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89화
파멸의 불꽃이 붉은 세계를 뒤덮었다.
어떤 공격으로도 작은 손상조차 입지 않던 수많은 구조물들이 집어 삼켜져 잿불로 화하고.
전신에 기묘한 살덩이를 두르고서 자신만만하게 다가오던 칼리는 불꽃에 닿기 직전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불꽃에 휩싸인 건 나 역시 마찬가지.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나의 죽음을 대가로 파슈파타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눈 뜬 그곳은 시커먼 칠흑으로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불사의 능력으로 이미 모든 게 지워져 버린 세상 위에 되살아난 것일까.
고오오오.
그렇게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나의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둠 때문에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그것은 형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
{마검 파슈파타 소환}
난 관성처럼 그것을 베기 위해 검을 빼 들었다.
칼리의 세계에서 봤던 것과 같은 종류의 적들이 다시 여기에 나타난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만월청영’ 전개}
{적사자 검식 파생형 ‘금강염사’ 전개}
피잉. 콰우우!
두 공격이 연달아 앞에 있는 그것에게 날아들었으나.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기는 모두 앞을 통과할 뿐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그래서 난 그 존재에게 명령했다.
보이지 않는 칠흑에 몸을 숨겨 관음하고 있지만 말고, 내 앞에 나타나라고.
내겐 이 앞에 있는 자가 차원의 벽 너머에 숨어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것 때문에 그도, 나도, 서로 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한 판 붙을 거면 덤비고, 아니면 꺼져.”
스르륵.
그러자 칠흑의 장막이 걷히고, 그 너머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모습이 좀 더 명확해졌다.
그건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신체를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 같은, 죽은 자들의 덩어리였다.
“추하군.”
그리고 난 비로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한때 세계를 압제로부터 구하고, 대천세계(大千世界)의 주재신이라 불릴 정도의 존재가 이런 몰골이 되어 있다니.”
파괴신 시바.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너도 결국은 그런 놈이었구나.”
그리고 난 그가 저런 몰골이 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저 덩어리에 달라붙어 있는, 수많은 인간의 시체들은 중심에 있는 핵을 향해 계속해서 에테르를 공급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에테르를 빼앗기고 영혼 없는 빈 육체가 된 인간은, 마치 다 쓴 건전지처럼 밖으로 배출되어 사라진다.
시바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온 것이다.
무수히 많은 필멸자들의 영혼을 착취함으로써 말이다.
“끝내자. 넌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면 안 돼.”
그의 민낯을 마주한 지금, 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과 절망의 원흉이 바로 그라는 사실을.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베어 죽여야 하는 적이 바로 시바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결부 파라슈 소환}
나는 오른손에 검을, 왼손에 도끼를 들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을 뿐인 그는 살의를 품고서 다가오는 나를 마주하고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 비대해진 몸뚱이를 날렵하게 움직여 내게 대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쉬익!
덩어리를 갈라 안쪽에 있는 핵을 제거하기 위해 현월을 날렸다.
파앙!
그러나 현월은 곧 덩어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에 가로막혀 사라졌다.
‘그래. 아무런 방어 장치가 없을 리가 없겠지.’
쉬쉬쉬쉭!
그래서 나는 연달아 다수의 현월을 흩뿌리듯 그 위에 내던졌다.
약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서, 예리한 검기가 연이어 한 점에 적중한다.
끼릭. 끼릭.
그러자 곧 보호막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은 금세 회복되었지만, 난 그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큰 공격을 내다 꽂았다.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용격 만월청영 전개}
파캉!
준비해 두었던 고속의 일참은 마침내 보호막을 갈랐고, 드디어 그 안의 시체 덩어리의 표피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그 순간에도 보호막은 계속해서 수복하고 있었기에 공격의 타이밍은 찰나.
나는 파슈파타의 자루를 두 손으로 고쳐 잡고, 그 균열의 안쪽에 검을 꽂아 넣다시피 들이민 다음, 멸절의 시동주문을 외쳤다.
“프랄라야 파슈파타스트라.”
지이잉.
칼날이 양쪽으로 전개되며 그 안에서 흑청색의 별 불꽃이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이 강렬한 일격이라면 시바를 잡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더욱이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내부 안에서 연쇄 폭발이 회전 방사하는 형태라면.
그 위력은 원래의 것보다 몇 배는 더 커질 것이다.
우우웅.
배를 묵직하게 울리는 진동이 검을 통해 내게 느껴진다.
곧이어 주변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전부 차단되고 귓가엔 먹먹함만이 남았다.
멸절 파슈파타는 소리마저 무로 만드는 파괴의 힘이기에, 거기서 발생하는 폭발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왜지?’
그런데 난 그것으로부터 이상을 느꼈다.
‘왜 내가 죽지 않는 거지?’
