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54화
“이쯤에서 일단 우리는 동대륙으로 돌아가 군세를 재정비하고, 이쪽의 문제 상황이 동 대륙으로 넘어오지 않게끔 대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
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원래 네가 이곳에 오려고 했던 목적인 옹구스의 신병 확보는 이미 끝났고, 굳이 서 대륙에 더 머무를 필요는 없잖아?”
“그 말은 드워프들을 버리자는 얘기인가?”
동 대륙으로 돌아가려면 물론 우리가 타고 왔던 프리드웬을 타야 할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웬 안에 한 종족 전체나 마찬가지인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녀의 말대로 하려면 이곳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는, 비정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맞아. 하지만 잘 생각해. 넌 우리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야.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지도자는, 우선순위를 매겨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그녀는 냉철한 현실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명을 가지고 덧셈과 뺄셈을 해야 해. 그게 개개인에겐 잔혹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집단을 이끄는 리더가 그걸 하지 못하면 결국 모두를 죽게 만드는 무능한 자밖에 안 되는 거니까.”
레아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 것이다.
결국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드워프가 아닌 인간.
동 대륙에 남아 있을 내 친구와 동료들이다.
칠지도를 얻고 유력자들의 협조까지 구해내서 드워프 세계의 1인자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이들은 외부인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언젠간 서로 결별하게 될 외부인 말이다.
“그리고, 그건 생각해 봤어?”
“뭘 말이지?”
“세상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변한 게 여기만이 아니라 동 대륙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
레아는 거기서 더 강하게 핵심을 파고들었다.
마물들의 개체수가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것.
그런 건 애초부터 위험한 환경이었던 서 대륙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와 스사노오가 경험했던, 기이하게 작동되는 시스템에 관해서라면 말이 달라진다.
‘세계의 법칙’을 구성하고 있는 시스템이 변경되는 건, 차원을 막론하고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 움직여도 늦었을지 몰라.”
“그런…….”
이미 타라를 잃었다.
여기서 더 많은 사람들을 잃을 수는 없다.
게다가 난 타라가 대체 어떤 경유로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까지 온 건지 알아야만 했다.
그건 분명 동 대륙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아.”
내 마음은 이미 기울었다.
드워프보다는 인간.
물론 이곳에서 새로 만난 동료들도 나에겐 꽤나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지만.
타고난 종족에의 소속감은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나도 그 ‘다크엘프 기득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녀석인 모양이다.
“생각해 볼게.”
나는 일단 결정을 보류하기로 했다.
“왜지? 어물쩍거리다간 전부 잃을 수도 있어.”
“이런 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신우……. 혹시 여기 사람들에게 동정심이라도 품는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
“너 말고도 거기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들은 많아. 나도, 유메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두 다. 이건 네 개인의 알량한 도덕심 같은 게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레아는 나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언성을 높여본 적 없는 그녀가 화를 냈다.
용인화 기사로서 각성한 그녀는 나와 정신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불타오르는 감정은 더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
“……미안.”
레아는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에게 사과했다.
다시 차분해진 그녀에게 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레아. 우선 네 말대로 하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어떤?”
“프리드웬을 재가동시켜야 해. 차원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아…….”
“그 방법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대신 로마노프에게 다른 일들은 모두 제쳐놓고 그쪽에 집중하라고 해둘게. 네 말대로 하건, 아니건, 언젠간 해야 하는 일이니까.”
“고마워.”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발이 묶여야 하니,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자. 오늘 했던 말, 스사노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오늘 말한 레아의 의견이 그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일이 커질 게 분명하다.
자기 종족을 버린다는 충격에 더해, 의를 중요시하는 그에게 그런 행동은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할 테니 말이다.
“알겠어.”
레아는 내 말에 수긍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여기 일부터 처리하러 갈까.”
난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육안으로는 보기 어려운 먼 거리.
마력 감응으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곳에, 마물들이 이 움직이는 도시를 따라오고 있었다.
* * *
목표했던 라바예스 고원에 도착한 타카마 시티는 이동 모드를 해제하고 지면에 안착했다.
이 거대한 플랫폼이 울퉁불퉁한 땅 위에 제대로 서 있을 수나 있을까 싶었지만, 아래쪽엔 지면을 평평하게 만들고 뿌리를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장치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가능했다.
“영체 투영 권능을 습득했다고?”
한편, 고든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드디어, 아니, 벌써 영체 투영 권능을 습득했다는 얘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네. 아직은 제 마나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그건 상관없어. 수호령이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근데…….”
나는 그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벌써 그 능력을 얻다니.”
