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323화
레아가 자신이 만든 영역 내에서 그 인간 지네를 파괴한 직후, 어딘가로부터 무수히 많은 뒤틀린 생명체들이 몰려왔다.
등껍질을 등에 지고서 눈이 튀어나온 달팽이 인간이나.
팔다리를 강제로 늘린 것처럼 길쭉하게 늘어져 키가 십수 미터는 되어 보이는 각다귀 인간 같은, 끔찍한 생명체들.
하나같이 원본이 타 종족도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과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형상이라는 공통점만 빼면, 전부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피잉! 큐웅!
물론 그런 외형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눈에서 빛을 번쩍이는 것으로 산 하나를 통째로 지워 버리는, 소멸 영역을 전개하는 저 위험성이야말로 저것들을 규정하는 진짜 정체성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그리고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타카마 시티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의 정상이다.
저것들을 격퇴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를 떠나, 당장 여기서 저것들과 맞붙는 것만으로도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기에 충분할 만큼 가까운 거리인 것이다.
“유메미! 나와 저것들을 격리 결계로 연결시키고 도시로 돌아가 사람들을 대피시켜 줘! 아델은 레아를 데려가고!”
그래서 나는 동료들에게 급한 불부터 끄게 했다.
내가 이 흉물들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 사람들을 우선 다른 위치로 옮기게 하려는 것이다.
‘제길…… 땅이 내 발목을 붙잡는군.’
사실 이제 와서는 별조차 부수고 생성할 수 있는 검을 휘두르는 나에게, 이 지상이라는 환경은 너무나도 큰 제약이었다.
아후라 마즈다전 때와 같이 이 세계가 통째로 파괴되는 것을 감수하고서 싸운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을 뒤에 두고서 유메미가 만든 격리결계 내에서만 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아까 전 지네와 같이 일반적인 물리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적이 나타난다면 나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아는 그 한 번으로 회복 불능의 빈사에 빠진 것 같고…….’
차라리 레아처럼 일정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는 종류의 권능을 구사할 수 있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녀도 친나마스타의 권능을 너무 많이 사용해 육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미봉책을 남발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언젠간 반드시 무너지고 말, 허술하기 그지없는 대책.
퍼엉!
“으극!”
나는 이 격리된 위상 안에서 온몸을 부서뜨려 가며 뒤틀린 생명체들과 맞섰다.
* * *
“일단 신우 씨는 다른 곳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곤 했지만, 지금 당장 어디로 가야 하죠?”
타카마 시티에 도착한 유메미 일행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체 어떤 곳으로 대피를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이곳을 제외한 5대 세력들이 전부 멸망한 지는 한참 전 이야기고, 아후라 마즈다가 세운 예루살렘 역시 마물과 악마들이 뒤섞인 지옥도가 된 지 오래.
무엇보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물자와 보급이 유지된 장소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애초에 옛 성터를 찾으려 한 것도 다른 게 아니라 음식과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겠소?”
그때, 라이진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온몸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였다.
“그 피는…….”
“이건 마물의 피요. 최 양과 함께 접근하는 마물들을 격퇴하고 있었거든.”
라이진은 최윤아와 함께 도시 바깥으로부터 침입해 오는 마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뒤쪽의 산에는 그 위험한 생명체들이, 도시 전방의 평야에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달려드는 마물들이 있다.
이곳에서 안전한 구역은 없는 것이다.
이제 이 세계는 모두가 쉴 새 없이 싸워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라이진은 지금 타카마 시티 외에 대피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다는 이야길 하려는 것이다.
“거기가 어디죠?”
“이지스 인터내셔널. 9대 군소세력들 중 하나요.”
“군소세력? 5대 세력들도 전부 망한 마당에 그런 곳이 제대로 남아 있을까요?”
유메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확실히 이지스는 5대 세력에 비하면 큰 곳은 아니지. 하지만 그들은 5대 세력의 하청을 받아 군사 인력을 제공하는 용병 기업이오.”
“용병 기업……?”
“장비를 직접 생산할 능력도 없고, 소속된 각성자 중에 압도적으로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자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략과 전술 분야가 매우 발전한 기업이지.”
“약한 자들을 위한 대비가 잘되어 있을 거란 말이군요.”
그의 설명에 아델이 추측했다.
“바로 그거요. 기지 방어, 정찰, 정보 수집, 국지전. 5대 세력들이 온갖 더러운 일을 할 때 돈과 장비를 주고 일회용품처럼 쓰는 인력이 바로 거기서 나온 것들이지. 그런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본거지 또한 효율적으로 지키고 있을 것이고.”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 나타나는 마물이나 적들은 뛰어난 방어술 정도로 격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아직도 멀쩡하게 남아 있을까요?”
“세력 자체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필요는 없소. 중요한 건 그들이 비상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 두었을 대피소와 비축해 둔 물자. 그걸 우리가 쓸 수 있을 거요.”
유메미는 그 말을 듣고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고, 우릴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면…….”
“그럼 빼앗아야지.”
라이진의 단호한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대안은 없었다.
당장 라이진이 제시한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그렇게 여러 가지 대안들을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저 산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유신우가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알겠어요. 그럼 이지스 인터내셔널로 사람들을 대피시킬게요.”
