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87화
울컥.
울컥.
바닥에서 누런 진물이 가득 찬 종기가 부풀어 오른다.
꿈틀거리는 검은 촉수는 이따금 그것들을 감싸 조여 안듯이 터뜨리기도 했다.
퍽.
치이익.
그러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 금속 구조물들을 녹였다.
위협적인 것은 비단 그 종기뿐만이 아니라, 바닥 곳곳에 고여 있는 녹색의 웅덩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뱉어내는 수증기가 닿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더 이상 어느 병원 내부, 혹은 다른 건물 안이라고도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아악!
그런 와중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와 내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카앙! 서걱.
나는 거의 본능에 몸을 맡기다시피 반응해 거기에 대응했다.
사선으로 검을 들어 올리며 공격을 튕겨내고, 다시 역방향으로 내려 벤다.
그 칼날을 휘두른 주체의 모습은 보지도 않고서, 그저 감에 맡긴 반격이었다.
털썩.
동강 난 마물의 사체가 바닥에 쓰러지고, 그제야 내 눈에 그것의 형상이 들어왔다.
그건 손발이 칼날로 변한 뒤틀린 나체의 인간이었다.
아후라 마즈다가 만들어내던 마인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크르…….
이어 눈앞에 그와 비슷하면서도, 뒤틀린 양상이 모두 제각각인 수십 체의 마인들이 길목을 가로막았다.
난 그것들에 맞서 힘겹게 칼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참격을 내질렀다.
{적사자 검식 파생형 ‘금강염사’ 전개}
콰우우!
흑청염의 사자가 달려나가며 경로상에 있는 모든 마인들을 휩쓸어 잿더미로 불태웠다.
물론 상당수는 좌우로 흩어지며 그 공격을 피해냈다.
카악!
파팟!
그러고는 다시 방향을 틀어 사방에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각기 손발에 달고 있는 변형된 신체를 내 쪽으로 들이밀면서.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만월청영’ 전개}
피잉! 피잉! 피잉!
난 그런 그들에게 전방위를 커버하는 고속 참격인 만월청영을 연달아 내질렀다.
다가오던 마인들은 그대로 동강 난 시체가 되어 사방에 퍼졌다.
“하아…… 하아…….”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눈앞이 조금씩 캄캄해지며 시야가 좁아진다.
갑자기 들이닥친 현기증이 계속해서 지속된다.
분명 난 별의 불꽃에 내재되어 있는 회복의 힘으로 아무리 큰 부상이라도 금세 치유가 되는 몸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 현기증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몸이 이상하리만치 무거워져 있었다.
‘무너지면 안 돼…….’
거기에 아까부터 갑자기 들이닥치기 시작한 마물들.
분명 환경이 멀쩡할 때까지만 해도 마물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 보였는데.
왜인지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기괴한 모습으로 뒤틀린 후부터는 신체가 뒤틀린 마인들이 끊임없이 나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 하나하나가 대충 상대해서는 받아낼 수 없는 날카로운 공격을 하는 것들로 말이다.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물론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불사의 능력을 얻은 나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 내게 지킬 것들이 있다는 사실.
내가 죽으면 난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부재 상태가 된다.
그러면 당장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유메미가 위험에 빠지는 건 물론이고.
이 영역 어딘가에 잠든 아델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밖에서 죽어나가고 있을 수많은 인간과 드워프 또한 지키지 못하게 되겠지.
그러니 나는 절대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죽더라도 모든 게 끝난 다음에 죽어야 한다.
“……신우 씨.”
그때, 지금껏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던 유메미가 집중을 마치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찾은 건가?”
“네. 찾았어요. 아델 씨의 위치는 아니지만, 거기로 갈 수 있는 열쇠의 위치를요.”
“혼살이꽃 말이군.”
“맞아요.”
다행히 그녀는 이런 위기 상황을 반전시킬 활로를 찾았다.
나는 곧장 그녀가 가르쳐 주는 방향을 따라 혼살이꽃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시야 역시 흐렸지만, 그럼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 * *
우리는 혼살이꽃을 찾아내고, 마침내 아델이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데에 성공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인들을 마주쳤고 그것들의 피를 뒤집어썼지만, 그런 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미로처럼 얽힌 걸로도 모자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공간 안에서, 유메미가 제시하는 길을 우직하게 나아간 끝에.
결국 나는 아델이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문 안이에요. 저 안에 아델 씨가 있을 거예요.”
“수고했다. 이제 우린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이 기괴하게 뒤틀린 공간과 바깥에서 발생하는 마물 소환에 의한 피해도 이걸로 멈출 수 있다.
……라고는 해도, 실은 그 방법도 모르고, 딱히 떠오르는 대책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난 언제나 그렇듯 문제에 직접 대면하면 해답이 보일 거라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덜컥. 콰당.
문은 열려 있다 못해 너덜너덜하게 부서져 있었다.
손을 대자마자 무너지듯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설마…….’
입구부터 상태가 이렇다 보니, 나는 그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벌써 누군가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하지만 애초에 유메미가 혼살이꽃으로 아델의 위치를 찾아냈으니, 그녀가 죽었다면 진작 유메미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 이야긴 없었으니 아델은 당연히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델.”
다행히 생각했던 대로 아델은 죽지 않았다.
다만 회복 캡슐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등을 보인 채로 책상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안쪽에서 강제로 캡슐을 부수고 나온 건지, 기기는 거의 반파되어 있었다.
“너구나. 내 영역을 휘저어 놓고 다니던 녀석이.”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목소리도 이상했다.
아델의 목소리가 아닌 듯한, 어딘가 중성적이면서도 왠지 소름 돋게 만드는 목소리.
