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92화
그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본 목소리였다.
그러나 전혀 낯선 것도 아니었다.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기묘한 느낌.
턱.
“넌 누구지?”
난 내 발목을 붙잡은 그 트롤의 잘린 손을 낚아채며 그것에게 물었다.
이 신체 조각이 그 목소리의 실체와 연결해 주는 통로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말해!”
하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묘한 느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유메미가 당황한 듯 내게 물었다.
다른 용기사들도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잘린 손을 붙잡고 말을 거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지사.
“……아니야.”
그것과는 별개로, 난 더 이상 그 목소리와 접촉할 수 없었다.
트롤의 손은 차갑게 굳어,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건 분명…….’
다시금 이전의 그 기분 나쁜 경험이 떠오른다.
자신을 시바로 사칭하며, 내게 자신의 의지를 따를 것을 종용하던 기괴한 죽음의 덩어리.
방금 내게 말을 걸어 왔던 목소리는 그 죽음의 덩어리와 비슷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와 거기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크게 다를 뿐.
‘같은 부류인 건가. 그 녀석과.’
어쨌든 지금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방에서 우릴 향해 달려오는 무수히 많은 거인들의 행렬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여길 피하자.”
“어디로 움직이죠?”
“좌측.”
난 손가락을 펼쳐 곤륜공사의 한 구획을 가리켰다.
그곳은 이 폐허 속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곳이었다.
“저기엔 트롤들이 더 많이 있을 텐데요?”
“그래서 그쪽으로 가는 거야. 시가지 안으로 들어가면 놈들도 우릴 쉽게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저 대규모의 거인 무리들이 좁은 시가지 안에서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날렵하다고 해봤자, 그 큰 덩치가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주변 건물들이 마구 무너지고 말겠지.
얼마 남지도 않은 자신들의 살 곳을 그런 식으로 파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쪽으로 우회해서 돌아 들어가면 돼.”
태공망이 있는 곳은 저 너머.
저 다가오는 대규모 거인 행렬이 지나가기만 하면, 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들의 해법을 그에게서 찾아낼 작정이다.
시바에 관한 것은 물론이고, 방금 내게 말을 걸어 왔던 목소리의 정체도.
모두 그와 연결되어 있다.
* * *
타닥, 타닥.
드럼통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에서 불똥들이 떠오른다.
그 드럼통 주변으로는 누더기를 걸친 말라비틀어진 트롤들이 온기를 쬐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어두운 것을 넘어 생기 자체가 없어 보인다.
거인을 피하기 위해 돌아 들어온 시가지의 풍경은, 모두가 하나같이 이와 같았다.
“도시 전체가 슬럼화한 것 같아요.”
“그것보다 더 암울하군.”
유메미는 그걸 단순히 슬럼화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건 그 이상이었다.
이곳의 트롤들은 빈민 같은 게 아니라, 말하자면…… 죽은 자들.
니플헤임과 인페르노에서 봤던, 망자들의 마을과 같은 느낌인 것이다.
사실 그곳도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규칙하에서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여긴 그런 규칙조차도 무너지고 있었다.
“으, 냄새…….”
유메미가 코를 부여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이었다.
그 냄새는 그녀보다도 내가 먼저 맡은 냄새였다.
“이거 시체 썩는 냄새 같은데…….”
“그냥 지나가.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왜, 왜죠?”
“안 보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야.”
난 그녀가 냄새의 진원지의 광경을 마력 감지로 느끼려 하는 것을 보고, 그러지 못하도록 만류했다.
그 광경은 내가 보기에도 역겨울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으적. 으적. 철퍽.
지나가는 길옆으로 끔찍한 소리가 들려온다.
다수의 트롤들이 한곳에 몰려서 열심히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눈이 보이는 용기사들은 하나같이 그걸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지옥이군. 여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동족을 잡아먹는 행위를 하는 경우는 지구의 역사에도 가끔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저기서 일어나는 일은 단순히 식인 같은 게 아니었다.
도무지 말로 형용하는 것조차 더럽고 역겹게 느껴지는 온갖 행위들이 길거리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광기에 오염된 악귀들이 트롤들의 몸에 씐 것만 같았다.
기분 나쁜 파멸이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도 정상이 아니군.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겠어.’
다가오는 거인 무리를 피하기 위해 시가지에 들어온다는 발상은 틀려 버렸다.
애초에 여긴 저들이 ‘지킬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미친 트롤들을 자신들의 국민이라며 품어줄 집단은 없겠지.
“날아서 빠르게 돌파하자. 목적지는 저쪽이다.”
난 그래서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서 최대한 빨리 목표인 태공망을 향해 날아가는 걸 택했다.
그나마 높게 솟아 있는 빌딩들이 우리가 뿜어내는 별 불꽃의 열기를 가려줄 것이다.
화륵.
모든 용기사들의 몸에 흑청색 화염이 휘감기고, 별 불꽃의 날개가 어깨 양옆으로 펼쳐지며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건물들 사이로 가속하며 전방으로 날아들었다.
쿵. 쿵.
저 멀리서 작게 들리는 진동음이 이쪽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이 활공 가속으로 인해 거인들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이른 타이밍.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와서 숨는 것이 무의미하기도 하거니와, 이쯤이면 거리가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콰우우우!
