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40화
나를 공격한 주체는 어떤 다크엘프 여성이었다.
{수호령: 라바나(신화)}
‘라바나……. 나찰들의 왕인가.’
쿠베라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경계선에 위치한 다크엘프, ‘나찰’들의 수장이자 데바-로카 신계의 일원.
그녀 외에도 그 주변에는 인간과 트롤 등의 다종족으로 구성된 각성자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릴 먼저 공격한 그들을 향해, 라이진이 그렇게 물었다.
동 대륙에서는 외부 세력을 다짜고짜 공격하는 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당신들이야말로 우리 땅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바나 역시 더 이상 공격을 가하지 않고서 역으로 되물었다.
양쪽 다 서로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었다.
콰직!
난 영체의 손으로 붙잡고 있던 백악의 입을 가차 없이 찢어버렸다.
그렇게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 후, 지상에 착지해 그들과 정식으로 대면했다.
“우리는 A&A의 일원이다. 당신들은…….”
“아틀라스팜.”
“그래, 아틀라스팜. 먼저 뭣 때문에 우리에게 선제공격을 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
가능하면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지금 시점에서 세력 간의 분쟁이 벌어지면 내겐 골치 아픈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공장 습격 건이야 아마테라스의 공작 덕에 비공식적인 암투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필드에서 대놓고 싸우게 되면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일도 복잡해진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는 이 시점에서 굳이 상황을 악화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걸 몰라서 묻나? 당신들이 들어와 있는 여긴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구역이야.”
“여길 소유하고 있다고?”
“그래. 이런 곳에서 전투 행위를 하고 있으니, 우린 당신들을 무력으로 쫓아낼 정당한 권리가 있는 거지.”
그녀는 우릴 강하게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자신이 한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자 라이진이 뒤에서 나와 그녀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불성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보다시피 이곳은 마물이 창궐하는 필드인데, 소유라니!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오?”
그가 저런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각 세력이 ‘필드’를 소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상호간에 맺어진 암묵적인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 맺어진 배경은 이렇다.
서 대륙에서는 급격히 강해진 마물 때문에 방어막 바깥에 있는 일반 필드를 ‘영토’로 관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이곳에서도 강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런 마물을 처치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소수의 강자들이 1년 내내 마물 사냥만 하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라 수복한 땅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공성 보호막으로 어느 정도 마물을 막을 수 있는 도시들만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고.
각 세력들은 그 도시 사이의 교역로 확보를 위해, 필드에서는 가능하면 분쟁을 피하며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필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부분은 그 약속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왜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지금 라바나는, 그런 세력 간의 약속을 깨뜨리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모두가 지금까지 지켜온 암묵적인 약속이었잖소!”
“약속? 우리 아틀라스팜이 그런 서류에 서명이라도 한 적이 있었나? 대체 그 ‘암묵적인 약속’은 누가 정한 건데?”
그러더니 그녀가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러곤 삽입되어 있는 홀로그램 PC의 화면을 모두가 볼 수 있는 오픈 인터페이스로 설정한 다음, 우리에게 어떤 계약서 한 장을 내비쳤다.
“잘 봐. 진짜 ‘약속’은 이런 거야.”
[……상기 영역을 아틀라스팜의 귀속 부동산으로 인정한다.]
[마하바라 네트워크인]
[인드라닉스인]
마하넷과 인드라닉스, 그리고 아틀라스팜.
셋 다 5대 세력에 속하는 대형 그룹이다.
그러니까 5대 세력의 과반수가, 기존에 서로 지키고 있던 약속을 깨고서 이례적으로 ‘필드 사유’를 인정한 것이다.
그것도 A&A의 수장인 내게 어떠한 언질도 없이 말이다.
“이건…… 대체…….”
라이진 역시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오랜 기간 동안 아마테라스의 최측근으로 보좌해 왔던 그조차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걸 보면.
내가 타카마 시티의 지배자가 되기 전에 일어난 일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셋 다 다크엘프 종족이 수뇌부인 곳들이잖아.’
5대 세력 중 저 세 곳은 모두 다크엘프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들이었다.
나머지 두 군데는 드워프 종족의 A&A와 트롤 종족의 곤륜공사.
말인즉, 다크엘프 수뇌부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종족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드워프들끼리 똘똘 뭉쳐 있는 이쪽에서 태클 걸 일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주변의 땅이 그렇게 기존의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지점을 눈여겨봤다.
“그만큼 여기에 뭔가 대단한 게 있다는 뜻인가 보지?”
“……뭐.”
순간 라바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렸지만, 내 예리한 찌르기에 흠칫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른 곳들도 그렇게 인정한다면 어쩔 수 없지. 이 상황에서 우리만 태클을 건다면 그것만큼 명분이 빈약한 것도 없으니까.”
난 일단 고든의 훈련은 종료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굳이 여기서 부딪쳐 봤자 득 될 것도 없고, 좀 더 정보를 알아보고 행동하는 게 더 유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자, 라이진.”
“이봐, 인간.”
그렇게 돌아서려는 순간, 라바나가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듣자 하니 외부 차원에서 넘어온 이방인이라는 것 같던데.”
그녀는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타카마 시티의 쿠데타는 모든 세력들이 다 알아도 모자랄 대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아마테라스가 실각하고 새로이 나타난 칠지도의 주인이 드워프가 아닌 인간.
당연히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래, 그런데 왜?”
“나대지 마. 뒈지기 싫으면.”
