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91화
{바벨탑 6층을 요르문간드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지금부터 본 지역은 <시나리오 영역>에서 <통상 영역>으로 변경됩니다.}
요르문간드를 죽인 후 놈의 영토는 곧바로 바벨탑 6층이 되었다.
하늘엔 청월이 떠 있고 파괴 불능의 자색 수정들이 사방에 가득히 자리 잡은 이 장소.
이제부터 이 장소에 5층의 중앙을 통과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이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레이프니르(요르문간드)>}
한편, 난 요르문간드를 봉인한 열쇠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기 전에 다시금 그것을 살펴봤다.
우우웅.
열쇠 안쪽에서 강렬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손에 물리적인 울림이 전해질 정도.
그 안에서 요르문간드가 이리저리 날뛰는 게 선연히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걸로 이 녀석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고 했지.’
이 글레이프니르만 있으면 언제든 놈을 소환(召喚, evoke)해 그 힘을 끌어올 수 있다.
이를테면 그 녀석이 마지막에 사용했던, 타이달 서지 같은 대마법 말이다.
물론 시나리오 영역에서와 같이 무조건 즉사 같은 기능이 붙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강력한 능력임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실, 애초에 난 이런 도구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신수의 힘을 얻어낸 건 이런 게 없었던 이전에도 이미 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방신수……. 이것들도 마찬가지야.’
오행을 관장하는 주작(화), 현무(수), 청룡(목), 백호(금), 기린(토)의 힘.
성주신의 시나리오에서 <악룡 포식>을 사용해 이 다섯 신수의 힘을 추출해 내 잘만 사용했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요르문간드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었다.
그냥 죽이고 그 시체를 먹어버리면 끝.
그러면 나 자신도 그만큼 강해질 뿐만 아니라 요르문간드의 권능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글레이프니르를 사용해 그것을 봉인하는, 이런 번거롭기 그지없는 짓을 한 이유는.
‘진짜 요르문간드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시나리오’의 존재가 아니라, 그 시나리오가 묘사해 낸 ‘가상 신수’의 원본과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먼 옛날, 그러니까 내가 한 번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신화시대 때보다도 더 이전.
신들의 세계는 수차례나 되는 대전쟁을 거치며 그 구성원들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런 전쟁 중에서 한 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인간형’ 신들을 신계 밖으로 쫓아 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당시에 내가 마주쳤었던 모든 신들이, 그리고 현재 시스템상에 등재된 수호령들이 전부 인간형이 된 것이다.
아발론의 인간 신.
올림포스의 엘프 신.
발할라의 오크 신.
트롤, 드워프, 렙틸리언 등.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병장기를 휘두르며 마법과 권능을 사용하는.
그런 자들로 말이다.
-그 쫓겨난 비인간형 신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다른 세상에 정착했지. 기존 세계와는 다른 법칙을 가진, 하지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폐쇄된 세계에 말이야.
-그게 바로 여기, 지옥이라는 건가?
-맞아.
거미 다리를 가진 대악마들의 군주, 바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지옥은 여기뿐만이 아니야.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신계가 있듯, 지옥 또한 수많은 종류가 있어. 그 모든 지옥과 하계를 잇는 통로가 열리는 날, 세상은 또다시 뒤집히게 될 거다.
그곳의 악마들이 그렇게나 하계의 필멸자와 신들을 증오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결국 그 필멸자 악마들 역시 원래 세상에서 쫓겨난 존재들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태생부터 인간인 내 입장에선 결국 잘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빼앗으려는 외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뭐가 어쨌든 지금은 상관없지. 중요한 건 요르문간드가 다른 지옥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거니까.’
아무튼 난 그 지옥에 갇혀 있는 ‘진짜 요르문간드’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바로 이 글레이프니르에 갇힌 ‘가짜 요르문간드’를 이용해서 말이다.
* * *
{바벨탑 5층에 진입합니다.}
난 우선 엘프들에게 6층의 공략 성공을 보고하기 위해 5층으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곧장 보이는 건 익숙한 엘프족 양식의 구조물들.
듀엔데가 상주하며 관리하는 중앙 거점이었다.
“듀엔데?”
그런데 왜인지 주변이 조용했다.
원래라면 층계의 출입을 상시 관리하는 엘프족 병사 한 명이 있어야 하고.
또 누군가 오가는 낌새가 보이면 금세 책임자인 듀엔데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기다려도, 심지어 직접 그를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신화 사냥꾼의 본능> 발동}
난 특성을 발동해 감각을 한껏 확장시키며 층계 관리실의 바깥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거점 외부의 한 지점에 다수의 인원들이 모여 있음이 느껴졌다.
방출하는 마력의 형태로 보아, 모두 엘프들이었다.
“아! 왔군! 나의 인간족 친구, 유신우.”
그 자리에 내가 나타나자, 질호른이 가장 먼저 날 발견하고는 상당히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된 가운데.
난 그의 모습과 그 뒤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 상황을 파악했다.
‘선수를 쳤군.’
항상 단정하게 자신을 꾸민 엘프족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질호른은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니, 땀보다는 피가 더욱 흥건히 젖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사지가 절단된 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난도질당한 세 엘프의 시신이 황금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트리온, 엘딘, 엔디미온.
엘프족 전설급 각성자 세 명이었다.
“엘프를 대표해, 이 세 쓰레기들의 불미스러운 행동에 대해 먼저 사과부터 하도록 하지. 정말 미안하게 됐네.”