“넌…… 누구냐?”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델과는 확실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피부가 회색빛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다크엘프처럼…… 아니, 타라처럼 말이다.
“신우 씨, 이건…….”
당황한 건 유메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분명 혼살이꽃으로 아델의 위치를 찾아냈을 터였다.
그것도 영혼계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유계의 심도’에서 말이다.
거기서 감지한 대상의 영혼에는 당연히 숨길 것 없이 완전한 본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아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뭔가 이상해요. 이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피부색은 물론이고 목소리와 분위기,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마저 아델과는 달랐다.
순수한 악.
어둠에 가까운…… 사방에서 피냄새가 진동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 근데 확실한 건…….”
잿빛 피부색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전신이 사방에서 터져나온 피와 고름으로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고 있던 찢어진 환자복은 녹아내리듯 사라지고 대신 기묘한 검은 갑옷이 둘러졌다.
사실 갑옷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장갑과 신발에 가릴 부위만 간신히 가린,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의상이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아델이 가꿔 놓은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금은 피가 고프다는 거야.”
갑옷 형성이 끝난 후, 피와 고름들은 다시 그녀의 손안에서 뭉쳐져 기다란 검으로 변화했다.
그 검은 마치 동굴의 천장에서 흘러내린 종유석처럼 볼품없이 생겼지만,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기묘한 표면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게 검의 역할을 할 수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신우 씨. 어떻게 하죠?”
“…….”
나는 이제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더 이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가뜩이나 가만히 있는 아델을 만난다 해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 뾰족한 수조차 없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인격이 변화하고 내게 적의까지 비치고 있다.
분명 유메미의 말대로라면 저건 아델이 확실한데.
이대로 지금 그녀와 맞서는 게 옳은 일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세계의 광기가 더욱 심화됩니다.}
그런 와중에 시스템 메시지는 나를 더욱 몰아붙였다.
계속해서 이 주변 환경을 더욱 기괴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바꿔냈다.
울컥. 불룩.
이젠 이곳이 원래 인공적으로 건축한 구조물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온 사방이 독액과 종기, 촉수로 가득 찬 환경이 되었다.
허공을 떠다니는,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정체 불명의 광원들은 내 정신을 갉아먹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머물다간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네 내장부터 가져가는 게 좋겠군!”
파앙!
아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검을 내세우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세는 원래 아델이 구사하던 검술과 완전히 같았다.
몸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모양이었다.
카앙!
나는 파슈파타를 치켜들며 옆으로 스텝을 밟아 그녀의 공격을 흘려내고 거리를 벌렸다.
물론 그렇게 떨어지려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짜증 나게 도망이라도 가려는 거야? 좀 더 제대로 해봐!”
콰웅!
아델이 자세를 낮추고선 내 쪽으로 튀어 나가듯 하단을 노리며 찔러 들어왔다.
난 다시 뒤로 물러나며 찌르기를 피했지만.
촤악!
허공에 떠오른 그녀가 그 상태에서 수직으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날아왔다.
적사자 검식 흑화륜.
다만 원래 아델이 쓰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칼끝에 별의 불꽃 대신 혈액이 서려 있다는 점이었다.
콰콰콰콰콰!
그 피는 회전할 때마다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방울방울 강한 폭발력이 내재되어 있어 사방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인벤토리에서 프리드웬을 꺼낸다.}
이 공격만큼은 어떻게 쳐내거나 흘릴 수가 없었다.
공간이 좁아서 피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난 방어를 위해 방패를 꺼내 들고는, 그 안에 별의 불꽃을 주입해 장막을 펼쳐냈다.
{검은 성운벽 - 카트반가 강화}
퍼펑! 퍼퍼펑!
다행히 그 방법은 맞아떨어졌고, 흑청염의 방벽을 펼쳐내며 폭발하는 피보라를 완벽하게 받아냈다.
아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는 계속 그 위를 두들겼지만, 프리드웬으로 만든 방벽을 뚫지는 못했다.
“계속 그 뒤에서 버티려고? 그건 안 될걸?”
그러자 그녀는 뒤로 물러나더니, 검을 들지 않은 쪽의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질퍽.
그와 동시에 내 뒤쪽에서 불쾌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그건 지금껏 계속 벽을 감싼 채 공격을 흡수해 내던 검은 촉수였다.
쐐액!
난 몸을 비틀어 간신히 등에 있는 유메미가 피격당하는 걸 피했지만.
‘이런!’
쑤욱.
내 겨드랑이 아래로 파고든 그것은 그대로 옆으로 움직여 내 상체를 통째로 갈라 버리려 했다.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저 촉수의 표면에 닿는다면, 절대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리버스 그래비티!”
그 순간,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유메미가 마법 주문을 외쳤다.
언령을 사용한 급속 영창.
마법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상대에게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지 다 알려주는 꼴이라 잘 사용되진 않지만, 집중 시간이 필요 없어 말하는 것만으로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테크닉이었다.
덕분에 나는 위기의 순간 몸이 붕 떠올라 위로 솟구치며 촉수를 피할 수 있었다.
불쑥.
하지만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피한 내 머리 위, 천장에는,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 벌써 아델의 상반신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쥔 검이 내 목으로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가득 서린 칼날이 말이다.
방패를 꺼내기엔 늦었고, 저걸 검으로 막는 건 무용지물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죽기 전에 먼저 베는 것뿐.
‘팔을 자르는 수밖에……!’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만월청영’ 전개}
피잉!
난 하늘에 뜬 채로 아델의 오른팔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 그녀의 살결을 파고든 순간.
{여신 타라의 검이 여신 칼리에게 닿는다.}
쩌엉!
알 수 없는 강한 반발력이 칼끝으로부터 나를 세차게 밀어냈다.
파공음과 함께 뿜어져 나온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나는 곧장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