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93화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죽거나 부딪히는 것뿐이었다.
물론 어느 쪽도 나 자신에게는 큰 페널티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죽어도 되살아날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부재할 수밖에 없는 부활의 간격 안에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건 쉬이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한 것이다.
거인화한 라르스의 막대한 힘을 담은 도끼를 연속 일격으로 받아치는 모험을 말이다.
{심연이 너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 결과 내 정신은 붕괴하고 말았다.
손상을 입은 육체는 별의 불꽃이 수복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오는 피로감은 단순한 회복력으로 견뎌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강인한 육체를 가진 각성자라 할지라도 쌓이는 전투피로를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심상세계. 이게 정신 붕괴의 페널티인가.’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심상세계에 이끌려 왔다.
이 앞에는 수많은 신들을 가두었던 악의의 오른쪽 눈, 그 안의 심연이 있었다.
“나를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거냐.”
그것은 마치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적대적인 기운을 마구 뿜으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많은 신격들을 잡아먹고, 이제는 내 차례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더 이상 이전처럼 내 통제 하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넌 날 절대 못 죽여.”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내가 여태껏 영멸시켜 온 다른 신들처럼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내가 무너진 건 어디까지나 정신력에 불과하니까.
내 진짜 존재를 규정하는 물리 세계의 육신과 영혼 세계의 에테르는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곳, 심상세계에 펼쳐진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실제 현실의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이미지화 한 가상일뿐이니 말이다.
{심연이 붕괴한 이성의 조각을 삼킨다}
그 거대한 검은 덩어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그것의 부피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심상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는 줄어들었다.
저 녀석이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다시 부활한다면 그 모든 게 다 원래 상태로 돌아오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유메미와 나를 따르는 용기사들.
현실에 있는 그들은 지금도 죽음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차피 한번 시작한 도박, 좀 더 무리한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
그래서 난 또다시 불 속에 뛰어들기로 했다.
날 붙잡아 억지로 심상세계에 끌고 들어온 심연, 저걸 굴복시키고 다시 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콰드드득.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팔 전체의 피부가 뜯겨 나가는가 싶더니, 곧 거대한 용의 팔로 변화했다.
아지다하카.
이 안에서 시바의 권능과 무기는 사용할 수 없으므로, 믿을 건 오직 나 자신이 만들어낸 힘뿐.
이 악룡의 발톱으로, 심연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핵을 붙잡아 뜯어낼 작정이었다.
그걸 깨뜨린다고 상황이 달라질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서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 태공망을 데리고 곤륜공사에서 탈출하는 것만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으적.
손끝에 무언가가 잡힌다.
크기는 작았다.
용의 앞발로 거대화한 오른손이 쥐기엔 조금 작은 무언가.
난 발톱으로 그것을 낚아채 재빠르게 잡아당겼다.
으드드득.
심연의 거대한 어둠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지다하카의 앞발로 변화한 내 오른팔도 으깨졌다.
이 공간은 가상이지만, 고통은 생생했다.
그야말로 약화된 정신력을 더더욱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상세계의 경계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이건…… 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손에 쥔 것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엄습해 오는 막대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채 붙잡은 것을 끝까지 잡아당겼고.
심상세계의 경계가 이제는 거의 내 발끝에 닿을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무구다.’
불쑥.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건 완만한 곡률로 휘어 있는 외날도.
세이버 형태의 칼 한 자루였다.
{신월검 찬드라하스의 프라나가 파슈파타에 부여된다.}
쿠구궁.
급격하게 무너지는 심상세계의 경계가 당장에라도 나를 끝장낼 것처럼 조여 왔지만.
찬드라하스를 쥐고 있는 온전한 내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었다.
{신월검 정신무장 발동}
* * *
퍼엉!
거대한 라르스의 도끼가 저 멀리 튕겨 나간다.
내 온몸에선 사정없이 갈라진 피부 사이로 선혈이 튄다.
17연의 만월청영으로 공격을 막아낸 그 마지막 순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별의 불꽃이 육신을 재구축한다.}
붕괴된 육신은 체내의 별 불꽃으로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곧 나는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은 만전의 상태로 되돌아 왔다.
몸이 가볍다.
오랜 시간동안 휴식을 취하다 방금 잠에서 깬 기분.
용격을 사용해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넣은 데서 온 정신의 붕괴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찬드라하스…….’
심연을 마주하기 직전과 단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심상세계에서 꺼내 든 세이버가 현실의 내 손에도 쥐어져 있다는 사실.
이것이 내게 부여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간단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힘이었다.
‘모든 종류의 정신 공격을 방어하는 검.’
신월검 찬드라하스를 든 순간, 나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데미지는 모두 무효가 된다.
내 의지를 빼앗고 조종하려 하거나, 환영을 보이려 하거나, 혹은 심적으로 무너뜨리려 하는 모든 시도들.
그리고 나 자신의 몸을 몰아붙이는 대가로 얻게 되는 정신적 피로감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이 검 한 자루로 상쇄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지금껏 불사의 능력을 얻고도 페널티로 인해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용격을.
