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89화
엘딘, 트리온, 엔디미온.
이들은 엘프 세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는 존재들이었다.
마법에 관한 지성과 통찰이 중심이 되는 엘프 종족 사이에서, 창칼과 같은 미개한 병기를 사용해 마물과 싸우는 각성자들은 그들 기준으로는 이질적인 불순분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호령의 힘 따위를 빌리지 않고도 기존 군사력만으로 얼마든지 마물을 퇴치할 수 있는데,
굳이 각성자의 능력 같은 걸 키우려는 건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걸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저 셋과 같은 자들은 사회에서 퇴출된 것처럼 보인다.
-너희 셋이 그 인간 각성자를 따라가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언제나 양지에는 음지가 뒤따르는 법.
집정관 질호른은 바로 그 ‘이단자’들을 자신의 그림자처럼 이용했다.
도구나 기술력에 통제받지 않고서 일처리를 할 수 있고, 각성자만이 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각종 요소들을 그들을 통해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림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이 바로 이 세 엘프.
그들은 전설 수호령을 얻은 덕에 질호른에게 선택받아 키워졌다.
정부 수반이 독점하고 있는 패치노트를 활용해 성장시킨 것은 물론,
생체 약물 주입으로 인위적인 강화까지 더해져 일반적인 전설급 각성자 이상의 힘까지 얻었다.
질호른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 충족을 위해 그런 그들을 이용해왔는데, 이번 시나리오 공략에 이 셋이 참여한 것 역시 질호른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글레이프니르. 황금 장식이 달려 있는 열쇠다.
질호른은 그들 세 명에게 패치노트에 나와 있는 보상에 대해 말해줬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빼앗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신수를 봉인하는 열쇠, 글레이프니르를 강탈하라는 지시.
해당 던전 안에서 요르문간드를 봉인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들지 않은 빈 열쇠를 가져오게 되는 셈이지만, 어차피 다른 신수를 봉인하면 그만이기에 상관은 없었다.
-그럼 인간들은 그 안에서 죽이면 되겠습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굳이 시나리오 공략에 인간들의 손을 빌릴 이유가 없겠지. 너희가 그만큼이나 강했으면 말이야.
물론 그도 유신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대강 알고 있다.
아무리 듀엔데가 데리고 있던 병력이 빈약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엘프 군대조차 막기 어려운 적들을 자신들만의 힘으로 막아냈다고 했으니 말이다.
-집정관님, 저희도…….
-죽고 싶으면 그자들에게 덤비든가.
-…….
-멍청한 짓 할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절대 그 인간을 이길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훔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은가?
급습, 암살, 잠입, 탈취.
그런 게 바로 지금껏 세 사람이 해 오던 일이었다.
지금 그가 내리는 지시는,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다.
-열쇠를 훔치고 곧장 시나리오에서 빠져나와라. 그러면 인간들은 쫓아오지 못할 거다. 그 열쇠를 얻었을 때쯤에는 이미 어느 정도 진행이 된 후일 테고, 그 시점에서 중도 포기를 하고 너희를 쫓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정말 포기하고 쫓아온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민할 틈 정도는 생기겠지. 그 기회를 틈타 너흰 그대로 엘프계로 돌아가면 된다.
질호른은 그들에게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리는 계획을 말해줬다.
확실히, 다른 차원계로 넘어가게 된다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유신우라 해도 손 쓸 방도가 없어진다.
그건 심지어 시스템의 도움 없이 자의로 차원 이동을 하는 엘프들조차 어려운 일.
-알겠습니다. 금방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트리온과 엘딘, 엔디미온은 질호른의 지시를 손쉽게 수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유신우의 손에 들어간 열쇠를 그들이 빼앗을 수 있느냐 하는 전제부터가 틀렸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 * *
“여기서 휴식을 취하자.”
나는 두 가지 도구를 얻고 나서 잠시 길가에 멈춰 섰다.
더 이상 어떠한 마물도 출몰하지 않는 조용한 지대에서, 잠시 쉬기 위해서였다.