멸절 파슈파타를 사용하고도 내게는 약간의 진동만이 느껴졌을 뿐, 어떠한 반동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시바 역시도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저 거대한 덩어리는 파멸의 별 불꽃에 완전히 집어 삼켜지고도, 전혀 상처 입은 기미 없이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 달라붙은 인간들은 계속해서 에테르를 착취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큭!”
콰득.
그렇게 당황하고 있던 와중, 보이지 않는 힘이 내 주변을 감싸는가 싶더니 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치 거인의 손에 붙잡힌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힘이 아니었다.
‘저항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반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별의 불꽃도, 격멸의 업화도, 환란의 빙정도.
그리고 지금까지 얻은 무기들의 프라나도.
마치 시바가 내게 주었던 것들을 되찾아가는 것 같았다.
#292%^&가 당신에게 검을 겨눠야 할 적을 잘못 찾았다고 말합니다.
이윽고 내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받아낸 시바로부터의 전언.
그는 직접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는 대신, 시스템 메시지를 통해 간접적인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이름이 기묘하게 비틀려 있는 게 그의 의도인지, 아니면 그조차 불가피한 현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292%^&가 당신이 없애야 할 진짜 적은 혼돈이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나에게 원론적인 말을 되풀이했다.
태공망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
하지만 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부터가 너무나도 수상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넌 시스템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모양이군.”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역시 아후라 마즈다가 만든 시스템에 개입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태공망도 그렇게 말했고, 그 덕분에 지금 내가 불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게 부여된 그 엿 같은 퀘스트 중 몇 개는, 아니, 어쩌면 그 모두가 이 녀석의 작품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
바로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런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292%^&가 삿된 생각은 그쯤에서 멈추라고 말합니다.
{칼리가 그곳에 나타난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개소리! 하필 나와 가장 가까운 주변인의 몸으로 네 아내 중 하나가 현신을 했는데, 그 말을 믿으라고?”
{그녀는 원래부터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그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당신도 결혼을 해보라고 말합니다.}
“…….”
이딴 게 우주의 명운을 결정할 위치에 존재하는 신?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바는 진지함을 조금도 잃지 않고서 계속 내게 전언을 보냈다.
#292%^&가 지금 겉으로 보이는 이 모습도 혼돈으로부터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기만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혼돈과 함께 타 차원으로 쫓겨난 신들은 이런 형태로 존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은 그걸 피하기 위해 권능으로 가짜 시체들의 덩어리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탓에 지금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존재의 소멸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걸 믿으라고?”
#292%^&가 그렇지 않으면 여태 해왔던 것처럼 당신에게 자신의 힘과 권능을 전해줄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진짜 생명을 착취하며 현상을 유지하기만 해도 되는데, 무엇하러 그런 귀찮은 일을 하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웃기는군. 난 네 말대로 따르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292%^&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자신을 대신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당신이었다고 말합니다.
{필멸자의 몸으로, 온전한 자신만의 힘을 사용해 신에게 가호를 받는 적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 보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먼 옛날, 내가 아흐리만이었던 때를 언급했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나를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하…….”
#292%^&가 자신에게는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겠지만, 당신이 의지를 꺾는 순간 세상은 다시 과거로 회귀할 거라고 말합니다.}
“과거로 회귀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292%^&가 아후라 마즈다가 혼돈과 손을 잡았다고 말합니다.
“아후라 마즈다가?”
처음에 나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는 구세대 신들을 본 세계에서 쫓아낸 신세대 인간 신들 중 하나다.
그러니까, 그는 내 적이기도 하지만 혼돈의 적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혼돈이 돌아온다면 그놈도 압제의 굴레에 갇힐 텐데…… 왜 그런 짓을?”
{그건 혼돈이 그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약속……이라고?”
{적어도 그가 속해 있는 차원계 내에서는 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다는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혼돈은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를 자신의 영역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더라도 운명의 굴레에 오차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대체 얼마나 큰 세상이기에…….”
#292%^&가 당신이 지금껏 봐 온 것은 한낱 우물 위의 하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 이야기를 했다.
신계를 모조리 박살내고 다니던 내가 한낱 우물 안 개구리라니.
{그러니 이젠 허튼 상대에게 검을 겨눌 생각 말고 미래를 내다보라고 말합니다.}
{순수한 당신의 의지로 당신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필멸자들을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시바로부터의 일장연설을 들은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네 말을 따르지.”
#292%^&가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기로.
{당신은 의식 차원 균열의 접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퀘스트 일지가 갱신되었습니다.}
{<악의의 열병> 퀘스트 완료}
{보상을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인한 현상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숨겨진 보상을 얻었습니다.}
난 그 대가로 수많은 보상들을 받았고.
그렇게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눈을 뜨자마자 떠올린 생각은.
‘시바는 이미 영멸했군.’
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