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63화
{악의의 오른쪽 눈이 비밀을 꿰뚫어 본다.}
테무르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그걸 보자마자 곧바로 특성을 발동시켰다.
{특성 <악의의 오른쪽 눈> 발동}
{구세대 불멸자들과 가장 많은 접점을 가진 신.}
{그자로부터 별의 불꽃을 얻어내라.}
악의가 지칭하는 대상은 물론 테무르가 가지고 있는 저 수호령, ‘태공망’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구세대 신……. 시바와 관련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이 비밀은 지금 에테르에 손상을 입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비밀이었다.
내 힘의 근원과도 같은 파괴신 시바의 ‘별 불꽃’을 얻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목숨을 소진해 존재를 지우는 일격의 검, 멸절 파슈파타의 기반을 이루는, 바로 그 에너지 말이다.
‘그 외에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는 건가?’
다만 악의의 오른쪽 눈이 가르쳐 준 이 비밀이 평소와는 달리 너무 모호하다는 게 문제였다.
이전 같았으면 정확하게 어떤 행동을 하라고 지침을 내려줬겠지만.
이번엔 그저 ‘테무르로부터 별의 불꽃을 얻으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행동만을 요구할 뿐이었다.
‘우선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그자에게 접근해 스스로 정보를 알아내는 것.
나는 아지다하카의 고도를 더욱 낮춰 아래의 호수 표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르신.”
난 그 늙은 트롤에게 나름대로 예의를 갖췄다.
이미 태공망이라는 수호령을 통해 그의 정체가 곤륜공사의 수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별 불꽃 습득의 단초가 될 인물이다.
그러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했다.
“여긴 위험합니다. 다른 곳으로 피신하시죠.”
“…….”
그런데 그는 내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낚시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이 거대한 용을 타고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나를 못 봤을 리도 없고, 신화급 각성자의 육체를 가진 자가 노환으로 귀를 먹었을 리도 없는데도 말이다.
“어르신!”
그래서 난 더욱 큰 목소리로 그자를 불렀다.
“쯧.”
그러자 그제야 그에게서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고기가 다 도망갔구먼.”
“지금 낚시를 하고 있을 때가…….”
그에게 대꾸를 하던 나는 말을 하던 도중에 말문이 막혔다.
하고 있는 행색을 보아하니, 낚시를 한다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무르는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않고, 그저 허름한 낚싯대 하나만을 손에 든 채 낚시를 하고 있다.
미끼나 여분의 낚싯줄, 물고기를 담을 바구니 같은 자잘한 도구들도 없이 말이다.
그런 걸로 물고기를 낚겠다고 하고 있으니, 잡은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는 게 당연지사.
“……어차피 아무것도 못 낚으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날 무시하는 겐가?”
“그게 아니라……. 아무튼 여긴 위험하니 일단 다른 곳으로 가시죠.”
뭐가 어쨌든 간에 난 그를 우선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가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여기에 있으면 원귀에 씐 주변의 트롤들이 성가시게 굴 가능성도 높을뿐더러.
무엇보다 지금쯤 정신을 차린 바리공주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으려 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따르는 원귀가 이 근방에 가득하게 뒤덮여 있는 이상, 내 위치에 대한 정보는 분명히 바리공주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위험하긴 뭐가 위험하다는 거냐?”
그런데 테무르는 내 말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지금 이 귀신들 때문에?”
“물론…….”
그는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조그만 철 곤봉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주변의 원귀가 눈에 보이는 건가?’
내게도 그것들의 존재가 느껴지긴 한다.
영혼의 흔적을 느끼는 것 정도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는 없었다.
바리공주의 영체 공격을 무방비로 얻어맞은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들, 영혼에 직접 간섭하는 건 단순한 힘의 크기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놈의 새끼들이!”
파앙!
그가 손에 쥔 곤봉을 휘두르자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허공에서 바람이 퍼져 나왔다.
그 순간, 이 근처를 맴돌던 원귀 무리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음……?’
“이것들이 어딜 싸가지없게 어른한테 손을 대려고 말이야. 지금 당장 지옥으로 갈 수 있게 성불시켜 줄까? 엉?”
그러더니 급기야는 허공에 대고 호통까지 쳤다.
그러자 이 근방에서 원귀의 기운이 마치 지역을 통째로 정화시킨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귀신들이 그의 협박을 듣고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도망친 것이다.
‘저건…….’
난 그가 사용한 무기의 정보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악의의 오른쪽 눈 특성을 사용했다.
{매개무구: 미디라이트강 철편}
손에 들고 있는 곤봉은 특수 합금으로 제조한 평범한 타격무기.
하지만 특별한 것은 그 위에 씐 투영무구였다.
{투영무구: 타신편(打神鞭)}
말 그대로 귀신(神)을 때리는(打) 철편(鞭).
즉, 영혼에 직접 타격을 주는 무기인 셈이다.
현시점, 누구도 막지 못하는 원귀를 휘두르는 바리공주의 직접적인 카운터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잠깐, 저거라면……!’
그걸 알게 되자, 내 머릿속엔 퍼뜩,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유메미의 몸에 빙의한 바리공주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낸 열쇠.
진작 이자를 만났다면 좋았을 테지만, 어쨌든 방법을 알아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설령 또다시 시스템의 방해로 인해 바리공주를 영구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당장 그녀의 폭압을 막을 수 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유메미를 되돌려 놓는 건 그 후에 생각하면 될 일.