이 시나리오 영역은 긴 시간에 걸친 공략이 필요한 곳.
그러니 서두르는 것보단 천천히, 충분히 컨디션 관리를 해가면서 전진하는 게 낫다.
물론 나를 비롯해 용기사들은 모두 이미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기에 며칠 밤낮을 지새워 싸운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다만 일전의 싸움 과정에서 얻은 상처들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인 것이다.
“아델. 거기 앉아봐.”
“아…… 네.”
나는 아델을 앉혀놓고 그녀가 입은 상처 부위를 살펴봤다.
그녀는 베르그리시의 나뭇가지에 붙잡혔을 때, 몸 여기저기에 깊은 상처들을 입었다.
그 단단한 용비늘 갑주가 온통 엉망으로 부서져 있을 정도로 말이다.
파아앗.
난 그 상처 부위에 힐링 마법을 사용했다.
“저기……. 전 그냥 생명력 포션을 마시면 됩니다.”
그녀는 내가 직접 치료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괜찮다며 거절했다.
“포션도 마셔. 내상과 외상은 동시에 치료하면 훨씬 빠르게 회복되니까. 그리고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다 내가 치료해 줄 거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아아…… 감사합니다.”
지금 난 이곳에서 자력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델도, 레아도 그렇고, 용기사들은 모두 전사의 능력치와 스킬셋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클랜장께서 직접 치료를 해주시다니.”
“전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 그 후로도 야영지를 돌아다니며 용기사들과 와이번들의 회복을 도왔다.
보상 상자에서 나온 생명력 포션과 내 힐링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자, 효과가 훨씬 더 강해졌다.
덕분에 겨우 몇 시간만에 모든 부대원들이 만전 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신우.”
치료 작업이 끝난 후, 레아가 내게 다가왔다.
“너 괜찮아?”
“보다시피.”
난 양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전투 중에 상처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몸 상태가 괜찮다는 의미로 그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지금 계속 다른 사람들 치료만 하고 있잖아.”
“어차피 그래 봤자 소모되는 건 마나밖에 없어.”
마법을 사용함으로써 소모되는 마나는 마나 호흡만으로도 금방 채울 수 있는, 무한정한 자원이었다.
몸에 부담이 오는 것도 아니고, 내 생명력을 깎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정신적 피로감이 쌓이는 건 막을 수 없지만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어차피 그러려고 야영지를 구축한 거니까.”
우리는 이 장소에 보상 상자에서 얻은 ‘셸터’ 아이템을 사용해 야영지를 펼친 상태였다.
---
<셸터>
-사용 시 20인용 천막이 펼쳐집니다. 침대, 침낭, 요리도구, 물과 식량 등이 동봉되어 있습니다.
-취침 시 모든 디버프가 제거되고, 전투 피로를 치유합니다.
-요리 냄비에 필요한 재료를 넣고 끓이면 각종 효과가 부여된 마법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사용하기 전엔 그저 작은 텐트 모양의 장난감 같은 아이템이었는데,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어 넓고 평평한 자리에 펼치자 커다란 천막이 되었다.
게다가 안에는 침구류는 물론이고 요리를 할 수 있는 도구와 재료까지 갖춰져 있었다.
‘꽤 본격적인 생존 키트잖아?’
사실 여기선 씻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 정도면 던전 안에서 누리기엔 충분한 호사라고 할 만하다.
아무튼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움직일 작정이었다.
물론 이 영역은 24시간 내내 하늘에 달이 떠 있어서 밤낮의 구분이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불침번은 이렇게 서도록 하고…….”
우리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이곳이 안전한 지대라고는 하나, 그래도 만에 하나 마물들이 접근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봐.”
그런데 그때, 엘프들 중 하나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킬레우스를 수호령으로 하고 있는, 엔디미온이라는 자였다.
“뭐지?”
“불침번, 우리한테 맡기는 건 어때?”
“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당신들 뒤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호나 받는 게 너무 양심에 찔리는 일인 것 같아서. 그래도 불침번 정도라면 우리가 대신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내가 너흴 뭘 믿고?”