고든을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에 그는 그야말로 각성자로서 입문 단계 수준도 되지 않는, 정말 운 좋게 신화급 수호령을 얻은 초심자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이 짧은 기간 안에 영체 투영 권능을 얻을 정도의 성취를 이뤄냈다.
보통은 수호령과의 동화율 99.9%에서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다가 신격이 각성되거나 금제가 해제되어 영체 투영 능력을 얻는데.
그 말인즉, 어쨌든 그걸 해내려면 동화율 99.9%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기존에 ‘하이 랭커’라 불렸던 다른 각성자들도 최소 몇 년은 걸린 일이었고.
악의의 오른쪽 눈이라는 예외적인 특성을 얻은 나조차도 거기에 닿기까지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고든은 그보다도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영체 투영을 얻어낸 것이다.
‘체내에 보유한 마나량은 턱없이 부족한 것 같은데.’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나량 자체는 경지에 비해 매우 적었다.
다른 타입도 아니고 신화급 수호령을 가진 마법사형 각성자가 말이다.
영체 투영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쌓아 올린 능력치 자체는 매우 낮은데, 습득한 기술의 경지는 어울리지 않게 높은, 언밸런스한 상태.
이런 걸 보면 기술적으로 대단히 빠른 습득력을 갖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그에게 있는 걸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잘됐어.’
뭐가 됐든 내게는 희소식임에 틀림 없다.
애초에 고든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그가 영체 투영을 얻어서 내 앞에 깨어난 옹구스를 데려오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면 나야말로 환영이다.
“좋아. 그럼 이제 네 심상세계 속으로 들어갈 거야.”
“네.”
고든은 잔뜩 겁을 먹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꽤나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데다, 다른 고위 각성자에 못 미칠 뿐 지금의 그는 이미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정신력도 강해졌을 것이다.
툭.
나는 고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화아악!
그리고 곧장, 그의 정신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영혼을 이동시켰다.
* * *
“옹구스.”
나는 절벽 끝에서 로브를 입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아래쪽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못 들은 척이라도 하려는 거냐?”
난 그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강한 살의를 내뿜으면서.
여기서라면 얼마든지 아지다하카를 불러내 그를 잡아먹고 영멸시킬 수도 있다.
그런 암시를 강하게 내비쳐 그가 내게 무릎을 꿇게 만들 작정이었다.
“이곳은 아름다운 세상이군.”
그런데 그는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전혀 페이스가 무너지지 않았다.
뜬금없는 헛소리까지 내뱉으면서 말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야?”
“봐. 저 아래에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옹구스가 절벽 아래의 저 먼 곳, 작은 시골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남미를 연상케 하는 수풀이 우거진 자연 사이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저게 고든의 심상세계인가.’
확실히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묘사한 내 심상세계와는 많이 다른 광경이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나와는 달리 상당히 여유롭고 따뜻한 마음을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똑같이 가족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물론 지금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건 나와 옹구스 사이의 일일 뿐, 고든과는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너도 저런 삶을 원했겠지.”
“……뭐?”
“가족들과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는,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 안 그런가, 아흐리만?”
그는 내 옛 이름을 불렀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지금 난 악의의 오른쪽 눈으로 대놓고 내 정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신화시대의 신들이 내 과거의 이름을 아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난 지금 너랑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러 온 게 아니다. 당장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슥. 툭툭.
옹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는, 여유롭게 뒤로 돌아 나를 마주했다.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본론……. 그건 물론 네 아들을 가둬 놓은 거울 때문이겠지?”
“그래.”
옹구스는 이미 내가 그것 때문에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가 나와 가장 강력한 접점이었을 테니, 충분히 예상했을 만하다.
“네 아들을 가둬 놓은 거울은, 동 대륙 어딘가의 땅속에 묻혀 있을 거다.”
“위치는?”
“여기.”
그가 바닥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자, 그곳에 동 대륙의 지도가 그려지고 한 지점에 푸른 빛으로 점이 찍혔다.
그는 생각보다 꽤 순순히 내게 모든 것들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날 속이려 해봐야 내 손바닥 위.
지금의 옹구스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
여의치 않으면 고든에겐 미안하지만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화가 빨라서 좋군.”
난 그대로 그와의 대면을 중단하고 심상세계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추가적인 정보는 해당 위치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알아내면 된다.
“그럼 이만.”
“이봐.”
그런데 이번엔 옹구스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다. 부디 멀리 돌아가지 않길 바라지.”
“진실? 무슨 진실?”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
그러나 그는 내 반문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름진 얼굴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