어서도 안 된다.
‘즉, 내가 방해를 해도 아크 교수가 흑남 의식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한다는 건데…….’
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카데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북쪽의 벌판 위.
야심한 시각 덕인지 벌판 주변은 조용했고.
덜그럭-
간혹 스켈레톤들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깨운다.
‘이 밤중에 이게 뭔 짓거린지.’
난 벌판 위로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장막을 보며 침을 삼켰다.
‘저 안에 몰래 들어가서 기운만 흡수하면 된다 이거지?’
언뜻 보기엔 간단한 일처럼 보였으나.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일단 저 스켈레톤들을 피해서 저 장막 너머로 들어가야 하는데…….’
장막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스켈레톤들의 숫자는 눈대중으로 봐도.
100구가 넘었다.
‘음… 좀 숫자가 적은 곳은 없나?’
난 장막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고.
그 와중 서쪽 부근이 유독 스켈레톤이 적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고작 10구 남짓 정도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어. 간단한 일이야. 배운 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난 마음을 갈무리하곤 콘스 교수에게서 받았던 허름한 지팡이를 잡았다.
“타락의 정수.”
내가 지팡이 끝을 스켈레톤들에게 겨누고 나지막이 속삭이자.
두 개의 심장에서 흑마력이 올라와 지팡이를 타고 표적을 향해 쏘아져 갔다.
덜그럭, 덜그럭-
그러자 스켈레톤 3구가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하더니.
파사삭-
헛간 무너지듯 순식간에 자리에 무너져 내린다.
‘오우야…….’
그 모습을 본 난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대상의 신체를 직접 파괴하는 마법이라더니… 진짜네?’
부패 마법보단 파멸 계열의 마법을 쓰는 게.
스켈레톤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콘스 교수의 말을 따르길 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켈레톤도 피해 다니는 신세였는데, 허 참…….’
바스러진 뼈들을 보며.
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
이제는 스켈레톤 정도는 가볍게 뭉그러트릴 수 있다니.
난 지식의 위대함에 감탄하며 남은 스켈레톤들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파사삭-
남은 7구의 스켈레톤들도 머리만 남긴 채 자리에 무너지자.
난 비로소 지팡이를 거두었다.
‘이상하네. 보통 이 정도로 마법을 사용하면 꽤나 힘들어하던데. 별로 힘들지가 않네.’
2학년이나 3학년이나 한 번에 여러 번 마법을 사용하면.
지친 기색을 보였으나 정작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장이 두 개라 그런 건지… 아니면 개인 과외의 효과가 좋은 건가. 흠…….’
그러나 난 곧 의문을 거뒀다.
‘어쨌건 이제 들어가 볼까.’
난 이미 쓰고 있던 복면을 다시 꾹 눌러쓰곤.
검은 장막을 옆으로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저게 미론가? 내 키보다 높네.’
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벽 앞으로 걸어갔다.
‘겨우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준비를 해 놨다니. 스켈레톤을 얼마나 갈아 넣은 거야?’
그 갈아 넣은 스켈레톤의 수리는 하인들이 하게 될 터.
‘당분간은 스켈레톤 수리만 하게 되겠구나.’
난 고개를 젓곤 콘스 교수가 줬던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미로 중심부로 가서 최대한 흑마력을 뽑아 먹어라 이거지? 그런 일은 얼마든지 해 주마.’
지도를 따라 천천히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니.
생각보다 내부가 복잡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도가 없었다면 날이 밝을 때까지 헤맸겠네.’
혹시나 미로 안에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 최대한 신중을 기했으나.
내 걱정과 달리 미로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하긴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니까. 그보다 여긴 것 같은데.’
어느덧 미로의 중심부로 들어온 난 지도를 확인하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흑마력을 뽑아 먹으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건가?’
난 미로 중심에 있는 핏빛의 구체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확실히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기는 한데… 건드려도 괜찮은 걸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죽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으나.
내겐 나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여차하면 신성력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흑마력이랑은 완전 상극이니까 상황이 이상하다 싶으면 신성력으로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겠지.’
난 핏빛 구체를 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일단 이걸 흡수하고 그 뒤에 성수를 뿌리라고 했지. 좋아… 일단 살짝만 건드려 보자.’
마침내 난 결단을 내리고 숨을 삼킨 채 핏빛의 구체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제발… 살려 줘……. 살려 줘…….]
[그만… 그만해! 그만해!]
[으으으으으으…….]
어딘가 익숙한 음성들이 절규하듯 내 귓가를 후려친다.
‘이건… 하인들의 목소리…….’
그렇단 건 아마도 저 핏빛 구체는 하인들의 원념으로 만들어진 결정체 같은 것인 걸까?
화아아아아악-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용서할 수 없어! 죽어! 죽어! 죽어!]
‘으윽…….’
하지만 원념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방대한 흑마력의 양에.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다급히 두 개의 심장을 회전시켜.
몸 안으로 밀려드는 흑마력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무슨 흑마력이 이렇게… 저번에 심장을 이식받을 때보다 더 많은 것 같은… 으으으…….’
그래도 저번의 경험이 있던 덕에.
