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97화
이종족 간에 파티를 맺는다는 발상을 누가 해보기나 했을까?
지금까지 시스템은 다른 종족끼리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도록 유도해왔다.
각 세계에서 던전에 나타나는 이종족들은 야만스러운 마물로 묘사되었고.
그다음으로는 공성전에서, 그리고 바벨탑에서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의도적으로 그런 환경을 조성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각성자.
같은 종족이 서로 다른 클랜에 속해 싸우거나 죽이다가도 또 어떤 때에는 함께 퀘스트를 공략해 나갔듯이.
이종족끼리도 서로 원한다면 얼마든지 시나리오에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의 수락을 얻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려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시스템 메시지에서 거부와 수락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이뤄진다.
손짓이 필요한 것도, 육성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 의도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끝.
그렇기에 외부에서 대답을 조작하거나 강압적으로 긍정하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 상대가 인지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새로운 메시지를 나타나게 할 수만 있다면.
순식간에 그 사람을 원하는 대로 납치해 버릴 수도 있다.
{특성 <승리자의 사고체계>가 발동됩니다.}
{특성 <신화 사냥꾼의 본능>이 발동됩니다.}
유신우는 두 가지 특성을 발동했다.
우선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거의 정지한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주변을 느리게 만든다.
그리고는 시력을 극한까지 강화해, 라르스의 눈동자 움직임을 읽었다.
‘동공의 초점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운 곳으로 모이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잡아낸다.
“퀘-스-트-를-깨-야-하-는-…….”
유신우에겐 라르스의 목소리가 슬로 모션에 걸린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방금 순간의 동공 움직임은 수락 메시지를 본 게 아니다.
퀘스트를 발견했다는 알림 메시지를 본 것.
{<악의의 오른쪽 눈>이 신기를 발견했다.}
{이곳에 ‘비밀 시나리오 퀘스트’가 존재함을 꿰뚫어 보았다.}
유신우는 그걸 악의의 오른쪽 눈의 네 번째 능력으로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라르스가 뭘 보고 있는 건지도 반응을 살피는 것만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지금이다.’
그래서 라르스의 동공 초점이 다시 한번 가까운 곳으로 모였을 때.
그때를 노려 파티 초대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지목한 대상을 파티에 초대하시겠습니까?}
{<라르스>님과 파티가 되었습니다.}
{비밀 시나리오 퀘스트 <고대인의 하늘길>을 발동하시겠습니까?}
{파티원과 함께 시나리오 영역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유신우는 곧장 이곳에 숨겨져 있는 퀘스트를 발동시켰다.
이걸로 라르스를 시나리오 차원 안으로 낚아채는, 납치 작전이 성공.
“무슨……!”
라르스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굉장히 당황했다.
곧장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유니크 망치 ‘권위자의 징벌’을 꺼내고는 토르의 영체를 투영했다.
자신을 파티원으로 초대한 누군가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앙그라 마이뉴!
라르스에 의해 영체 투영된 토르는 그 즉시 라르스를 데려온 상대가 유신우임을 알아챘다.
-도망쳐라! 넌 놈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틀렸어. 놈과 싸운다!’
토르는 위기를 느끼고 라르스에게 도주를 권유했지만, 라르스는 그걸 따르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쳐 봤자 이 녀석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한다! 그럴 바엔 차라리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입힌 다음 죽겠다!’
-이런 멍청한!
유신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파티에서 탈퇴하고 시나리오 영역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금세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인벤토리엔 긴급 텔레포테이션 스크롤도 있었지만 그걸 써봐야 주변 한정된 거리 안에서 랜덤한 위치에 순간이동을 하는 것뿐.
바벨탑에서처럼 스크롤을 사용한 다음 아예 접근 불가능한 오크 차원계로 도망칠 수 있다면 모를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영원히 도망치는 게 불가능한, 세계 통합이 이뤄진 이후의 지금 세상에선 그런 도주가 다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죽는 김에 차라리 조금이나마 부상이라도 입히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싸움에서 레아를 죽인 것처럼, 발버둥 치면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 말이다.
-놈에게 죽으면……!
하지만 토르에게 그런 라르스의 결정은 최악의 수였다.
육체 역할인 각성자의 목숨도 잃고, 자신의 영혼마저 흡수될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여기서 조금이나마 나은 선택지는, 라르스가 긴급 텔레포테이션 스크롤을 쓰고 유신우가 근처에 없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그러면 토르의 영혼은 다시 수호령 리스트에 등록이 되고, 나중에 또 다른 오크가 그의 힘을 이어받는 게 가능하다.
오크 종족 전체의 이해를 따지자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편이 최선인 것이다.
“으아아아아!”
-젠장……!
하나 지금은 너무 급박한 상황.
안타깝지만, 이제 와서 그런 긴 사정을 다 설명한 후에 ‘동족을 위해 자살해라’라고 설득하기는 너무 늦었다.
라르스는 이미, 뇌격을 담은 망치를 유신우에게 힘껏 휘두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해.”
그 순간, 유신우는 어떠한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고 천천히 라르스의 정면으로 걸어왔다.
마치 귀신처럼,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르면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그러곤 깊게 가라앉았다.
* * *
파도가 요동치는 드넓은 바다, 그 위로 짙은 먹구름이 잔뜩 깔린 하늘, 그리고 끝없이 내리치는 천둥 번개.
