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65화
도시 전체가 거의 붕괴되어 가는 와중, 간신히 생존자들을 모으고 상황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라르스.
그는 사실상 현시점에서 트롤들을 실질적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리더나 다름없었다.
“위치를 찾았습니다. 제8구역 공통상업빌딩 55층입니다.”
“정말 그 인간 여자가 맞았나?”
“그렇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전술적으로 움직여 현 사태의 원흉이 유메미라는 걸 밝혀냈다.
게다가 현재 그녀가 머물고 있는 위치까지 파악하는, 큰 성과까지 얻었다.
“그런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르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진심으로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 인간들이, 갑자기 돌변해 도시 내에서 이런 큰 사건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외부인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자신의 행위 자체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된 건 아닐까.
무수한 트롤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무력부장님,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보좌관, 담딘이 그를 위로했다.
“결국에는 그자들이 일으킨 사고일 뿐이니 말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통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게다가 지금은 무력부장님이 트롤들을 이끌고 갈 유일한 지도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무력부장님이 앞서서 향후의 트롤들의 행방을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다들 마음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말.
라르스가 곤륜공사의 실질적인 1인자가 되었음을 담딘이 천명한 셈이었다.
그동안은 트롤들의 정신적 지주인 테무르만이 유일한 일인자로 군림해왔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모든 고위 간부들 사이의 암묵적 약속이었는데.
지금은 그 금기가 깨져 버린 것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라르스 역시 그걸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몸담은 집단의 부흥을 우선시하는 그의 입장에선, 지금에 와서 그런 암묵적 규칙을 고수하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잡고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인간 여자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겠지.”
첫 번째 목표는 바로 유메미를 죽이는 것.
이미 그녀가 트롤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도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죽은 동족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처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현재 그녀의 정체성이 본인이 아닌 바리공주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으니, 그건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있는 곳에 접근하는 건 지금으로선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제 문제는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하느냐였다.
담딘은 가장 중요한 난점을 언급했다.
“반경 십 킬로미터가 넘는 지역 전체가 그 정신 공격의 영향력하에 있습니다. 어지간한 병력은 그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미쳐버리고, 정신력이 강한 자라도 일정 영역 이내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도 느꼈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담딘과 라르스, 둘 다 유메미가 펼친 원귀들의 영역을 지나갔었다.
그 둘은 모두 높은 무력을 가진 자들이었기에 빙의하려는 원귀들로부터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음을 느낀 것이다.
즉, 지금으로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유메미와 직접 대면해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죽이는 것…….”
그래서 라르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유메미를 살해할 방법을 떠올렸다.
“……역시 저격이겠지.”
라르스가 그 말을 내뱉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격을 한다면 어떤 무기를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담딘이 자신의 오른손에 둘린 팔찌를 보이며 말했다.
“제 건곤권(乾坤圈)을 사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팔찌의 정체는 바로 담딘의 수호령인 나타의 주력 투영무구의 매개.
고리 모양의 투척무기인 권(圈)에 마력을 담아 자유자재로 날게 하는, 간단하면서도 직관적인 무기였다.
“이거라면 적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각에서도 맞출 수 있습니다.”
“건곤권? 물론 명중 측면에서는 어떤 무기보다 좋겠지만…… 문제는 화력이 부족하지 않겠나?”
라르스는 의구심을 표했다.
그건 담딘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의 투영무구인 건곤권의 성질 때문이었다.
건곤권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초장거리 저격 수단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목표물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다 하더라도 정신이 멀쩡한 채로 버틸 수 있는 거리는 거의 3킬로미터가 넘으니……. 맞춘다 한들 상대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화력은 다른 방법으로 보충하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라면?”
담딘이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위치한 것은 기다란 포신을 자랑하는 대형 화포.
레일건이었다.
“건곤권을 탄자로 사용해 발사하는 겁니다. 궤도는 제가 수정할 수 있으니, 백 퍼센트의 명중률이 보장되는 저격이 가능해집니다.”
“……그래, 그거군.”
라르스는 나타가 떠올린 발상에 감탄했다.
단 한 번의 저격으로 유메미를 끝장내야 하는 상황.
실패한다면, 그녀가 더 강한 수비를 시도하게 만드는 최악의 전개가 펼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건곤권을 탄자로 사용하면 그의 말대로 확실한 명중률이 보장된다.
거기에 레일건의 화력을 온전하게 담을 수 있으니, 가장 좋은 선택인 셈이다.
“좋아. 지금 당장 준비하자.”
“예.”
라르스는 담딘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장 유메미를 저격하기 위한 작전의 실행을 지시했다.
* * *
레일건을 가동하려면 많은 양의 전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통은 고정 포대에 부착시켜 도시의 전력 설비와 직접 연결해 사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지금처럼 도시 통제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선 그게 불가능했다.
