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201화
난 그 황금색 배가 엘프들의 것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챘다.
지난번에 봤던 테세우스의 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크기가 작은, 군함으로 치면 프리깃(frigate)급이라고 해야 할까.
‘온다는 연락은 못 받았는데.’
이쪽 세계로 넘어온 이후, 엘프들과의 접촉은 듀엔데가 보낸 사자를 통해서만 해 왔던 걸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더구나 테세우스의 배가 가진 공간이동 능력은 배 자체만이 아닌, 거기에 탑승한 승조원에게까지 적용이 되는 능력.
그렇기에 굳이 저 배가 직접 날아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설마…… 날 공격하려고?’
물론 저게 군사행동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난 손에 쥐고 있던 트리슈라에 고통의 업화를 불어넣었다.
“신우……. 혹시.”
“준비해.”
레아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서 들고 있던 창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에 예전 기억이 떠오른 건지, 원래 사용하던 쌍검을 쓰지는 않을 생각인 듯하다.
우우웅.
그런데 이쪽으로 다가오던 함선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는 지상에 착륙한 후, 안에서 갑옷을 입은 엘프들이 걸어 나왔다.
그중에 내게는 익숙한 두 얼굴이 눈에 띈다.
질호른과 듀엔데다.
‘듀엔데라면 몰라도 저 녀석은 왜?’
질호른은 엘프 종족 내에서도 군사력 운용에 대한 최고 권한을 가진, ‘집정관’이다.
다른 걸 떠나서 그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테세우스의 배를 움직이는 것만 봐도 그 위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굳이 저런 작은 배를 타고 오다니.
난 저 엘프 종족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바로 직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와 잠시 얘기 좀 하지.”
질호른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자기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나와 독대하기를 요청했다.
독대라고는 하지만 따로 방 같은 곳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급한 사안 때문에 그냥 바깥에서 이야기하자는 그의 요청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예상대로, 그는 곧장 자신들에게 일이 생겼음을 시인했다.
“꽤 심각한가 보군요. 집정관께서 저런 작은 배를 타고 직접 오시다니.”
“…….”
질호른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내 말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거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주지.”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생각을 하던 그가, 결심을 한 듯 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조난당한 상태다.”
“조난?”
난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런 날아다니는 배를 타고 다니는 자들이 조난을 당했다고?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조난의 의미가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정말 그 뜻으로 말한 게 맞았다.
“이 차원에.”
“그 말은…….”
“엘프계로 돌아갈 방법을 잃었다는 의미다.”
그 한마디에 내 머릿속에 모든 게 정리되었다.
질호른이 조그만 배를 타고 직접 여기까지 온 이유.
연락도 없이 대뜸 나를 찾아와 이런 이야길 하는 이유.
테세우스의 배를 잃은 것이다.
‘엘프들은 그 테세우스의 배를 통해 차원 이동을 한다.’
지금껏 듀엔데와 계속 교류를 하면서 난 그 배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차원 이동에 관한 기술력의 집약체.
본체 자신뿐만이 아니라 승무원, 심지어 다른 배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차원 엔진을 장착한 기계가 바로, 테세우스의 배인 것이다.
그래서 차원 이동 장치가 필요한 나 역시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그게 파괴당하기라도 하면, 저들은 엘프계와 본세계 사이를 오갈 수단을 잃는 셈이다.
점령한 영지가 없어서 연결된 포탈조차 없으니, 말 그대로 ‘조난’ 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당한 겁니까?”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이들을 그렇게 만든 존재가 누구냐는 것.
적어도 이곳 동 대륙에서 엘프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종족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오크, 렙틸리언 전체를 통틀어도 나 하나를 이기지 못할 텐데, 그런 나조차도 테세우스의 배를 박살 내는 건 불가능하니 말이다.
“나도 모른다. 처음 보는 생명체…… 마물이었다.”
“마물? 겨우 마물에게 당신들이 이렇게까지 몰렸다는 겁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대체 어떤 마물이 그 정도의 힘을 지닐 수 있는 걸까.
심지어 각 차원계의 최강 마물인 용종, 그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아종인 알파 퓨리 와이번조차 그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것들도 드래곤 나이트 클래스인 나에게 복속되어 용기사로서 운용되어야만 그럴듯한 힘을 내는 정도.
심지어 그렇게 해도 엘프는 이길 수 없지만 말이다.
“나도 방심했다. 일개 마물 따위에게 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을 절대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당하고 말 거다.”
질호른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경고를 들었으니 조심할 필요성은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조심도 적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 * *
난 질호른의 말을 듣자마자 듀엔데와 함께 그들이 당했다는 ‘괴생물체’들의 발원지를 찾아갔다.
“이봐, 난 여기서 멈추겠어. 더 이상 다가갔다가 놈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듀엔데는 식은땀을 흘리며 잔뜩 겁먹고선 앓는 소리를 했다.
앞에서 그 대단한 마법문명의 정수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걸 보았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나랑 같이 있는 게 더 안전할 텐데.”
물론 신화 사냥꾼의 본능 특성을 발동하고 있는 내 곁에서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더 위험한 짓이다.
적대적 존재의 감지 범위만큼은 엘프들의 장비보다도 내 감각이 훨씬 더 넓었기 때문이다.
“하, 젠장…….”
듀엔데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내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계속해서 적과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상황이 두려울 뿐.
난 그 녀석이 어떤 감정을 느끼건,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게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포착했다.’
이윽고, 내 감각 안에 처음으로 그 미지의 생물의 존재가 들어왔다.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지만, 마나에 관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거리.
거기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마력의 양부터가 압도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강한 생물체가 하나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존재한다고?’
단신으로 여덟이나 되는 그 거신을 파괴하고 황금 갑옷의 엘프들을 쳐 죽였다는 마물.
