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88화
‘약점을 찾았다고?’
‘네. 놈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전신에서 업화를 발산해 봤는데 전혀 통하질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얘기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이유가 뭐지?’
‘수분 때문입니다.’
식물은 불에 약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식물에게 무작정 불을 붙인다고 해서 바로 화염이 피어오르지는 않는다.
그 안에 머금고 있는 물기가 발화를 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물을 불태우려면 머금은 물기를 모두 증발시켜야 한다.
물론 강한 불꽃에 노출된다면 안에 있는 수분도 금방 말라버려 순식간에 불이 붙는다.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산불이 모든 살아 있는 식생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앞에선 머금고 있는 수분도 무용지물임을 말이다.
마법의 상성 관계 역시 이런 자연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수목 속성을 가진 마물이 화염 공격에 즉각 타오르지 않기도 하지만, 임계점을 넘어서는 열에는 결국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아델이 하는 말을 들은 나는 더더욱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불 공격이 가해졌는데도 계속 수분이 남아 있다고?’
베르그리시는 아까 전부터 엄청나게 많은 수의 환영마검에 적중당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발생하는 흑염 폭풍은 저 녀석의 몸속에 들어 있는 수분을 전부 마르게 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큼 뜨거웠고.
또한 내가 사용하는 고통의 업화는 일반적인 화염보다도 훨씬 더 끈질기게 들러붙는 불꽃이기에 나무에 머금고 있는 수분 따위로 상쇄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상대가 아예 나보다 격이 높은 수속성 마수라면 모를까.
‘네. 그리고 그 물의 원천은…… 바로 이 시나리오 영역 전체입니다.’
아델의 말을 들은 순간, 난 그녀가 하려는 이야기의 의미가 뭔지 곧바로 깨달았다.
‘……설마?’
‘그렇습니다. 해룡(海龍) 요르문간드의 영토. 이 영역 전체가 강한 수속성의 기운이 흐르는 지역이라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베르그리시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봤다.
그러자 보였다.
아까부터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놈의 다리가 말이다.
‘땅속으로부터 다리를 통해 무한히 공급받는 물. 그게 저 녀석의 체내에 마르지 않고 흐르는 수분의 원천이자, 머리가 잘리고 심장이 관통되어도 움직이게 하는 생명력의 근원이었던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흉신’이라고까지 칭해질 정도로 높은 격의 존재인 신수 요르문간드의 정수(淨水)다.
말하자면 이 시나리오 영역 최종 보스의 기운을 직접 두르고 있는 적과 지금 내가 마주하고 서 있는 셈이었다.
‘그런 방어벽이 쉽게 뚫릴 리가 없지.’
준비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해야만 겨우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적의 힘에 의해 보호받는 상대다.
당연히 간단히 처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군.’
‘좋은 수가 있으십니까?’
‘수분 공급을 막아야지.’
‘다리를 베실 작정이시군요.’
그 순간 아델이 구상하고 있는 사념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동시에 거인의 하단으로 뛰어들어, 놈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각자 하나씩 다리를 베어 쓰러뜨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작전은 기각이다.’
하지만 난 거기에 반대했다.
‘어째서입니까?’
‘저 녀석은 꼭 다리가 아니라도 다른 신체 부위로 땅속의 물을 빨아들일 수 있을 거야. 다리를 자르고 넘어뜨려 바닥에 접촉시킨다면 결국 무용지물이 되는 거지.’
‘그 말씀대로라면…… 신체 어느 한 군데라도 지표면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겠군요.’
‘그래. 그러니 놈을 하늘로 띄워 올려야 해.’
‘그걸 어떻게…….’
저 거대한 덩치를 대체 무슨 수로 하늘에 띄울까.
그런 아델의 깊은 의문이 나에게까지 닿으려던 찰나.
“신우! 후위의 적은 모두 정리했어!”
뒤쪽에서 접근해 오던 드로거 무리를 전부 처치한 아델이 용기사들을 이끌고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곧장 우리 쪽에 가담해 전력을 보탤 기세로, 고삐를 붙잡고선 빠르게 달려왔다.
‘때마침 타이밍이 맞았군.’
난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거인을 잡는 방안을 떠올렸다.