질호른은 내가 오기 전에 그 셋을 체포해 ‘처벌’을 한 모양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처벌이라기보단 ‘입막음’이겠지만 말이다.
‘시킨 일을 실패한 데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내가 제기할 의문을 원천봉쇄시키기 위한 입막음, 게다가 나에게 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나와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행동이군.’
질호른은 이렇게 자신의 수족을 가차 없이 잘라냄으로써 당면한 위기를 타파했다.
분명 장기적으로 봐도, 그 세 명을 잃는 건 자신에게 큰 손해일 텐데도 말이다.
그만큼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나도 맞장구를 쳐줘 볼까.’
그렇다면야 나 역시 거리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갑은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질호른은 나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 모양이지만, 그의 행동은 반대로 우리 사이의 우열관계만 더 드러낸 셈이다.
뭐, 그 입장에선 이 외에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저도 이자들의 ‘일탈’에 대해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먼저 이렇게 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당연히 이래야지! 놈들이 짧은 생각으로 한 행동 때문에 신뢰가 깨질 뻔했는데, 이쯤이야.”
아마 그는 이 세 엘프가 글레이프니르를 훔치는 데 성공했더라도 이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글레이프니르를 사용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 이들을 잡아 죽이고 내게 ‘범인을 잡았다’며 열쇠를 돌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동감입니다. 저도 배신자는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가혹하면서도 확실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꿈틀.
그 말을 듣는 순간, 질호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가에 묘한 음영이 스쳐 지나갔다.
내 말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하하하!”
그는 아주 잠깐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다시 그 호방한 태도로 되돌아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넨 정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어쩜 그렇게 생각마저 나와 닮았는지.”
그건 진심이었다.
지금 질호른의 눈에는 확신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확고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
엘프계 내에서 더욱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파트너로서 말이다.
“…….”
아무런 말 없이 바로 옆에 서 있는 듀엔데가, 몹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그 둘 사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 * *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는 거지?
“당신은 제 수호령이니까요.”
-틀렸어. 내가 네 수호령인 게 아니라, 네가 내 몸뚱이인 거야. 아직도 상하 관계가 이해가 안 돼?
“좋아요. 그럼 그렇다고 치죠.”
유메미는 눈앞의 영체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누군가를 잡아먹을 듯 강렬한 인상을 지닌 여성의 모습을 한 영체.
무조신(巫祖神) 바리공주에게 말이다.
그녀 역시 레아처럼 얼마 전에 ‘금제가 해제되었다’는 메시지를 보고 나서, 자신의 수호령인 바리공주의 영체 투영이 가능해지며 그녀와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뭐어? 그렇다고 치자? 네가 감히…….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요. 당신은 결국 제가 죽을 때까지 제 몸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제 몸은 오직 제 의지대로만 움직이니까.”
-으으…….
바리공주는 보통 사람 같으면 보기만 해도 기가 죽을 만큼 강한 기운을 지닌 신이었다.
수많은 혼백과 악귀를 수족처럼 거느린, 무당 중의 무당이며 그 자체로 조상신으로 승화한 존재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해모수처럼 필멸자에 대해 동정심이나 죄책감 같은 걸 가진 신도 아니었다.
유신우가 증오하는 여느 쓰레기들과 다름없이, 필멸자의 생명 같은 건 한낱 벌레의 생명과 하등 다를 것 없다고 여기는 부류인 것이다.
유메미는 바로 그런 존재를 마치 자신의 동생을 다루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그리고 전 아주 천수를 누리다가 죽을 작정이에요. 물론 당신 같은 신에게 인간의 수명인 100년 정도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겠지만…….”
-뭐어? 100년? 지금도 늙어 빠진 게 거기서 100년을 더 살겠다고?
순간, 바리공주의 조롱 섞인 도발에 ‘저 아직 20대거든요’라 대답하려던 유메미는,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게 가볍게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넘겼다.
“……그때까지 바깥세상을 구경도 못 해보고 어둠 속에만 갇혀 있는 것보단 낫잖아요? 저한테 도움을 준다면 최소한 답답하지 않게는 해드릴 수 있는데.”
-네가 내 힘을 쓰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안 될 거 있나요? 저 ‘마존(魔尊)’이에요.”
수호령의 권능과 특성 따위는 없어도 된다.
금제 해제로 체득한 순수 능력치와 지금까지 익힌 수많은 마법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메미는 바로 그런 자신감을 내세우며 바리공주를 압박했다.
바리공주가 모든 무당들의 정점에 오른 인물이 되었듯, 유메미 역시 모든 마법사들의 정점에 오른 일종의 살아 있는 마법신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그녀의 말에 더욱 강한 설득력을 심어줬다.
“전 어차피 늙어 죽으면 끝이거든요. 후환 같은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연사한 필멸자는 유계의 심도에조차 에테르가 남지 않으니까.”
-허어.
“대신 절 도와주시면 적어도 저랑 있는 동안은 재밌는 구경 하게 해드릴게요. 오히려 저한테서 벗어나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을걸요?”
-참 나……. 너 정말 당돌한 년이구나?
결국 바리공주는 그녀의 마법과 영혼에 관한 높은 지식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네 말 한 번 믿어볼게. 대신 재미 없으면 가만 안 둬.
“잘 생각하셨어요.”
유메미는 바리공주가 그래 봐야 뭘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설득에 성공했으니, 중요한 건 이제 본론.
-그래, 그래서 네가 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뭐라고?
“지옥에 쫓겨난 신수 하나를 찾는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