결국 따로 외부 동력원을 끌어모아야만 했고, 라르스는 작동 가능한 모든 차량과 대형 장비로부터 마력발생기를 모조리 수거해 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잠깐, 무력부장.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왜 차량의 엔진을 멋대로 분리하는 건가?”
그러자 그에 대해 고위 간부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자기 소유의 차량에 손을 댔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상황이 시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잠시만 협조해 주십시오. 이 일만 성공하면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돌아올 테니.”
“그게 무슨……! 설마, 저 귀신들과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전부 없앨 겁니다.”
라르스는 그런 그들을 최대한 신사적으로 대우했다.
원래도 실질 권력은 자신이 더 컸고, 지금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았으니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고위 간부들은 그런 배려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라르스의 지시에 불만을 가질 뿐이었다.
“정말로 저것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저런 비현실적인 적을 상대로?”
“방법을 찾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허어.”
그 간부는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라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중요한 비밀이라도 얘기하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봐, 무력부장.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고.”
“뭘 말씀이십니까?”
“제대로 된 병법가라면, 승산이 없는 싸움에선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지금 도시를 포기하고 도주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라르스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고위 간부는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그게 아니라! 지금은 물러났다가, 재정비를 하고 제대로 된 전력을 이끌고 도시를 되찾자는 거지.”
“여기서 우리가 대체 어디로 물러난단 말입니까? 바깥엔 마물들이 득실거리는데.”
“그건 당연히…… 다른 세력이지.”
“거기까지 이 많은 인원들을 무슨 수로…….”
“아니, 이 사람아!”
간부는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작게 얘기했다.
“중요한 사람들만 일단 살자는 거야, 중요한 사람들만.”
“중요한 사람들……?”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리더들이 살아남아야지. 지금은 우리끼리 잠시 피신했다가, 지원을 받아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그러면 곤륜공사는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결국엔 이 많은 병사와 민간인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도망치겠다는 소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던 라르스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조용히 들어가서 쉬시죠.”
“……하아.”
그는 결국 고위 간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 등신 같은 게.”
뒤에서 그의 신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지금, 굳이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 * *
우우우웅.
지면으로부터 몇십 센티미터 정도 떠올라 부양하며 이동하는 호버크래프트가 특유의 소음을 내며 빠르게 길 위를 내달렸다.
물론 그 소음은 바퀴로 달리는 차량보다는 훨씬 작았기에 주변의 주의를 그리 많이 끌지는 않았다.
“크으……으…….”
차량으로 이동하던 도중, 앞에서 원귀에 지배당하는 트롤들 몇몇이 차량 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총기가 쥐어져 있었다.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는 손대지 마.”
“하지만…….”
“책임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라르스는 양손 도끼를 손에 쥐고 호버크래프트에서 뛰어내려 앞에 있는 트롤들에게 달려들었다.
철컥!
원귀에 집어 삼켜진 트롤들은 본능에 따라 손에 쥔 총기의 방아쇠를 당겼고, 안쪽의 격발 장치가 작동했지만.
서걱!
마력탄이 발사되지는 못했다.
그전에 라르스의 도끼가 그 총들을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푸확! 푸확!
동시에 그 총을 사용하려던 트롤들의 머리 역시 잘려나갔다.
깔끔하게 베어진 목에선 피가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쓰러졌다.
“……가자.”
한때는 자기 밑에서 싸웠을 병사들의 피를 뒤집어쓴 라르스.
그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린 맛을 뒤로하고서, 다시 호버크래프트에 탑승했다.
타탕! 타타탕!
이따금 건물 사이에서 사격음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누군가가 죽어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늦으면 늦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우린 최대한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해야 해.”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최대한 전투를 피하며, 레일건으로 유메미를 맞출 수 있는 유효 사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
물론 그 와중에도 희생은 피할 수 없었지만, 라르스는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끝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더 많은 트롤들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착했습니다.”
“레일건을 설치해.”
“예.”
어느새 저격 포인트에 도달한 라르스 일행은, 운반해 온 레일건을 건물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고층에 설치했다.
1층에 정차한 마력발생기를 가득 담은 호버크래프트와 15층에 설치된 레일건 사이를 잇는 케이블이 연결되고.
담딘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에 건곤권을 투영하고서 포신의 후미에 집어넣어 장전시켰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목표 확인.”
라르스는 망원경으로 목표인 유메미의 위치를 확인했다.
탄자를 발사하고, 담딘이 궤도를 조정해 그녀의 머리를 관통하기만 하면 끝.
곤륜공사에서 벌어진 이번의 비극은 그렇게 종결되는 것이다.
“사격 준…….”
그렇게 라르스가 지시를 내리려던 찰나.
“당신들은……?”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라이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