* * *
‘아델. 지금이다.’
파앙!
아델이 내 신호를 듣자마자 베르그리시의 다리 쪽으로 뛰어들었다.
“어딜!”
나무 거인은 이제, 아까 전 공격으로 입은 상처들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
지속된 전투로 팔과 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져 가는 인간들에 비해, 저 녀석은 마치 처음 조우했을 때처럼 생생한 몸놀림을 펼치고 있었다.
그건 물론 땅속에서 공급받는 요르문간드의 정수 덕분일 것이다.
아델은 그걸 차단하기 위해 다리 쪽으로 달려들었고, 베르그리시는 그녀에게 거대한 나무망치를 휘두르려 했다.
“거기가 아니고 이쪽이다, 배불뚝이 돼지 새끼야!”
바로 그때, 내가 도발하는 말을 내뱉으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놈이 가진 컴플렉스를 건드리면서 말이다.
“……뭐라고!”
그러자 고개를 홱 들어 올려 자신의 품으로 뛰어드는 나를 쳐다봤다.
허무할 정도로 빤한 수법이 정직하게 먹혀든 것이다.
……정말 심리를 다루는 것 하나만큼은 너무 쉬운 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뱃살이 아니고 갑각이다!”
콰아아!
나무망치가 고속으로 쇄도한다.
어떤 기운을 뿜어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휘둘렀을 뿐인데, 공기에 의한 충격파가 발생할 정도로 위협적인 공격.
{공명기 <적사자 검식> 파생형 ‘금강염사’ 전개}
난 거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고통의 업화로 이뤄진 흑염의 사자가 내 칼끝에서 뻗어 나가 나무망치와 충돌한다.
투쾅!
강하고 단단한 두 힘이 맞부딪혀 대폭발을 일으켰다.
“끅!”
공중에 떠 있던 나는 뒤로 튕겨 나갔고, 베르그리시는 망치를 휘두른 손이 저린지 순간 인상을 잔뜩 구겼다.
파앙!
하지만 난 허공을 박차고 계속해서 추격타를 가했다.
{공명기 <적사자 검식> 파생형 ‘흑화륜’ 전개}
콰콰콰콰!
돌진하는 관성에 몸을 싣고서, 신체를 차륜처럼 회전시키며 원형으로 검은 불꽃의 검기를 내뱉는다.
“크어억! 이놈이!”
지체함 없이 연달아 이어지는 공격에, 놈은 반격할 새도 없이 망치 자루로 흑화륜을 막아냈다.
물론 그 덕분에 신체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공명기 <적사자 검식> 파생형 ‘신기일섬’ 전개}
서걱. 끼기기기긱!
“어엇!?”
기우뚱.
그사이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은 기술을 펼친 아델에 의해, 베르그리시의 다리가 두 동강 났다.
거인은 그 거대한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서 뒤로 넘어갔다.
물론 저대로 내버려 두면 바닥과 접촉해 아까처럼 물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테고, 결국 잘린 다리를 금세 회복해 전투는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레아!”
“응!”
바로 이 타이밍에, 나는 용기사들을 움직였다.
레아를 필두로 한 용기사들이 와이번의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무 높게 날지 않도록 주의해!”
“알았어!”
그들은 자색 수정 벽 위로 벗어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고도를 조절하며 몸이 기우는 거인의 어깨 위로 접근했다.
그러고는 다 같이 몸체에 발톱을 박아 넣은 다음, 그 상태로 날갯짓을 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드득! 펄럭!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베르그리시는 눈을 부릅뜨고서 나무망치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동시에 온몸에서 뻗어 나오는 나무줄기로 용기사들을 붙잡아 내팽개치려 했다.
“네 상대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하지만 몸쪽에는 여전히 내가 멀쩡하게 날뛰고 있다.
“하압!”
뿐만 아니라 다리를 잘라낸 아델 역시 이쪽에 난입해 구도는 2 대 1의 상황.
쾅! 콰쾅!
허공을 밟아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적사자 검식을 펼치는 나와 아델에 의해, 베르그리시의 몸부림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가 휘두르는 위협적인 나무망치 또한 힘이 실리기도 전에 우리 두 사람에게 저지당했다.