이곳은 나의 심상세계다.
그 한가운데서 내 손에 영혼이 이끌려 들어온 라르스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로 겁에 질려서는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익! ……젠장!”
그는 한참 동안 비어 있는 오른손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심상세계 안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저 애꿎은 오른손만 피곤할 뿐.
“괜히 힘 빼지 마. 넌 어차피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이 모든 게 그동안 쌓아 올려진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덕분이었다.
죽이거나 힘으로 제압하는 건 쉽다.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게 바로 이렇게 상대의 영혼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떳떳하게 정면승부 하자!”
라르스는 악을 쓰면서 고함을 질러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안에 내재된 공포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차피 정면승부로도 이기지 못할 것을 그도 알고 있으면서 애써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널 죽일 생각이 없어.”
“……뭐라고?”
사실 내가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구태여 이 먼 거리를 몰래 추격하고, 타이밍에 맞춰 파티 초대를 한 후, 시나리오 영역 안에서 죽이지도 않고 의식을 심상세계로 끌고 들어온 의도.
“대신 좀 빼앗으려고.”
“무, 무슨?”
그건 바로 놈을 살려둔 채 수호령 토르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토르의 영혼을 흡수한다.}
쿠오오!
하늘의 먹구름 사이에서 검은 비늘의 삼두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심상세계 속의 아지다하카.
그 녀석의 오른쪽 머리 하나가 금발을 휘날리는 근육질의 남자 하나를 입에 문 채 포효를 내지르며 나타났다.
“끄아아악!”
그건 토르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걸 본 라르스가 내게 손을 뻗어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저을 뿐.
난 어느새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이…… 개자식!”
다시금 내게 다가오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마치 하늘에 뜬 태양을 향해 가까이 가겠다고 달려가는 꼴 같다.
“봐, 네 수호령은 이제 내 거야.”
“……뭐라고!”
“너한텐 이제 영체 투영도, 무구 투영도 없어. 그 대단한 번개의 권능도 사라졌지.”
라르스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래에는 바다밖에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바닥 덕분에 그 아래로 빠지진 않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시스템 창을 열어보고 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일 터다.
그리고 이쯤에선 정말로 자신의 수호령이 사라졌음을 자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널 죽이진 않을 거야.”
“……어째서냐?”
라르스는 의문과 증오심을 가득 담아 나에게 반문했다.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그 물음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지금 당장 수호령을 잃긴 했지만, 금제 해방으로 인해 능력치를 비롯해 그가 쌓아 올린 모든 무의 업은 그대로였다.
단지 토르의 권능만을 잃었을 뿐, 그 자체로 훌륭한 오크 족의 전사인 것이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정말 이렇게 살려두면 언젠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나한테 후환을 만들 정도가 될 수 있을까?”
“…….”
“어디 한번 할 수 있으면 해봐. 비프로스트를 개방하고 아스가르드로 건너간 다음, 명예의 전당까지 닿아서 반신의 영역에 도달해 보라고.”
그런 그에게 난 일부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뭐? 그게 대체 무슨…….”
{시나리오 영역에서 나가시겠습니까? 퀘스트는 실패 처리됩니다.}
{시나리오 영역에서 퇴장합니다.}
그러곤 곧장 심상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와, 그를 어두운 던전 안에 내버려 둔 채 나 혼자만 유유히 바깥으로 나갔다.
‘시나리오 중단’이라는 시스템 명령어를 발동시켜서 말이다.
참고로 시스템 명령어 발동은 각성자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라르스는 지금, 수호령을 잃어 비각성자가 된 상태였다.
즉, 당장 자의로는 시나리오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놈을 퀘스트 차원 안에 가둬 놓는 것.
이게 바로 그에게 파티를 걸어 이 안으로 끌고 들어온 이유였다.
* * *
-돌아왔군.
요르문간드가 무심한 얼굴로 바닥에 앉은 채 나를 쳐다봤다.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네 두 번째 힘을 받아들이러 왔다.”
난 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훗.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조그만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의 크기 때문인지 엄청나게 거대한 거인의 몸뚱이가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몸에게 그렇게나 당당하게 힘을 요구하는 건, 당연히 너 역시 약속을 지켰다는 뜻일 터. 그렇지?
“맞아.”
무심하던 태도에서 드디어 흥미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호기심.
아마도 내가 뭘 가져왔기에 이렇게나 자신만만한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깜짝 놀라지나 말라고.”
{<정령 소환>을 발동합니다.}
{정령 <토르>를 소환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그 마법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처음엔 전투 용도로 사용했지만, 그보다 더 효율 좋은 힘의 사용처를 찾아낸 지금은 이걸 조금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그 녀석은?
마법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를 확인한 요르문간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아니, 동공뿐만이 아니라 입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다.
“그래. 너를 이 지옥에 떨어뜨린 장본인이자, 마지막에 망치로 네 뚝배기를 깼던 바로 그 녀석.”
요르문간드가 저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토르는 그에게 있어,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불구대천의 원수였기 때문에.
“어떻게, 개처럼 짖으면서 네 다리 사이로 기어가라고 시킬까?”
난 그런 그가 죽어서도 바라마지 않을 최상의 선물을 준비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