라바나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내리깔아보며 도발을 날렸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유난히 짙어 보인다.
처음엔 그게 다크엘프 특유의 잿빛 피부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림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이나 끊지 그래?”
“뭐?”
아틀라스팜은 제약회사.
이로운 약보다 해로운 약을 더 많이 만드는 회사였다.
당연히 라바나 역시 거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 X발……. 내가 약쟁이로 보여?”
내 역 도발은 생각보다 더 깊게 박힌 것 같다.
돌아오는 반응이 꽤나 격렬했다.
저벅. 저벅.
그녀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뻗어 멱살을 잡으려 했다.
물론 신체 능력으로 나는 그보다 압도적으로 한 수 위였다.
“어…… 엇?”
털썩.
다음 순간, 라바나는 바닥을 굴렀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내 움직임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칼을 뽑으려던 라이진마저도 칼자루만 잡은 채 동작을 멈춰야 했다.
“이, 이게……?”
“너야말로 나대지 말고 꺼져. 약쟁이 년.”
난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서는, 그 자리를 떴다.
* * *
“X발! 개X끼!”
라바나는 한동안 분을 이기지 못해 혼자서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기 나름대로는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이방인에게, 거칠디거친 이곳의 생리를 보여주려고 했건만.
도리어 부하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그러게 왜 맨몸으로 다가갔습니까? 마법이 주특기이신 분이.”
“시끄러. 그런 비리비리한 놈 상대로 내가 마법까지 써야겠어?”
“쓰지 않으셨습니까? 파이어 볼.”
“이 새끼가!”
콰악.
라바나가 자신의 나찰 수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수하는 컥컥거리면서 힘겨워했고, 그런 모습을 본 그녀는 곧 그의 숨통을 놓아주었다.
“으으……. 이 힘을 그 인간 놈에게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닥쳐.”
퍽.
라바나는 부하의 가슴을 밀쳐 넘어뜨린 다음, 플라스틱 케이스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신발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저 멀리서 한창 진행 중인 대규모 공사 현장을 쳐다봤다.
“저 엿 같은 땅굴. 저것만 아니었어도…….”
방금 전에 있었던 A&A와의 충돌.
그건 모두 결국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저 공사 현장 때문이었다.
황무지 필드 한가운데에 있는 ‘귀중한 물건’을 찾기 위한 착굴 공사를 말이다.
아틀라스팜 내에서도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진 그녀가 이런 모래밭에서 뒹구는 건 저 현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주변에 나타나는 마물들과 멋모르고 접근하는 각성자들 같은, 방해 요소들을 모두 차단하려는 것이다.
물론 타 세력의 인물들과 함부로 충돌해서는 안 된다는 상부의 명령이 있긴 했지만, 마약 중독자인 그녀가 방해꾼들을 곱게 보내줄 리는 없었다.
유신우에게 다짜고짜 화염구를 날려 버린 것도 그녀의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인간 놈. 다음에 만나면 잿더미로 만들어주마.”
“설마 죽이기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현직 A&A의 수장을?”
“뭐 어때. 아예 죽여서 시체도 안 남기면 증거도 안 남는 거잖아.”
“만에 하나 그러다 놓치기라도 하면…….”
“그깟 인간 놈 하나쯤은 도망가기 전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어. 내가 마음먹고 마법을 쓰면 절대 못 벗어나지.”
라바나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정작 그녀의 부하는 별로 못 미더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퍼엉!
“으, 으아아!”
그때, 어딘가에서 굉음과 함께 트롤 인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업하던 구역 한 곳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마물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라바나와 그녀의 나찰들이 한꺼번에 그곳을 쳐다봤다.
“잘됐네. 때마침 스트레스 풀 상대가 필요했는데.”
라바나는 손가락을 꺾으며 몸을 풀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그녀 주변에 있던 나찰들도 함께였다.
곧 대량의 마력이 나찰들 주변을 감싸는가 싶더니.
{<인보크 미티어라이트(Invoke meteorite)> 발동}
주문 시전 시간도 없이, 고급 원소마술 중에서도 최상위 단계에 해당하는 ‘운석 소환’ 마법을 순식간에 발동했다.
“자, 잠깐만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다짜고짜 광역 마법을 써버렸다는 것이었다.
마물이 나타난 곳은 착굴 중심에서 떨어지지 않은, 현장 한가운데였다.
운석 소환 마법의 위력을 생각하면, 이 한 방으로 착굴 현장 일대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면 작업 현장이…….”
“시끄러.”
그녀에게 마력 체인을 연결했던 나찰 하나가 뒤늦게 시전한 마법의 정체를 깨닫고 만류해 봤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상공에 형성된 마법진에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그 모습을 본 이 지역 일대의 작업자 및 각성자들은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쳐다봤다.
약물로 제정신이 아닌 라바나를 이곳에 배치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현실이 되다니.
엉뚱한 곳에서 회사의 대업을 말아먹으려는 라바나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이 재앙을 불러일으키려던.
바로 그 순간.
파칵.
떨어지던 운석이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지면으로부터 치솟은 충격파에 의해 파편이 모조리 소멸했다.
지표면에는 어떠한 피해도 가해지지 않은 채, 라바나의 운석 소환은 완벽하게 상쇄되어버린 것이다.
“뭐야, 어떤 미친년이……!”
라바나는 자신의 마법을 방해한 대상을 보며 욕지거리를 날렸지만.
“아…….”
그 실체를 확인하고선, 이내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타, 타라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