게다가.
화륵!
놈의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와이번들의 몸에서 일제히 검은 화염이 내뿜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건 씨알도 먹히지 않았었다.
땅속에서 공급받는 요르문간드의 정수가 열전달을 막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저 녀석은 물을 공급받지 못한다.
“으아아아!”
전신에 머금고 있던 수분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놈의 몸에는 곧 검은 화염이 새까맣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베르그리시는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이거 놔! 이거 놔줘! 제발! 살려줘!”
그 비명이 너무나도 처절해서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
아무리 마물이라지만, 말이 통하는 지성체다 보니 저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
아델도, 레아도, 그리고 다른 용기사들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아무리 숱한 전장을 헤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라지만, 말하고 생각할 줄 아는 지성체가 비명을 질러대며 천천히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보는 것은 이들에게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공명기 <적사자 검식> 파생형 ‘신기일섬’ 전개}
그래서 난 녀석의 숨통을 재빨리 끊어줬다.
이런 장면은 놔둬 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멘탈을 흔들어 놓기 전에 손수 보기 힘든 상황을 종료시키는 것도,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 * *
{<폭약병-유수>가 <속박탄>으로 바뀌었습니다.}
{<보강된 로브 코트>가 <마법사의 가죽 코트>로 강화되었습니다.}
{새 기능 <자가 수복> 특성이 부여되었습니다.}
{최대 마나량 증가치가 +2%에서 +3%로 상승했습니다.}
{마나 회복률 증가치가 +2%에서 +3%로 상승했습니다.}
{마법강화 단계가 2단계에서 3단계로 상승했습니다.}
베르그리시 처치 후에는 블라르오름 때와 같이 아이템 파밍이 이어졌다.
우선 유신우는 또다시 석궁 화살 통에서 폭약병을 꺼내 새로운 탄환을 제조했다.
이번엔 내용물을 버리지 않고, 유수 폭약병의 표면에 그대로 베르그리시의 뿌리를 감싸 <속박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방어구 강화 주문서로 로브 코트를 3단계로 강화했다.
그러자 코트 자체를 질기게 만들어주는 <견고함> 특성에 이어, 파손된 부분이 자동으로 고쳐지는 <자가 수복> 특성까지 더해졌다.
물론 여기에 방어력이 부가된 것은 아니라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지만, 거칠게 싸우는 와중에도 코트가 찢어지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장비 내구도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여기에 달린 <마법 강화> 스킬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
“무기 장비 분배 끝났습니다. 용기사 전원 각자에게 맞는 신규 장비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유신우를 비롯한 용기사들은 보상 상자에서 모두 각자 필요한 대로 새로운 무기와 장비들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번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스터, 여기…….”
아델이 화려한 금장식이 수 놓인 열쇠 하나를 건넸다.
크기는 대략 손목에서 중지 끝까지 닿을 정도. 꽤나 큰 열쇠였다.
{<글레이프니르(비어 있음)>}
신수를 봉인하는 열쇠, 글레이프니르.
이건 또 다른 상자 같은 걸 여는 용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신수를 봉인한다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보물이었다.
‘어떤 신수든지 종류에 상관없이 1체를 봉인하고서 꺼내 쓸 수 있는 도구……. 용도는 딱 정해져 있겠군.’
이게 여기서 나왔다는 것은, 시스템이 사용처를 정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 시나리오의 최종 보스인 신수 요르문간드에게 사용하라는 것.
물론 굳이 여기서 쓸 필요 없이 바깥에 가지고 나가서 다른 신수에게 사용할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엄청난 가치를 가진 보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는 것이다.
“고마워.”
유신우는 그 열쇠를 받아 허리춤에 매달린 석궁 화살 통 끈에 고리를 매달았다.
이 안에서는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가 없다 보니 이런 식으로 물건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최종 보스전 때 요르문간드에게 사용하려면 유신우가 직접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트리온.”
그런데 바로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오디세우스의 수호령을 가진 엘프 각성자, 엘딘이었다.
“저거, 맞지?”
“……그래, 그 열쇠.”
그들은 유신우의 손에 들어간 글레이프니르를 응시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