그 정도면 얼마 전 바벨탑 6층에서 대적했던 가짜 요르문간드 정도는 된다는 뜻인데.
그런 게 대규모 군대 수준으로 몰려왔다니, 정말 엘프들이 당할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난 그 상태에서 신화 사냥꾼의 본능 특성에 더 많은 정신력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상의 대략적인 생김새가 머릿속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전신이 털로 뒤덮인 반인반수.
팔에는 넓게 깃털이 돋아나 손과 날개의 역할을 겸하고 있고.
머리는 인간과 새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질호른과 듀엔데의 묘사에 따르면, 까마귀와 인간을 합쳐 놓은 반인반수였다고 한다.
‘……잠깐.’
그런데 난 어째선지 그 외형에서 어딘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저 ‘까마귀 인간’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그런 종류의 마물이 있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인데.
막상 감각으로 직접 그것의 외형을 그려내기 시작하자, 왜인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종류의 마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봐야겠어.’
결국 난 그 녀석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가 눈으로 모습을 확인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 이봐? 더 이상 다가가면 정말 위험…….”
“넌 여기서 그냥 돌아가. 이제부턴 나 혼자 움직일 테니까.”
“……으응? 정말?”
“이제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위치를 확인했으니까.”
난 듀엔데도 여기서 돌려보냈다.
여차하면 싸울 수도 있는 상황.
거치적거리는 보호 대상을 데리고 있을 바에는 혼자 있는 게 낫다.
지금은 엘프 병사 몇몇 따위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니 말이다.
“아, 알았다.”
듀엔데는 내 말을 듣고 헐레벌떡 자리를 뜨려다 말고는.
“……조심해. 네가 죽기라도 하면 정말 희망이 없으니까.”
그답지 않은 소리를 넌지시 던졌다.
물론 그 말은 진정으로 절박한 심경에서 나온 것이겠지.
왜냐하면 테세우스의 배를 잃은 지금의 엘프들은 내게 기대지 않으면 의탁할 곳이 없는, 난민 처지였으니 말이다.
“걱정하지 마라.”
난 그렇게 듀엔데와 갈라져 홀로 까마귀 수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 *
‘이럴 수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악마들이…… 돌아왔다고?’
엘프들을 이 땅에 좌초시킨 마물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악마들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시대의 내가 하계에서 이끌고 다니며 세상을 파괴하던, 솔로몬의 악마들.
그중 하나의 하수인들이었다.
그리고 이 하수인들을 이끄는 군단장은 다름 아닌.
“대악마 아몬.”
뛰어난 군사 역량으로 신들과의 전투에서 걸출한 성과를 내보이던 나의 충실한 심복.
난 그를 발견하고서 돌아볼 것도 없이 다가갔다.
위험하다,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앙그라 마이뉴.”
그는 금세 내 정체를 알아봤다.
굳이 숨길 것도 없이, 내 본질이나 다름없는 오른쪽 눈의 심연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옥에서 뛰쳐나온 거지?”
난 우선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그에게 물었다.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균열이 생겼다고?”
“시스템이 세상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더군. 그래서 그 틈을 비집고 바깥으로 나온 거다.”
악마들은 이미 시스템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최초로 만들어지던 당시에, 하계에 올라와 있던 악마들은 수호령 리스트에 들지 못하고 모두 지옥으로 축출되었고.
그때 이 시스템에 관한 제약이나 배타적 법칙들을 깨달았을 터.
그런 탓에 이들은 언젠가 여기에 문제가 생길 때만을 호시탐탐 노렸을 것이고.
결국 시스템이 예상보다 너무 이른 세계 통합을 강행하게 되면서 그 문제가 현실화된 지금.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깥으로 기어 나온 것이었다.
“우습지 않나? 그렇게 우릴 버리고 아득바득 축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넌 한없이 약해빠진 필멸자 신세가 되고 말았고, 난 이렇게 온전한 힘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 말대로 지금의 아몬은 어떠한 페널티도 없이 과거의 불멸자로서의 위용을 가감 없이 펼치고 있었다.
필멸자라는 육체의 한계에 갇힌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그래봤자 시스템이 오류를 복구하고 법칙을 수정하면 넌 얼마 못 가 다시 지옥으로 축출될 텐데.”
물론 굳이 내가 지금과 같은 번거로운 선택을 한 건,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자의 권능으로 시스템의 규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짓을 하는 건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몬이 온전한 힘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난 것도 언젠간 촛불처럼 사라질 짧은 기회였을 뿐.
“상관없어. 그전에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리면 그만이니까.”
“너희가 진짜로 파괴해야 할 대상인 신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고 무고한 필멸자들만 해치겠다는 거냐?”
“모든 필멸자가 사라지면 그들이 강림할 육체도 사라지겠지.”
그의 태도는 확고했다.
언젠지 모를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세상을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생각.
물론 그건 당연히 내 이해와 충돌하는 생각이었다.
지금의 난 지켜야 할 사람들과 영토가 있는 처지.
아몬의 말처럼 필멸자를 전부 죽여서 육체를 없앤다는 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신들에 대한 복수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복수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복수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잊지 말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나와 손을 잡자.”
그래서 난 아몬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언제나 그렇듯이 혓바닥으로 구슬리는 수밖에.
“음?”
내 너무나도 태연한 제안에,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건…….”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널 따랐던 것도 너의 무력이 나를 앞질렀기 때문. 할 수 있다면 지금 나를 쓰러뜨려 봐라.”
하지만 이번엔 그것도 영 어려울 것 같다.
콰드드드득.
반인반수 형태였던 아몬의 몸에서 근육과 내장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뒤덮는가 싶더니, 이내 거대한 몸집을 가진 까마귀 마수로 변화했다.
그가 압도적인 기세의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난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