난 파도치듯 밀려오는 흑마력을 최대한 달래 가며 양쪽의 심장에 나누어 보냈다.
[내 딸이 보고 싶어……. 잘 살아 있겠지?]
[어떻게 장만한 내 농지인데…….]
그 와중 죽은 하인들이 살았을 인생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갔고.
‘그래. 내가 너희의 마음 다 이해한다.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개죽음을 당했으니 억울하겠지. 하지만 학생의 흑마력이 되기보단 같은 하인 출신인 내 흑마력이 되는 게 낫지 않겠냐.’
난 속으로 원념을 타이르듯 달랬다.
정말 내 달램이 원념들에게 위로가 된 건진 모르겠으나.
폭발하듯 요동치던 흑마력은 점점 나의 두 심장 안으로 갈무리되어 들어갔고.
사사사사삭-
어느덧 나의 왼쪽 심장 위로 흐리멍덩한 세 개의 고리가 생겨 갔다.
‘이건… 6서클이 된 건가? 맙소사…….’
적어도 이 정도면 천재라 불리는 학생들과 맞붙어도 이길 수 있는 것 아닌가?
‘만약 내가 이 상태로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역대 최고의 재능충 소리를 들으면서 입학했을지도 모르겠네. 허… 설마 이 정도로 효과가 엄청날 줄은 몰랐는데…….’
내게 기운을 빨려서 그런지 핏빛은 오간 데 없고.
백색이 된 구체를 보며 난 침을 삼켰다.
‘심지어 저게 아직 준비 중이었던 거였잖아. 만약 완성된 걸 흡수했다면……. 아냐. 만약 완성품을 흡수하려 했다면 엄청난 반동에 정신을 못 차렸을지도 몰라. 최악의 경우에는 죽었을 수도 있겠지.’
만약 내게 두 개의 심장이 없었다면.
이 기운들을 다 받아 낼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었다.
‘근데 저거… 괜찮은 건가?’
백색이 된 구체에선 더 이상 어떠한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기에.
불현듯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함이 밀려온다.
‘콘스 교수는 여기다가 성수를 뿌리라고 했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가 아크 신관장이 회생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는다면…….’
나 역시 쓰임새가 다하여 콘스 교수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터.
‘그래도 마인드 브레이커 저주를 생각하면… 조금은 뿌려 두자.’
그래야 혹시 내가 저주에 걸리더라도.
성수를 뿌렸다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아닌가?
쪼록-
내가 병의 마개를 열고 성수를 구체 위에 붓자.
성수가 구체 속에 천천히 스며든다.
구체에서 선명한 신성력이 흘러나오자 난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건 됐고. 남은 성수들은…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건 내가 마셔도 되는 것 아닌가?’
흑마법사들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는 성수이겠으나.
이미 신성력을 지니고 있는 내게는 보양식이 아니겠는가?
‘최상급 성수를 마시고 혹시 내 몸에 걸린 저주들까지 다 풀리는 건 아니겠지?’
성수는 정화의 힘을 갖고 있다.
하물며 최상급 성수라면 그 힘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만 마셔 볼까.’
난 성수가 남은 병의 마개를 열고.
슬며시 성수를 들이켰다.
화아아아악-
‘오오…….’
심장을 포근하게 감싸는 기운.
모든 생명체의 근간이 되는 기운이 나의 전신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이게 최상급 성순가…….’
몸속에 있던 모든 이물질들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윽…….’
순간 인공 심장과 나의 심장 언저리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자.
난 심장을 붙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뭐가… 잘못된… 건 아니네. 후…….’
다행히 통증은 금세 사라졌기에.
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신성력과 흑마력이 충돌하진 않았는데 왜 아팠던 거지?’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한 가지뿐.
‘설마 정말 최상급 성수가 내 몸에 걸려 있던 저주를 없앤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지만 내심 마음 한편으론 기대감이 들었다.
‘내일 몰래 학생한테 마법을 사용해 보면 알겠지. 정말 저주가 해주된 거면 학생한테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남은 성수들을 싹 다 들이켠 뒤 난 입가를 닦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어쨌건 콘스 교수가 시킨 일은 다 했으니까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
콘스 교수가 외출증을 준다면.
드디어 이 빌어먹을 아카데미의 풍경 말고도 바깥의 광경을 볼 수 있을 터.
‘마법 지식도 충분하고, 성마법도 어느 정도 익히고 있으니 이제 바깥의 상황을 보고 완벽한 탈출 계획을 짜면 되겠지.’
그래도 이 정도 힘이면.
바깥에 나가더라도 넋 놓고 죽을 일은 없으리라.
* * *
나는 무사히 의식의 장소를 벗어나.
곧장 콘스 교수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제 콘스 교수에게 별다른 의심을 안 받고 외출증을 받기만 하면 돼.’
끼이익-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빨리 끝냈네? 제대로 하고 온 건 맞겠지?”
그녀는 조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요. 미로 중심에 있던 핏빛 구체에 성수를 들이붓고 왔습니다.”
핏빛 구체라는 구체적인 단어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확실히 확인을 해 봐야겠지. 마인드 브레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