“어르신. 아니, 테무르 주석.”
난 곧바로 그의 진짜 신분에 대해 말을 꺼냈다.
할 일 없이 낚시나 하고 있는 노인처럼 위장한 그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음? 나를 알고 있는 건가?”
역시나 그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입니다.”
“허허. 별일이 다 있군. 나를 알아보는 자가 같은 트롤도 아닌 인간이라니. 외부에 나로 알려진 인물은 내가 아니라 다른 자일 텐데.”
‘잠깐, 그러고 보니…….’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이 트롤의 얼굴과 실제 ‘테무르’라 알려져 있는 자의 얼굴이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이대는 비슷하지만, 이쪽이 훨씬 더 왜소하고 비루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주석으로 알려진 자는 그보다 훨씬 더 강건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단순히 지도자의 얼굴을 더 위엄 있어 보이게 사진을 조작한 것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이자의 말대로라면 아예 다른 인물이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어쨌든…….”
물론 지금은 그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간에, 주석께서 이곳 곤륜공사의 지도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흐음.”
“보시다시피, 저 원귀들은 도시 곳곳에 퍼져 무고한 트롤들을 희생시키고 있고, 그걸 멈추려면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목적은 하나다.
바리공주를 막는 것.
그건 나뿐만 아니라 트롤들 역시 바라는 일이다.
다만 나로서는 유메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둬야 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여기서 만약 타신편을 가진 테무르를 직접 움직인다면, 그 부분에서 우리는 충분히 서로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
난 그걸 기대하고 그를 설득했다.
“글쎄.”
그러나 테무르의 입장은 다른 모양이었다.
“내가 진짜 테무르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주석인 건 아니네만.”
“그게 무슨……?”
“나는 진작 속세를 떠났다네. 내겐 더 이상 수장으로서의 책임이 없다는 뜻일세.”
“예?”
“난 그저 여기서 낚시나 하며 여생을 즐기는 노인일 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갈 때가 아닙니다. 바깥엔 마물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났고, 안에선 저 원귀들로 인해 난리입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곤륜공사 전체가 통째로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난 그에게 지금 처해 있는 주변 상황에 대해 낱낱이 밝혔다.
제아무리 은퇴한 노인이어도 지금이 신선놀음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일깨워 줘야 했다.
그러나.
“그런가?”
테무르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렇다면 그게 순리인 모양이지.”
“뭐라고요?”
“나는 순리를 따르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만약 트롤이 멸망하는 게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운명이라고……?”
이 세상에 운명이나 순리 따위는 없다.
그런 건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인과는 결국 각각의 의지를 지닌 개체들이 개별적 행동을 행한 결과의 합에 불과하다.
미래는 개인이 가진 의지로 얼마든지 바꾸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당신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면서 찬양하는 동족들을 전부 죽게 만드는 게 순리라고?”
“그들 또한 자연의 일부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흙으로……. 그래.”
기껏 찾아낸 열쇠가 이따위 소리나 지껄이는 인물이라는 것에 실망한 나는.
결국 내 손으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력을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쩔 수 없지. 수호령을 강제로라도 빼앗아서 타신편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되도록이면 협력하려 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좋게 해결하기는 글렀다.
‘별의 불꽃을 얻어내는 거라면…… 태공망의 수호령을 빼앗아 오는 걸로도 충분하겠지?’
나는 악의를 향해 물었다.
무턱대고 이 자를 해쳤다가 중요한 별 불꽃까지 잃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다행히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이자로부터 수호령 태공망을 빼앗아 오는 것으로.
타신편을 직접 사용해 유메미를 구하는 건 물론.
손상된 에테르를 대체할 ‘별의 불꽃’도 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흠, 분위기가 달라졌구만. 지금 날 해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테무르는 가지고 있는 수호령의 격이 높아서 그런 건지, 내 의도를 금세 눈치챘다.
이런 강자를 상대로 고든에게 했던 것처럼 수호령만을 빼앗아 오는 건 불가능.
그래서 난 처음부터 그를 죽일 생각으로 무기를 빼 들었다.
{마검 <파슈파타>를 소환한다.}
‘일격에 끝장낸다.’
원래의 나였다면 여기에 야차와 나찰까지 불러내 다중 공격을 펼쳤겠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것들의 유지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용인화조차 할 수가 없어서 어떠한 보호구도 없이, 얇은 평상복에 현자의 코트를 둘렀을 뿐인 상태.
공격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 위해, 다른 자잘한 능력은 모조리 봉인했다.
{진원진기를 <환란의 빙정>으로 대체한다.}
난 두 손으로 파슈파타의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쯧쯧쯧, 가진 거라곤 뭣도 없는 이 노인을 해쳐서 뭘 얻으려고.”
테무르는 내 적의를 파악하고도 전혀 위축되거나 혹은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굽은 등을 펴며 큰 키를 보이고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대자재천(大自在天)의 화신이 나를 죽이려 들다니. 나도 너무 오래 살았나 보군.”
그의 눈에선 안광이 비쳤다.
테무르가 아닌 태공망.
원시천존과 삼황오제를 비롯한 곤륜의 구세대 신들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단신으로 상대해 승리한, 신 중의 신이라 불리는 불멸자들 중 하나.
그 거대한 존재가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내 안에 실존하는 시바의 이명을 언급하며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