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94화
죽은 자들의 덩어리와 마주쳤던 그때, 나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시바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별의 불꽃이 주인의 육신에 다가가려 한다}
{악의의 오른쪽 눈은 이곳에 대천세계의 주재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내 안에 있는 별의 불꽃은 그것에게 강하게 이끌리고 있는데.
진실을 꿰뚫어 보는 오른쪽 눈은 그것이 다른 개체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대자재천이 죽었다니?”
“말 그대로. 시바는 죽었습니다. 얼마 전에 그의 시체와 마주쳤으니 말입니다.”
저 모순된 두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는 당연하게도, 그 덩어리가 시바의 썩어 문드러진 육신이라는 사실.
결국 어떤 다른 존재가 시바를 죽인 다음, 그 육신을 자신이 흡수하고서 그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자재천의 시체? 그럴 리가……. 그를 영멸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자신일 뿐일 터인데.”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닙니까? 어쩌면 오랫동안 그와 싸워온 혼돈이 그 방법을 알아냈을 수도 있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그건 안 되네.”
그런데 태공망은 이곳을 벗어나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역시나 그 나름대로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시바의 죽음에 관한 대책을 세우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또 있단 말인가?
“어째서죠? 여기에 계속 머물러 봤자 저 거인들에게 방해를 받을 뿐입니다.”
나와 유메미의 합동 공격을 받고 별 불꽃에 타버린 라르스는 거인화가 해제된 채 그대로 쓰러져 잿불로 사라졌다.
나머지 다른 거인들도 찬드라하스를 사용한 용격 연사에 정리된 건 마찬가지.
하지만 그게 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주변의 거인들을 정리하긴 했으나, 곤륜공사 내에는 여전히 수많은 트롤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언제 다시 거인화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실제로 저 너머 도시 한 구획에선 대량의 마력 증폭 반응이 느껴졌다.
그들과 또 싸우면 이길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개체 수 자체가 많은 트롤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지속하는 건 너무 큰 손해.
그래서 난 태공망을 타카마 시티로 데려간 다음 현 사태에 관한 논의를 하려 했으나.
“나는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거다. 저런 게 밖에서까지 ‘창궐’하지 않게 하기 위해.”
“‘창궐’?”
“‘공동(空洞)의 저주’ 말이다.”
그는 다른 중요한 문제 때문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건 또 뭡니까?”
“이놈들 중 누군가가 저 너머 부서진 신계 어딘가에 파묻혀 있던 ‘태초의 거인’들 중 하나의 힘을 현세로 끌어왔다. 여기에 나타나는 이 많은 거인들은 모두 그것 때문이다.”
태공망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자신이 만든 결계 영역 바깥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방향에는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또 한 무리의 트롤 거인들이 있었다.
“태초의 거인이라니, 설마 구세대 신 같은 거라도 되는 겁니까?”
“그래. 이미르라 불리는 놈이다.”
“이미르……? 설마 오크 종족의?”
들어본 적은 있었다.
발할라 신계가 만들어지기도 이전, 아스가르드를 다스리던 태고의 거인 신.
태공망은 그것의 영향력이 지금 이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맞다. 그 오크 놈.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놈이 차원 너머에 추방되어 있는 이미르의 공동의 저주를 여기까지 가지고 온 게다.”
비프로스트 개방 시나리오 세계에 가둬졌던 라르스가, 어느 순간 미래의 이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고대의 오크 신이 내린 저주를 이곳에 불러냈다.
그는 결국 그 시나리오 세계에서 탈출하는 걸 넘어 고대 신과의 접촉까지 성공했던 모양이다.
“하.”
“그 저주는 유사한 인자를 가지고 있는 모든 종족들에게 전염된다. 초록 피부를 가진 아인종은 물론이고, 심지어 비인종 마물들에게도 말이다. 고블린들이나, 혹은 우리가 모르는 동일 인자를 몸에 품은 마수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혼돈이 지배하던 원시 신화시대의 재림이나 마찬가지다.”
태공망이 하는 말이 정말 현실로 벌어진다면 그건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마물들의 개체수가 폭증한 데 더해 각각의 힘까지 강화되어 각 세력들이 고립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저런 무식하게 강한 거인화 현상까지 더해지면.
그땐 정말로 모든 문명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여기서 결계를 유지하고 계셨던 겁니까? 저들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그렇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면 저 녀석들은 파괴할 대상을 찾아 분별없이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겠지. 그렇게 되면 저주가 퍼져 거체가 창궐하는 건 한순간이다.”
결국 지금 당장은 그를 함부로 다른 곳에 데려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시바가 죽은 건 정말로 중대한 사건이지만, 급한 걸로 치면 이쪽이 우선순위가 더 높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시간이 없다. 다시 저놈이 부활한다면, 나는 아까 전처럼 집중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부활?”
난 태공망의 시선을 쫓아 그가 쳐다보고 있는 지점을 보았다.
그곳엔 거인화가 풀려 새까맣게 불탄 채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라르스의 흔적이 있었다.
“……저 녀석이 부활을 한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신의 저주를 직접 운반해 온 자가 그 정도의 가호도 받지 못했을 것 같나? 놈은 지금 과거의 후대 신과 같은 존재, 그러니까 불멸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다.”
“맙소사.”
안 그래도 상황이 나쁜데, 더 최악인 조건까지 거기에 더해졌다.
그 무지막지한 라르스가 무한히 부활한다니.