“잘 생각했소.”
결국 마음을 먹은 유메미는, 자신이 유신우 대신 이곳의 리더가 되어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제가 공간 도약 게이트를 열어서 그곳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려면 그곳의 좌표를 제가 인식해야 하죠. 좌표를 모르고 문을 열었다간 엉뚱한 곳으로 연결될지 모르니까.”
그녀는 아델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델 씨, 여기서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이죠?”
“힘을 개방한다면…… 그렇습니다.”
“라이진 씨가 말한 이지스 인터내셔널로 가주세요. 거기서 당신이 비컨 역할을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윤아 씨는 계속 거너들을 지휘해서 접근하는 마물들을 막아주시고, 라이진 씨는 아델 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동안 사람들의 대피 준비를 도우면 될 것 같아요.”
“알았소.”
“그럼, 지금 바로 움직이죠.”
유메미가 정해준 역할에 따라,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목숨들이 희생당하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 이들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 * *
“살았다! 여기 우리 모두가 적어도 몇 달은 먹고살 수 있을 만한 물자가 비축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이진이 말했던 대로, 이지스 인터내셔널의 도심 지하로 연결되는 방공호엔 수많은 비축 물자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지상의 도심 자체는 역시나 마물 창궐 시기에 파괴되어 황폐화된 상태였지만, 그 아래쪽에 구축해 놓은 방공호는 꽤나 멀쩡했던 것이다.
“놀라워……. 이런 간단한 구조로 마물들이 진입로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유메미는 이곳의 구조를 보며 감탄했다.
이지스 인터내셔널이 오랜 기간 실전에서 축적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든 구조 설계.
5대 세력조차도 모르는 마물들의 인지 능력과 생태에 관한 통찰력은, 이지스 인터내셔널 나름의 기업 경쟁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실력으로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이유로 전멸을 맞이해야만 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이 시체들은……?”
“마물들을 막는 데는 능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는 경쟁력이 없었던 모양이오.”
끔찍한 자상과 총상을 입은 채 썩어들어 가고 있는 시체들을 보며, 라이진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방공호 내부에는 그런 시체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죽은 걸 보면, 이곳에 대피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 사람들로부터 보금자리와 식량을 빼앗는 찝찝한 짓은 저지를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
죽음 앞에서 태연한, 아니, 태연할 수밖에 없는 라이진의 뒷모습을 보며, 유메미는 고개를 숙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몰아치는 비극 앞에서 인간성을 잃어간다.
매일매일 잃기만 하는 일상이 이어진다.
아후라 마즈다를 죽였고 하늘의 균열을 닫아 상황이 좀 더 나아질 거란 기대를 했지만, 막상 현실은 더 최악인 장애물들만이 늘어날 뿐.
여기서 타인의 죽음에 공감해버리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내 측근도 아니었던 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건 낭비에 불과하다.
유메미는 밖으로 옮겨지는 시체들을 잠시 쳐다보고는, 금세 외면하고 말았다.
“레아 씨!”
그때, 레아를 간호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드디어 일어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곧장 유메미가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레아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미안해. 내가 괜히 무턱대고 들이대는 바람에.”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레아는 이미 의식을 회복해 있던 상태였다.
단지 무언가에 홀린 듯 허공을 바라보기만 하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 상태에서도 주변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받아들였는지, 이곳으로 대피해 온 정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까 봤어. 도시까지 그것들이 들어왔었지?”
그녀는 아까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유신우가 끝까지 버텼음에도 기어이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 타카마 시티 내부까지 들어온 괴생물들의 모습을.
“다행히 그땐 이미 대피 준비가 모두 끝난 상황이라. 사상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신우는?”
“신우 씨는…….”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다시 살아날 거예요.”
유메미의 말에,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예요. 항상 그랬듯이. 신우 씨는 불멸자잖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올 거예요.”
“정말? 영원히?”
“그건…….”
“만약 부활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이 있으면 어쩌지? 혹은 다시 부활하지 못하는 죽음이 찾아오면?”
레아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걱정들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유신우가 딱히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위험이 있었던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괜한 말을 했네. 미안해. 쓸데없이 걱정만 하게 만들고.”
“……괜찮아요.”
방금 전에 봤던 그 악몽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그럼 너도 희생해.
괜스레 이상한 상상을 자꾸만 하게 된다.
“……그 가이아의 피조물…….”
다시 레아는 화제를 바꿔,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네? 아…… 그 이상한 괴물들이요?”
“응. 그것들은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타이밍에 나타나기 시작한 거지? 무색인들처럼 하늘에 균열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건 아마…… 혼돈 때문일 거예요.”
“혼돈?”
“지금 이 현실에 혼돈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고 있어요. 그 때문에 세계의 존재들…… 그러니까 가이아 같은, 고대신들까지 직접 개입하고 있고.”
“왜지? 아후라 마즈다도 죽었는데……?”
“아직 한 명이 더 남아 있잖아요.”
“한 명…… 아.”
둘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야드가르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연결된 타 차원으로 갔던.
그곳에서 파라슈로 무수히 많은 불멸자들을 베어 정체된 엔트로피를 해방시키고 있을.
그 태공망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