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75화
그자는 거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네 쌍의 새카만 거미 다리만 제외하면.
과거와는 모습이 꽤 많이 달라져서 외모만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난 그 녀석의 정체를 직감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바알.”
한때 나를 따르며 지상에서 함께 신들과 싸웠던, 대악마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에 속하는 자.
그가 이곳에 돌아와 있었다.
“……앙그라 마이뉴, 오랜만이군.”
바알은 마치 내 등장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지옥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세계.
그 안의 악마들은 함부로 외부에 출입할 수 없다.
심지어 시스템마저 악마는 ‘축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바알이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는가?
‘마르코시아스나 아몬과 같은 케이스인가?’
난 이번에도 시스템의 예외를 이용한 외부 출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극단적인 리스크를 감수하고서 억지로 지옥을 빠져나왔거나.
그게 아니면 잠시 발생한 시스템의 오류를 통해 우연히 균열을 통해 나왔거나.
하지만 다음으로 나온 그의 대답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깬 답이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다.”
“‘그분’?”
“앙그라 마이뉴. 너도 그 지옥에 떨어져 갇힌 악마였으니 알지 않나? 우리가 핍박받아온 세월을.”
“그게 지금 무슨 관계가…….”
“이제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될 차례다. 그분의 인도에 따라, 기존의 신들은 과거의 유물로 남겨지고, 우리 악마들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되는 거다.”
바알의 눈에는 광신이 서려 있었다.
그가 ‘그분’을 칭할 때마다, 그의 눈은 마치 동경하는 우상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문자의 권능을 지닌 솔로몬에 의해 억압받던 그 당시의 악에 받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힘으로 인페르노를 평정하고 솔로몬의 권능을 빼앗아 진짜 지옥의 군주가 되었던 내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런 태도를, 지금 ‘그분’이라는 자를 향해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설마.”
그리고 난 그가 말하는 ‘그분’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네놈, 아후라 마즈다의 개가 된 거냐?”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바알은 내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방금 전까지 함께하자며 드러냈던 우호적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자신을 ‘개’라고 깎아내린 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한심하군……. 그 고고하던 지옥 최고의 악마 군단장이 이런 모습이라니.”
“과거는 무의미한 허상이다.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뿐.”
그는 마치 광신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지옥의 수많은 대악마들이 정신적 지주처럼 따르는 바알이 내 적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너희를 핍박하고 지옥에 가둬버린 게 바로 그 아후라 마즈다다. 그 많은 신들은 한낱 동조자에 불과했고, 그들이 그런 짓을 하도록 선동하며 하나로 뭉치게 한 자가 그 녀석이란 말이다.”
신세대 신들 사이에서 아후라 마즈다의 입지는 바알과 유사했다.
물론 대놓고 앞에 나서며 우두머리 행세를 하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을 창조한 장본인이라는 것과 그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난 이 사실을 까발림으로써 바알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그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가? 그렇다면 더 신뢰가 가는군.”
“뭐?”
“아직도 모르겠나? 세상을 주도하던 신들의 우두머리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기회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확실하게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거다.”
바알은 내 말을 듣고서 더욱 자신의 광신을 합리화했다.
“앙그라 마이뉴. 너도 시답잖은 과거의 악연 따위에 연연하지 마라. 현실을 보아라. 그분을 따른다면 우린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 있다.”
“바알……. 많이 변했군.”
“뭐가 말이지? 난 그대로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잘못 본 거고.”
{마검 파슈파타를 소환한다.}
나는 검을 들었다.
더 이상 바알과 말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젠 힘으로 결판을 내야 할 때.
‘모든 악마가 적이 된다……. 머리가 아프군.’
칼자루를 쥔 손이 무겁다.
바알의 말을 듣고서, 슬슬 아후라 마즈다의 계획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수호령으로서 시스템이 봉인된 신들이 아니라,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지옥의 악마들을 이 세상의 지배계층으로 만들려는 그의 계획.
수호령의 신격을 깨워 각성자들을 신으로 대체하려던 목적은 모종의 이유로 폐기한 모양이었다.
그 대신 지옥에 갇혀 있는, ‘쫓겨난 신’들을 다시 복귀시키려 하고 있다.
‘펜리르가 니플헤임에서 오래전부터 침공 준비를 했던 것도…… 역시 아후라 마즈다의 영향이겠지.’
부활한 ‘예루살렘 제국’은 바로 그 악마들의 나라.
이제 내 적은 모든 신들에 더해 모든 악마들까지 포함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수라도(修羅道)의 위에서 보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앙그라 마이뉴.”
바알은 나를 상대로 접어 두었던 등 뒤의 거미 다리를 펼쳤다.
그걸로 나를 상대하려는 듯했다.
“인간형인 채로 내게 맞서려고? 본 모습을 드러내도 감당이 안 될 텐데.”
“그건 직접 봐야 알겠지.”
“그럼.”
{달 그림자 검식 파생형, ‘용격 만월청영’ 전개.}
나는 곧바로 그의 정면에서 최강의 공격을 펼쳤다.
* * *
앞뒤 잴 것도 없이, 원월을 가르는 일참으로 시작하는 선공.
피잉.
원을 그리는 칼날의 궤적과 그 가운데를 베는 동작이 동시에 행해지기에, 눈으로는 그것을 절대 읽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어느 타이밍에 어느 방향으로 참격이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는 막아내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콰아앙!
내 참격과 방어 태세를 취한 바알의 거미 다리가 부딪히자, 고강도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파동은 좁은 던전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을 정도.
쿠쿵! 쿠구구궁!
동굴이 무너지며 마인병을 생산하던 대형 촉수 마물이 잔해 속에 깔려버렸다.
