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96화
세계 통합은 기존 인류가 ‘이세계’라고 생각했던 던전 너머의 세상에 경계가 사라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은 포탈을 타고 넘어간 던전과 영지가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형태였는데.
그 벽이 전부 사라지면서 완전히 개방된 세계로 바뀐 것이다.
영지의 경우에는 1, 2차 공성전을 끝내고 소유권을 획득한 종족의 땅이 본세계로서 구현되었고, 던전의 경우에는 어차피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었기에 본래의 모습대로 형성되었다.
“여기가…… 그곳이었군.”
그리고 이렇게 경계가 사라진 본세계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이 자리 잡고 있던 중앙 초원과 오크 종족의 대제국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척박한 북쪽 지대.
이곳은 옛날 신화시대의 ‘아흐리만’이었던 나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바로 이 세상을 수복하기 위해 그 긴 세월을 버텨온 건가.’
각 종족들을 ‘이면세계’라는 임시 차원에 뿔뿔이 흩어놓고, 인류의 역사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을 보내며 일궈낸 결과물.
그게 바로 오늘날의 각성자들이며, 또한 이 포탈 너머의 세상이었다.
내가 망가뜨린 세상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원상복구 시켜 놓았으니, 시스템의 창조자인 아후라 마즈다가 박수라도 쳐야 마땅할 정도로 일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정작 나라는 변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게 큰 실수였지만.’
그러나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시스템의 이곳저곳을 헤집어 다니고 있다.
아후라 마즈다는 나를 배척한 채 ‘시스템’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자신만의 안전한 이상향을 구축하려고 했을 터.
이렇게 그의 의도대로 아름답게 잘 복구해 낸 세상을, 난 다시 부수고 망가뜨릴 것이다.
복구의 여지조차 없이, 신이라는 쓰레기들을 모조리 이 세상에서 소멸시킨 다음.
그들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던 필멸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타라도, 야드가르도.
그리고 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그러려면.’
그 과정의 첫걸음은 물론 나 자신이 그럴 만큼 강대한 능력을 얻는 것이다.
‘요르문간드의 다음 단계 힘.’
지금 나는 가슴에 형성된 빙결의 원천에 상당히 익숙해진 상태다.
사실 딱히 수련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저 그 녀석의 차가운 정수가 체내에 흐르는 용혈과 결합해 준 덕분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몸을 구성하는 혈액이 힘에 대한 적응성을 계속 높여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용격>의 생명력을 깎아 먹는다는 제약을 없애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물론 그 이전에 압도적인 화력을 발휘하는 ‘용격’을 자유자재로 쓸 수만 있다면 그거야말로 베스트일 것이다.
지금은 기껏해야 겨우 하루에 한 번 쓰고 나면 회복과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태.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제약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생명력의 소진을 그렇게 손쉽게 커버하는 게 가능했다면 난 굳이 용격 때문이 아니라도 진작 그 수단을 얻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내가 가진 역량 자체를 크게 부풀려서 감당하는 수밖에.’
결론은 다시 돌아와 요르문간드의 두 번째 힘.
‘녀석에게 환심을 사려면…… 역시 그게 필요하겠지.’
물론 빈손으로 니플헤임에 돌아갈 수는 없고, 선물이 필요하다.
‘힘을 주는 대신 복수를 해달라’는 계약을 이행했다는 증거로서의 선물.
그럴 내밀었을 때 요르문간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보지 않고도 눈에 선하다.
* * *
세계 통합이 이뤄진 후 본세계에 도착하고서 대략적인 지형이 파악됐을 즈음.
토르가 말했다.
-네 동족들을 무참히 학살한 그 인간 놈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뜬금없지만 라르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물음.
그동안 그는 가슴 속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체 투영 권능을 얻고 난 후,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파워업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우를 뛰어넘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그 이후로 아예 넘보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압도적인 무력 차까지 경험했다.
그 뒤로 오크계의 모든 클랜은 인간 종족에 대항하는 행위를 멈춰야만 했고.
그런 굴욕을 겪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이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이야 굴뚝같지. 그런데 방법이 없잖아.”
라르스는 그런 물음을 던진 토르에게 마치 투정 부리듯이 대답했다.
내심 속으로는 혹시 그가 무슨 실마리라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도 말이다.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맞아떨어졌다.
“어떻게?”
-아스가르드로 가라.
“아스가르드? ……그 전설 속의 신들의 세계를 말하는 건가?”
라르스는 토르의 갑작스러운 뜬구름 잡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아스가르드가 뭔지는 그도 알고 있다.
수많은 종족들의 신화와 전설은 오크계에서도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진짜 당사자인 뇌신 토르가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신빙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길 어떻게 가는 건데?”
문제는 방법이었다.
이제 와서 시스템은 패치 노트를 모조리 회수해 버렸고, 새롭게 진입한 본세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한 상황.
그건 수호령으로서 그에게 붙어 있어왔던 토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왜인지 토르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길은 알고 있다.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너는 아스가르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라르스는 토르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느꼈다.
물론 토르는 진짜 아스가르드의 일원이었으니 자기 집 찾아가는 길을 아는 거야 당연한 얘기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일 이유는 없다.
라르스에게 어쩔 수 없이 수호령으로서 붙어 있어야 하는 토르의 입장에선 라르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득이니까.
다만 아직도 걸리는 게 있다면.