그렇게 시가지 바깥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한달음에 태공망이 있는 곳까지 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래쪽에, 그가 평소에 낚시를 하던 인공 호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김없이 흙바닥에 앉아 있는 태공망이 있었다.
다만 평소와는 달리 물에 낚싯줄을 담그고 있지 않았고, 눈을 감은 채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집중을 깨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대로 그를 낚아챈다!’
난 그런 그를 먹이를 사냥하는 맹금류처럼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날아들어 단번에 낚아챌 생각이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멈칫하다간, 우측에서 다가오는 대규모 거인 무리에 의해 둘러싸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고 속도를 높이며 급강하하던 그 순간.
‘신우 씨! 위에서!’
유메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차마 뒷말을 끝내지 못할 만큼 짧은, 찰나의 시간.
후우웅.
위로부터 거대한 바람의 압력이 급강하하는 내 뒤꽁무니를 쫓아와, 마치 찍어누르는 듯 강하게 내리꽂혔다.
마치 신의 사도가 소환되기라도 한 듯.
어떠한 징조도 없이.
하늘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그가 나타난 것이다.
신장 50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인 라르스가 말이다.
쿠우우웅!
* * *
그가 착지하는 순간은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지각이 뒤집어져 하늘로 치솟고, 강렬한 흙먼지가 시야를 가득 뒤덮을 정도의 충격.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트롤 거인들보다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신장에, 체질량은 그 크기 차이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높은 것 같았다.
도심의 잔해 같은 것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거대한 크레이터를 바닥에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부스럭.
“큭.”
나는 몸을 뒤덮은 흙더미를 헤치며 땅 위로 올라왔다.
충돌하기 직전, 급격한 회피 동작으로 다행히 놈이 내 머리 위를 덮치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충격파에 튕겨 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라르스…… 저 녀석도 거인이 된 건가?’
땅 위로 올라온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덩치를 올려다봤다.
그는 이전까지 만났던 트롤 거인들과는 달리 맨손이 아닌 한 손에 도끼를 든 모습이었다.
원래 자신이 사용하던 무구와 함께 그대로 거인화한 것이다.
“인가아아안!”
퍼엉!
“윽!”
그의 맹렬한 포효가 천지에 울렸다.
단순히 크게 울린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데미지를 가할 정도의 충격파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덕분에 흙을 털고 일어난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튕겨 나가야만 했다.
쿵! 쿵! 쿵!
물론 그렇게 계속 핀볼처럼 이리저리 튕기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반대쪽에서는 나를 지근거리까지 쫓아온 거인 무리들이 큰 보폭으로 내달려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 부딪쳐야 해!’
이제 우회 접근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최대한 전력을 가다듬고 거인들에게 맞설 방안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다.
{마검 파슈파타 소환}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흑화륜’ 전개}
나는 가장 앞에서 다가오는 거인을 일검에 파쇄할 작정으로 전력전개를 펼쳤다.
여기서 용격을 아껴봤자, 그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짓일 뿐이다.
더욱이 지금은 유메미를 비롯한 용기사들이 아까의 충격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
그들을 한곳으로 모아 화력을 집중하려면, 과감하게 움직여서 나 혼자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한다.
콰우우우!
별 불꽃을 두른 칼날과 함께 회전하며 돌진한다.
용맹하게 뛰어오던 거인은 갑자기 펼쳐진 고위력의 검술에 당황한 듯 양손으로 가드를 올렸지만.
쩌억!
난 흑화륜의 타격 범위를 최대한 축소시켜, 그 가드 사이로 파고들며 놈의 머리통을 그대로 쪼개 버렸다.
거인은 얼굴의 위쪽 3분의 2가 통째로 잿더미가 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할 만하다. 이 정도면.’
하나를 베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다.
용격의 화력을 굳이 넓게 펼칠 필요 없이, 약점을 핀포인트로 타격하는 방식으로 집중시키면 몸에 걸리는 부담도 줄어든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적은 피격 범위가 넓은 거체이기 때문에 기술을 그렇게 쓰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이걸로 한꺼번에 끝낸다!’
나는 칼자루를 고쳐잡고서 날개를 펼치며 다른 용기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유메미를 가장 먼저 구원할 생각이었다.
화륵.
파슈파타에서 흑청염이 피어오른다.
신기일섬, 만월청영, 금강염사.
차례로 세 가지의 강격을 퍼부으며 거인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크오오오! 거기냐!”
불청객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용케도 이 넓은 전장에서 나를 발견한 라르스가, 넓은 보폭으로 한달음에 이쪽까지 도달했다.
‘젠장!’
퍼엉!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먼저 몸을 강타하고, 뒤이어 도끼날이 덮쳐온다.
저 거대한 덩치라면, 고속으로 움직이는 나를 내리치는 게 마치 도끼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가르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라르스의 도끼날은 이상하리만치 정확하게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내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궤도로 날아들었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결국 난 피하는 대신 막아내는 쪽을 택했다.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만월청영’ 전개}
{17연}
찰나의 순간에 연달아 열일곱 번의 용격을 일점 집중시키는 극한의 연격으로.
별의 불꽃이 육체를 회복시킬 새도 없이,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통증을 참아내면서 말이다.
{의지가 붕괴한다.}
{심연이 의지를 잠식한다.}
그 대가로 나는 심상세계 속에서 악의의 오른쪽 눈에 담긴 심연과 마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