그렇다면 놈을 파라슈로 영멸시키기 전까지는 몇 번이고 싸움을 반복해야 한다.
그 조그만 손도끼로, 신장이 50미터가 넘는 거인을 베어 죽여야 하는 것이다.
파라슈에는 일체의 에너지가 담기지 않기에 그걸로 기술을 구사할 수도 없다.
결국 놈을 죽이지 않은 채 압도적인 실력 차로 제압한 다음, 거인화를 풀게 하고서 도끼로 목을 치는, 지극히 어려워 보이는 작업을 해내야만 한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만, 유결부로 그놈을 영멸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심지어 태공망은 그조차도 불가능하다며 미리 선을 그었다.
“어째섭니까?”
“그 태초의 거인은 놈을 지극히 아끼고 있으니 말이다. 저놈의 시체가 잿더미가 된 건, 네놈의 별 불꽃 때문이 아니라 그 녀석의 본체를 지키기 위한 이미르의 수작이니라.”
“본체의 영멸을 막기 위해 거인화가 풀리는 순간 본체를 소각해 버린다는 겁니까?”
“물론.”
결국 당장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라르스를 완벽하게 없앨 수는 없다는 뜻.
나는 잠시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간이 없다.
지금 그를 타카마 시티로 데리고 가 제대로 된 논의를 하는 건 불가능하고, 조언이라도 구해야만 한다.
“혹시 시바가 이런 때를 대비해 남겨 둔 유산 같은 거라도…….”
“그런 건 없다.”
“젠장.”
“애초에 대자재천의 죽음 자체가 우리가 계산한 경우의 수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본인이 죽을 걸 예상치 못했단 말입니까? 언제는 마치 미래를 예지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왜냐하면 그런 일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태공망은 마음이 조급해진 나에게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니?”
“내게 타신편을 맡긴 시바는 다름 아닌 미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 말이다.”
“미래?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다는…….”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적어도 그날까지 시바가 죽는다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시점에서 과거의 내게 접촉하는,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미래. 시바는 그 순간까지 살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내 모든 행동이 미래의 존재인 시바에 의해서 영향받고 있다고?
그렇다면 결국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일들이 그의 시점에선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네가 본 그것.”
……도무지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태공망은 나를 더욱 압박했다.
“그건 정말로 대자재천의 시체가 맞는 건가?”
그 물음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이 잠시 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기억을 다시 되살려 보았지만, 기억은 왜인지 흐릿했다.
아니, 애초에 그날 일어났던 일들 모두가 괴이하기 짝이 없었기에 내 기억의 흐름이 더욱 기묘하게 왜곡되는 듯한 기분이다.
그날의 마지막에 본, 시체들의 덩어리.
그 안엔 정말로 시바의 육신이 들어 있는 게 맞았나?
{별의 불꽃이 주인의 육신에 다가가려 한다}
그 메시지가 생각났다.
‘별의 불꽃이 주인이라 인지하는 주체는 시바뿐일 텐데. 그럼 당연히…… 아니, 아닌가? 꼭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건 나나 다른 용기사들의 몸에도 흐르고 있기도 하고…… 또 타신편 속에도 저장되어 있었으니까. 애초에 시바가 아닌 다른 자도 별의 불꽃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머리가 복잡해진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별의 불꽃이 이끌려 간 그것이 반드시 시바의 육신이여야 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악의의 오른쪽 눈은 이곳에 대천세계의 주재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그러자 그 다음에 나타났던 메시지의 내용이 좀 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 애초에 그게 시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악의가 저렇게 판단한 거야.’
나는 마침내, 지나간 기억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추론하는 데 이르렀다.
‘시바는 죽지 않았다. 그건 시바를 자칭하는 전혀 다른 무언가다.’
태공망이 제기한 의문으로부터, 난 그런 결론을 얻어냈다.
그때 그 존재와의 만남은 시바의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을 말이다.
물론 그러고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찜찜함은 사라지질 않았지만, 시바가 죽는 건 불가능하다는 태공망의 말과 그 추론을 조합해 보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닙니다. 시바는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 봤던 것 같군요.”
미간을 좁힌 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태공망은 그 말을 듣고서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군. 혼돈의 강림이.”
“……그것도 혼돈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앞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유혹이나 환상이 자네를 망가뜨리려 할걸세.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뒤틀린 광경을 보일 테니 말이야.”
“이것보다 더……?”
“절대 현혹되지 말게나. 자네가 따를 것은 오직 시바가 남긴 사명뿐.”
쿵, 쿵.
그때, 거대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 떨어져 어슬렁거리던 거인들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군. 난 다시 집중 상태로 돌아가야 하네.”
태공망이 두 손을 모으고 팔을 허벅지 위에 걸쳐 다시금 주문을 영창할 자세를 취했다.
“……시바가 따로 남긴 유산은 없네만.”
그리고 다시 아까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직전, 그는 나에게 지금 해야 할 일에 관한 조언을 던져주었다.
“다가오는 혼돈을 격퇴하기 위해 그에 필적할 만한 태초신들의 힘을 빼앗는 건 가능할 터. 그게 원래 그 친구의 방식이기도 하고 말일세.”
그의 눈길이 전방을 향했다.
“이를테면 태초의 거인…… 그 녀석도 ‘그 방식’에 포함될 수 있겠지.”
그곳엔 되살아난 라르스가 거인화하고서 도끼를 든 채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