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97화
세계가 움직인다.
태초의 거인은 오크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의 지반을 구성한 존재.
그렇기에 그 크기는 하나의 대륙, 아니, 행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거체가 몸을 움직이니, 내 몸을 잡아 이끄는 중력의 변동이 실시간으로 느껴질 정도.
산맥이 하늘로 치솟고, 바다가 사정없이 뒤집혀 온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물론 그것들은 전부 이미르의 살덩이와 체액이었다.
-아아아악!
-아파! 살려줘!
-이제…… 그만…….
그리고 그것이 몸을 일으켜 세운 자리 아래쪽에서, 고통에 찬 무수한 신음들이 들려왔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불사의 저주에 갇힌 자들.
마치 내 오른쪽 눈에 담긴 심연과도 같아 보인다.
그보다는 훨씬 더 끔찍한 참상이 저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듯하지만 말이다.
-어리석도다. 한없이 작고 연약한 미물이여.
눈으로는 도저히 한 번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땅덩어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것의 얼굴은 무엇인지, 팔은 어디에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불가능.
그저 이 앞에 있는 것이 이미르의 신체 어느 한 군데라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제6의 감각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는 마력을 느껴보았지만, 그걸로도 턱없이 부족한 정도다.
이 녀석이 가진 육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한 대륙 전체 곳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육신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도 없겠지만.
-모든 존재는 하나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들어주마. 대재앙의 화신이여.
하나의 의지에 종속된 존재.
이게 그 태공망이 말했던 혼돈의 압제인 모양이었다.
이미르 역시 그것과 함께 묶인 구세대 신들 중 하나이니,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물론 이 녀석은 신화대전이 발생하기도 전 발할라의 전사 신들에 의해 먼저 추방되긴 했지만 말이다.
스르륵.
그의 몸으로부터 작은 실 같은 것들이 돋아나 나를 노리며 뻗어왔다.
아까 전 몰래 내 뒤를 찌르려던 그 촉수와 같은 모양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아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용격 현월’ 13연}
쉬쉬쉬쉭!
난 그 모든 촉수들을 베어내기 위해 사방으로 현월을 난사하듯 날려 보냈다.
그 반동으로 전신의 피부가 찢어지고 혈관이 파열하며 피가 튀었지만, 몸속의 별 불꽃이 그것을 순식간에 회복해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모든 필멸자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되었나? 각각 다른 불멸자들이 각기 다른 세력을 난립해 서로 영원히 전쟁을 지속하는 상태가 되지 않았나?
“그들 또한 사라져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영원히 군림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져야 마땅하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네 스스로 그들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거란 확신을 내릴 수 있는가?
“말이 맴도는군. 더 이상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금강염사’ 고압 파동해방}
두꺼운 비늘로 뒤덮인 흑청염의 사자가 거대한 턱과 이빨을 내밀고서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이 앞에 있는 것이 이미르의 어느 부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급소를 노리며 핀포인트 타격을 행하는 건 불가능.
신장 50미터의 거인 라르스를 한 번에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불의 사자를 내뿜으면서 핀포인트 타격을 생각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 태초의 거인이라는 이미르의 크기는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육체를 가진 존재였다.
그래서 더더욱 상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큰 적이라면 급소만을 공격해서 쓰러뜨리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해.’
쿠우우웅.
그런 와중에 피부 표면에서 돋아난 촉수 끝부분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담긴 보라색 구체들이 형성되었다.
곧 그 구체들은 나를 향해 쏘아 보내졌다.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용격 만월청영’ 2연}
츠팡!
나는 빠르게 교차하는 2중의 십자 참격으로 구체를 갈라냈지만.
우웅!
네 등분으로 조각난 보라색 구체들은 마치 세포가 분열되는 것처럼 각기 네 개의 구체로 분화되어 끝까지 날 추격해 왔다.
‘이런!’
스스스슥!
츠파파팟!
수십 개의 현월을 연달아 난사하며 다가오는 모든 구체를 잘라내도 마찬가지.
모두 똑같이 추진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개수가 늘어나기만 할 뿐이었다.
그 무수히 많은 구체들 전부가, 상쇄 공격에 막히면 막힐수록 분화하며 개수가 늘어나는, 방어 불능의 무적 공격이었던 것이다.
‘닿으면 죽는다!’
게다가 그 하나하나가 에테르를 불태우는 위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나는 불사의 능력이 있기에 에테르가 모두 소진된다 하더라도 죽고 다시 살아나기만 하면 모두 원상복구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죽어 있는 동안 이미르가 내 시체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격룡창 트리슈라 소환}
{청류 폭발}
터엉!
나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트리슈라를 꺼내 들었다.
창끝의 푸른 격류가 나를 밀어내며 공격 범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거기에 별 불꽃의 날개까지 펼쳐 활공의 안정성을 높였다.
나는 이미르의 몸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으로 잠시 시간을 벌었다.
‘분명 태공망은 이 녀석이 거의 모든 힘을 봉인당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 말했는데, 썩어도 준치라 했던가.’
이미르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신이었다.
그 거대한 몸뚱이의 일부와 대면했을 뿐인데, 이 정도로 위협적인 공격을 구사할 줄은.