덕분에 그 마물에 의해 빈 껍데기만 남아 죽지도 못한 채 고통받던 인간들은 비로소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잔해에 파묻힌 건 나나 바알 역시 마찬가지.
쿠르륵.
그때, 암흑 속에서 돌과 바위들이 파헤쳐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키이잉!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내가 있는 자리로 공격이 쇄도해 왔다.
바위를 모조리 깨부수며 날아드는 참격.
카앙!
난 그 자리에서 검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을 흘려냈다.
파파팟!
흙더미 속이라 어두컴컴했지만, 무수한 돌들이 부딪히며 터지는 스파크가 순간순간 주변을 비췄다.
그 불빛으로 인해 지금 내게 휘둘러 온 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검?’
그건 검날이었다.
바알의 등 뒤에 돋아나 있는 거미 다리의 발톱도 아니고, 길쭉하게 번쩍이는 금속 칼날.
키이잉!
이어서 또 다른 참격이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이번엔 방금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틀어 뒤로 물러났다.
흙과 돌더미 속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내 움직임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대신 시야가 차단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기서 다시 한번 방향을 틀어 하늘로 뛰어올랐다.
퍼엉! 화륵!
곧이어 별 불꽃 날개를 펼치며 고속 상승.
그러고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펑!
바알 역시 땅속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라 나를 쫓아오는 게 보였다.
‘검을 저렇게나 많이?’
추격해 오는 그의 손에는 10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손과 여덟 개의 거미 다리에 각각 한 자루씩.
예전의 강력한 군단 지휘 능력과 마법으로 적을 압도하던 바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투 방식을 채택한 모습이었다.
“검을 쥐었으면 가까이 오거라!”
슈하아악!
그는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와 그 10자루의 검을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그 참격 하나하나가 발산해내는 풍압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지만, 바알은 그보다도 초근접 거리에서의 직접적인 타격을 노렸다.
완전한 인파이팅 스타일의 검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인간 형태를 고수한 건가?’
인간형을 유지하더라도 반인반수에 더 가까웠던 과거의 악마들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등 뒤의 거미 다리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완벽한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까 전 마인병들 역시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라 인간 각성자처럼 싸웠는데.
지금 바알 역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살아 있는 인간이 마인병의 재료로 쓰이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난 그런 결론을 내린 채, 눈앞의 적인 바알에 맞서는 데에 더욱 집중했다.
카카카카캉!
상대가 10개의 팔로 휘두르는 10자루의 검을 나는 단 한 자루의 검으로 모두 막아내야 했다.
거리를 두며 뒤로 빠지려 해도, 바알은 더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공중에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아델이 쓰는 것과 같은 허공 박차기를 시전하면서 말이다.
‘계속해서 막기만 하는 건 무의미하다. 반격을 해야 해.’
이대로 뒤로 물러서기만을 반복해 봐야,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대응을 바꿔야 할 때.
어차피 바알의 근접 공격이 매섭다고는 해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난 불사자이기 때문이다.
‘뼈를 주고 뼈를 취한다.’
동귀어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바알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되면 내 승리다.
터엉!
허공에서 뒤로 물러나다,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꿔 앞으로 튀어 나간다.
쇄도해 오는 무수한 칼날의 참격을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다.
{적사자 검식 파생형 ‘용격 흑화륜’ 전개.}
몸을 웅크린 채 칼끝에 무게중심을 집중한 다음, 흑청색 용염을 두르고서 차륜처럼 회전하며 날아든다.
“타아아앗!”
그에 대응해 바알은 기합을 내지르며 흑화륜의 약점인 측면을 공략했다.
두 손은 앞으로 내밀어 공격을 막고, 나머지 여덟 개의 거미 다리로는 양쪽에서 감싸듯 나를 찌르려는 속셈이다.
콰콰콰콰콰콰콰!
바알의 검과 내 검이 연달아 부딪히며 사방으로 불꽃과 파동을 발산했다.
물론 흑화륜의 위력은 강한 연속 참격도 있지만 그에 수반되는 화염의 비중 역시 무시할 수 없기에, 저렇게 대놓고 막아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바알의 양팔은 별 불꽃에 의해 급속히 타들어 가 안쪽의 뼈를 드러낼 정도가 되었다.
카가가각!
물론 나 역시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하기만 한 건 아니다.
수직으로 회전하는 내 양옆으로 바알의 거미 다리에 달린 칼날이 밀고 들어온 탓에, 내 몸은 마치 믹서기처럼 그 칼날에 갈려 나갔다.
아마도 정면에서 맞선 건 이걸 노린 거겠지.
덕분에 모든 공격이 끝나고 난 후엔, 내 전신이 피범벅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터엉!
“하아…… 하아…….”
나와 바알은 그대로 지상에 추락했다.
한쪽은 고온의 화염에 불태워져 사지가 잿더미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피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많은 자상을 입은 채였다.
“네놈…… 그건…… 도대체…….”
물론 바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치명타를 입히면 자신이 이긴다고 생각했겠지.
과거 앙그라 마이뉴였던 나는 신은 죽일 수 있어도 악마는 죽일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불멸자인 자신과 지금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동귀어진을 하면, 무한히 되살아날 수 있는 그가 이긴다고 판단했을 터다.
하지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그의 생각은 전부 틀렸다.
지금의 나는 길가메시로부터 불사의 육신을 얻은 몸이었고.
{인페르노의 군주 바알을 처형한다.}
왼손에는 파라슈가 쥐어져 있었으니.
“잘……가라…….”
털썩.
내 죽음은 일시적이고, 그의 죽음은 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