이제는 완벽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육신을 회복하는 별의 불꽃과 함께…… 더 이상 제약은 없다.’
나는 눈앞의 거인화한 라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휘두른 도끼가 역공에 의해 튕겨 나간 탓에, 뒤로 물러나며 자세가 무너지고 있는 상태였다.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흑화륜’ 전개}
{연쇄추격}
콰우우우!
난 공중에 떠 있는 그 상태에서 곧바로 흑화륜을 사용해 돌진했다.
돌진의 목표 지점은 라르스……가 아닌, 그 반대쪽.
당초에 내가 구하려고 했던, 유메미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으드득.
용격의 사용으로 인해 몸이 갈려 나간다.
체내의 혈액이 증발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별의 불꽃이 육신을 재구축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별 불꽃에 들어 있는 창조의 에너지가 내 몸을 즉시 복구했다.
파괴와 재구축의 연쇄.
그 과정에서 엄습해 오는 정신 피해는 찬드라하스가 모두 흡수한다.
이제 어떠한 고통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퍼퍼퍼펑!
네 줄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네 구의 거인들을 한 호흡에 끝장낸다.
흑화륜을 1격에서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사용해 모든 적들을 베어 넘기는 연쇄추격.
이로써 가운데에 둘러싸여 있던 유메미는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신우 씨! 받아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헬 플레임 오브 플라우로스 - 카트반가 강화}
화륵!
인페르노의 대악마 형상을 한 거대한 화염이 그녀가 손에 든 카트반가의 코어로부터 뻗어 나온다.
이전에도 그녀가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화염 마법.
그때와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면, 그때의 불꽃은 붉은색이었지만, 지금은 흑청색이라는 것이다.
즉 저것은 나에게 극히 친화적인, 별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화염이라는 뜻이었다.
화아악!
대악마 플라우로스가 내 손에 쥔 검날로 빨려 들어온다.
휘두르는 순간, 이 맹렬한 불꽃과 내 참격이 합쳐져 더 강한 시너지를 낼 것이다.
이걸로 라르스에게 일격을 먹인다.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금강염사’ 전개}
{고압 파동해방}
생명력을 극한까지 빨아들여 강화된 흑청염의 사자는 전신이 두꺼운 비늘로 뒤덮인 마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더 크고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턱은 목표로 한 것을 한입에 집어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앞을 향해 내달려가고, 동시에 플라우로스 역시 그 주변을 맴돌며 함께 나아간다.
압도적인 거체의 거인화 라르스마저 대자연 앞의 한낱 생명체 정도로 보이게 만드는 위압감이 그를 덮친다.
투화악!
“으아아아아!”
그는 이 연쇄 공격을 자신의 도끼를 휘둘러 막아내려 했으나, 그건 무용지물이었다.
중량과 속도를 동반한 물리적 힘으로 쳐내기엔, 마법과 별 불꽃의 복합적 속성을 지닌 저 공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크아아악!”
화르르륵!
별의 불꽃에 둘러싸여 온몸이 타올라 고통스러워하는 라르스.
‘지금이 기회다.’
난 그를 내버려 둔 채, 분투 중인 다른 용기사들을 모두 구원해 냈고.
그리고 마침내, 인공 호수에 머물고 있는 태공망에게 접근하는 데에 성공했다.
* * *
태공망은 주변이 그렇게 난리가 나고 있는 와중에도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계속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집중을 행하고 있었다.
애초에 지반을 뒤엎어 놓을 만큼 거대한 체질량을 가진 라르스가 날뛰었음에도 그 주변의 공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종의 주술을 통해 자기 주변을 방어한 모양.
수많은 거인들이 함부로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 걸 보면, 어떤 결계 같은 게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물론 다행히 같은 편인 나까지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은 건 아니었기에, 그에게 접촉하는 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이봐요! 이봐!”
“…….”
문제는 그가 너무 깊은 집중에 빠져 있던 터라 도무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유메미, 텔레포테이션으로 이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자.”
“네? 하지만, 집중 중에 다른 마법에 영향을 받으면…….”
“이 할아버지는 그 정도로 문제 생길 인물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 넵.”
그래서 난 그를 강제로 타카마 시티로 데려가기로 했다.
이곳에서 그가 집중을 풀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 말이다.
‘트롤 거인들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다. 여길 빠져나가야 해.’
곤륜공사는 너무 위험한 상황.
제아무리 그의 주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이걸 유지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렇게 유메미가 텔레포테이션 마법의 영창을 끝내려던 찰나.
턱.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던 태공망이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뭐야, 깬 겁니까?”
“지금 뭘 하려는 거냐?”
그는 자신의 집중을 방해한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이 호수에서 낚시나 하고 있던 그의 생활패턴을 생각해 보면.
분명 그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을 게 틀림없겠지.
하지만 지금 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특히나 태공망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시바가 죽었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라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