‘게다가 파라슈로 어딜 베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군.’
심지어 이렇게 큰 적을 상대로 작은 손도끼를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제아무리 신을 죽이는 도끼라지만, 이런 걸로는 저 거대한 덩어리를 베어봤자 생채기를 내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 옛날의 오크 신들은 잘도 저런 걸 여기에 파묻었군.’
이제는 그 불멸자들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미르를 이곳에 봉인하고 그걸 토대로 삼아 자신들의 세계를 세운 것인지.
물론 그때도 그 신들은 저걸 죽일 수 없어서 이 구덩이에 빠뜨린 것일 터다.
놈을 죽이고 힘을 빼앗아와야 하는 나로서는 그런 방식으로 끝내는 건 의미가 없다.
‘결국 직접 부딪히는 수밖에……!’
나는 다시 왼손에 쥔 파라슈의 도낏자루를 움켜쥐고 이미르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두근.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게 위험 속에 뛰어드는 감정에서 솟아난 고양감에 의한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라 생각했지만.
두근. 두근.
심장박동의 횟수가 점차 빠르고 무거워지기 시작하면서, 난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인위적인 심장 박동…… 내 안에 있는 뭔가가 자신을 꺼내 달라고 하고 있다.’
곧 나는 그 정체와 대면했다.
스스로를 바깥으로 내보내 달라고 요동치는 그것과 말이다.
* * *
이미르의 거대한 신체가 나를 덮쳐온다.
저것은 태초의 거인의 손.
콰우우우.
마치 거대한 대륙이 하늘로 떠올라 나를 덮쳐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특별한 힘이 가해져 있지 않더라도, 질량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짓뭉갤 수 있을 정도의 위압감.
게다가 그 손에는 곳곳에 얇은 촉수들이 돋아나 있으며, 예의 보라색 구체들을 머금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금 이미르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일거에 쏟아붓는 느낌이다.
-포기해라. 너는 결국 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콰아아아.
이미르는 끝까지 나를 무너뜨리려 했다.
나는 양손에 든 파라슈와 찬드라하스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거대한 손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스르륵. 핏!
그리고 마침내 그 손이 내게 닿았다.
촉수는 내 몸을 꿰뚫고 안으로 파고들었으며, 거대한 손바닥은 바깥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감쌌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이미르의 거대한 손가락과 손바닥에 의해 가려지며, 내 주변은 칠흑에 휩싸였다.
-드디어.
이미르는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재앙의 화신이 나의 것이 되었다.
시바의 힘을 가득히 머금고 있는 내 육신을 자신의 사도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그는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신난 태도였다.
-이제 세상은 다시 그분의 것으로.
쿠쿵. 쿵.
무너진 아스가르드의 땅덩어리 사이로 그의 상반신이 솟아오른다.
보이지 않던 이미르의 전신이 모두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끝도 없는 구덩이인 긴눙가가프 안에, 하반신이 빠진 채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무거운 상반신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힘을 써 봐야 겨우 그 정도가 한계였지만 말이다.
“틀렸어.”
-음?
그런 와중, 이미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내 목소리에 놀란 것처럼 되물었다.
-네가 어떻게……?
“내가 네 것이 아니라, 네가 내 것이 된 거지.”
-뭐라고?
나는 이미르의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쿠구구궁.
-어, 어떻게……!
당황한 거인은 억지로 버티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을 뿐.
“다시 말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아. 네가 나에게 종속될 수는 있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이미르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완전히 내 통제하에 있다.
꿀럭. 꿀럭.
내 온몸을 꿰뚫은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내 정신을 파고들려 했지만.
{신월검 정신무장 발동}
손에 쥔 찬드라하스의 정신방어가 그런 모든 시도를 차단했다.
도리어 이 촉수들은 역으로 이미르의 몸의 제어권을 내게 넘기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네놈이 감히 어떻게 태초의 거인인 나를 조종한다는 거냐!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는 이미르에게.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넌 내 심상세계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
-……뭐라고?
쿠르릉, 콰릉!
심상세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거대한 날개를 펼친 세 개의 머리를 가진 흑룡이, 쓰러져 있는 거인의 살점을 물어뜯었다.
으드득.
-끄아아아!
그와 동시에 현실 세계에선, 이미르가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더니.
곧바로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공동의 저주가 너의 영혼에 새겨진다.}
{별의 불꽃이 공동의 저주를 정화한다.}
라르스를 비롯한 트롤들에게 가해졌던 거인화 저주는, 내 몸속에서 자연스럽게 불타 없어지고.
{아지다하카가 태초의 거인의 육신을 잠식한다.}
쩌억!
쿠오오오오!
찢어진 거인의 가슴팍으로부터, 거대한 흑룡의 머리가 돋아났다.
행성의 크기를 방불케하는 그 거체를, 내 분신이자 힘의 원천인 아지다하카가 차지한 것이다.
콰직, 츄아아악!
그렇게 마침내, 이 무거운 살덩이를 갈라내고 용의 날개가 완전히 펼쳐져 파괴된 아스가르드 전체를 뒤덮게 되었을 때.
{흑검익 아지다하카가 별의 불꽃을 집어삼킨다.}
그것은 시바의 불꽃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