“하핫, 우리가 당신들에게 자는 동안 무슨 해코지라도 할 것 같나?”
엔디미온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저 녀석이 그렇게 당하는 꼴을 봤는데, 우리가 뭘 어쩌겠어? 아무리 자고 있다고 해도, 네 목에 칼이라도 대는 순간 우리 목부터 먼저 날아가지 않을까?”
그는 트리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실력을 한껏 띄워주며 칭찬과 도발을 섞어 내미는 제안.
확실히, 그 말대로 이 녀석들 실력으로는 나한테 해코지를 하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너희를 해쳤다간 이 시나리오 공략이 다 망가진다고. 그 상태로 본국에 돌아가 봤자 우리 같은 ‘이단자’에게 돌아오는 건 처벌밖에 더 있겠어? 우린 너희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야.”
엔디미온은 그럴 듯한 논리를 들어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래? 그럼 한번 해봐. 우린 편히 쉬고 있을 테니, 너희 셋이 알아서 해.”
그래서 난 흔쾌히 그걸 허락했다.
별달리 고민은 하지 않았다.
“좋아, 맡겨두라고.”
* * *
“그놈이 그렇게 쉽게 허락을 했다고?”
“그럼. 적당히 설득했더니 바로 넘어 오더라고. 역시 인간들이 타 종족에 비해서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엘프에 비하면 지적 수준이 낮다니까. 조금만 그럴듯하게 말해도 바로 혹하잖아.”
엔디미온이 트리온에게 유신우를 속여 넘긴 걸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실 ‘필멸자’로 구분되는 지성체 종족들의 지적 수준은 종 간의 유전적 차이보다 환경 영향과 개체 차이가 훨씬 더 크지만,
엘프 세계에서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계층이었던 ‘이단자’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런가……. 큭큭. 그럼 놈의 품속에서 열쇠만 꺼내 오면 되겠군.”
“그래도 조심해. 그 녀석. 감각이 엄청나게 발달한 것 같으니까. 자는 동안에도 주변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지도 몰라.”
“그런 거라면 내게 맡겨.”
민첩형 영웅인 오디세우스를 수호령으로 삼은 엘딘이 말했다.
사실 그의 수호령은 단순히 민첩형이라는 걸 넘어, ‘아우톨리코스의 피’라는 도둑질 전용 특성까지 부여하는 수호령이었으니, 이번 일에는 그야말로 제격인 인물이었다.
“내가 훔치고 있을 테니, 너희는 천막 안의 다른 사람들의 동태를 살펴. 혹시나 꺼림칙한 기분이 들면 곧장 이걸로 신호하고.”
“알았어.”
엘딘은 버려진 의복에서 뜯어낸 긴 실을 자신의 왼손 손목에 묶은 다음, 반대쪽 끝을 두 사람에게 건넸다.
그러곤 곧장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유신우 일행이 잠든 지 이미 세 시간이 흐른 시점.
한창 가장 깊은 수면을 취하고 있을 때였기에, 타이밍도 매우 적절했다.
스으윽.
그렇게 내부로 잠입한 엘딘이 유신우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고.
{특성 <아우톨리코스의 피> 발동}
{당신의 손놀림은 마치 유령과도 같이 가볍고 기민해집니다.}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손을 뺀 순간, 마치 원래 거기에 쥐어져 있었던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열쇠를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
{시나리오를 포기하고 바벨탑 5층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파아앗.
그리고 그 순간, 엘딘의 신호와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빛 때문에 자고 있던 용기사 중 몇몇이 깨어났지만, 그땐 이미 엘프들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번쩍.
그런 와중, 침상에서 느긋하게 눈을 뜬 유신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귀찮은 혹을 떼 버렸군.”
쩌저적.
그의 가슴을 두텁게 감싼, 불편해 보이는 형상의 용비늘 흉갑이 좌우로 열리고.
{<글레이프니르>}
그 안에 숨겨뒀던 진짜 열쇠를 꺼내 마법사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그제야 마음 편한 취침을 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