“날 거기로 보내서 내 몸을 빼앗으려고?”
여전히 필멸자 라르스와 불멸자 토르는 ‘육체의 주도권’을 놓고서 갈등하는 관계라는 것.
토르 역시 바리공주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딱히 동정심을 가진 신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르스의 영혼을 쫓아내고 신격을 각성한 게 아니라, 그에게 붙들린 채 영체 투영으로 현신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물론 주도권 자체는 라르스가 가지고 있긴 했지만, 토르는 여전히 그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러니 지금 ‘아스가르드로 가라’는 이야기도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거냐?
그런데 토르는 오히려 더 당당했다.
“이젠 부정하지도 않는 건가?”
-이대로 계속 그 인간 놈에게 패배자인 채로 살다 죽을 거냐? 오크 족 전체가 그 뻔뻔한 귀쟁이 놈들 밑에서 핍박받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거냐?
“…….”
라르스에게 가장 민감한 영역을 건드리는 토르.
-아스가르드에 가면 돌파구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거기서 네 영혼이 살아남아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몰라.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그러고는 그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너도, 나도 막다른 길에 몰렸다. 언젠가 그 인간 놈과 다시 맞닥뜨린다면…… 그땐 우리 둘 다 끝장이겠지.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라르스는 그 말에 의문을 품었다.
수호령은 각성자가 죽으면 다른 각성자에게 강림하는 것이 상식.
물론 유신우는 거기서 예외이지만, 라르스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난번에 그가 오딘의 궁니르를 사용했을 때도 그저 모방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뭐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토르는 이 부분을 적당히 뭉개고 넘겼다.
어차피 알려줘 봐야 설명만 길어질 테고, 대책이 없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
……야속하게도 이 선택이 미래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합쳐진 이상 숨어 있지도 못해. 종족들을 고립시키던 차원의 벽은 허물어졌다. 이젠 한시라도 빨리 유신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얻어야 해. 오크 종족 전체를 위해서라도.
“……알겠다.”
결국 라르스는 토르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 말대로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꾸물거리다간 언제 인간이, 혹은 엘프가 들이닥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로 진입해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 막연한 목적 하나만을 품은 채, 이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 * *
휘이이잉.
세찬 눈보라가 휘날린다.
원래 오크들이 살던 이면세계의 극지방보다도 더 추운 날씨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한이 밀려옵니다.}
{동상으로 인해 생명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하.”
라르스는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들을 보며 헛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수많은 던전 속 마물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강인한 육체를 가진 자신이, 겨우 날씨 때문에 상태이상에 걸릴 줄이야.
물론 그도 그인지라 상태이상이 정말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애초에 이런 메시지를 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본세계의 북쪽 지대는 춥고 척박한 곳이었다.
-예전 신화시대의 오크들은 이런 곳에서도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살았다.
“어쩌라고? ‘너 때는 이런 추위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난 원래 신이라 아예 추위 같은 걸 못 느껴.
“그거 잘됐네. 그럼 나 대신 네가 비프로스트까지 좀 가 주지 그래?”
-미안하군. 난 네게 종속된 수호령에 불과한 몸이라서.
“큭.”
토르와 라르스는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북쪽으로 전진해 나갔다.
아스가르드로 통하는 연결로인 ‘비프로스트’를 찾기 위해.
-저기다.
이윽고, 그들은 눈이 발목까지 쌓인 어느 언덕에 도착했다.
“여기에 뭐가 있지?”
-언덕 가운데로 가 나를 투영하고 바닥에 마력을 흘려보내라. 그러면 네가 찾는 게 나타날 거다.
라르스는 토르의 지시대로 행동했다.
우우웅.
그러자 땅이 흔들리며 주변에 쏟아지던 눈발이 허공에 정지하는가 싶더니.
도리어 눈이 흩날리던 방향의 반대인 대각선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라르스가 흘려보낸 마력이 땅속의 무언가와 공명해 주변 공기 흐름을 역전시킨 것이다.
“이게 비프로스트인가?”
-음…….
그런데 토르는 어쩐지 탐탁잖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생각한 현상이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그러지?”
-아직은 아닌 건가?
“뭐가 말이지?”
-아스가르드로 통하는…….
그 순간.
{비프로스트의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비프로스트를 활성화하려면, 비밀 시나리오 퀘스트 <고대인의 하늘길>을 클리어해야 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비프로스트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내용.
토르가 저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바로, 아직까지 비프로스트가 작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였군. 여기까지 자물쇠를 걸어놨을 줄이야.
토르는 시스템의 이런 장난 같은 장치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정말 이곳이 아스가르드로 통하는 다리인 비프로스트라는 게 증명된 셈이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퀘스트를 깨야 하는 거라면 깨면 되지.”
-……정말 귀찮군.
그저 조금 번거로운 일 하나를 더 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비밀 시나리오 퀘스트 <고대인의 하늘길>을 발동하시겠습니까?}
라르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마음속으로 해당 시스템 메시지에 대답했다.
바로 그 찰나.
‘수락하…….’
{<유신우>님이 당신을 파티에 초대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겠다.’
{당신은 파티에 가입되었습니다.}
{파티장이 퀘스트를 발동했습니다.}
{파티원과 함께 시나리오 영역에 진입합니다.}
“무슨……!”
당황한 라르스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미 주변 환경은 눈 내리는 설원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바뀐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