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66화
오크와 렙틸리언을 기만해 엘프들과의 신뢰를 깨뜨린다.
그렇게 바벨탑에서 엘프들과 대립각이 서게 되면, 그들은 거기에 여력을 쏟아붓느라 공성전에 상대적으로 힘을 덜 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아니면 엘프들이 장악한 2층 위쪽으로의 층계에서 나오는 이권을 완전히 포기하거나.
어느 쪽이 되었든 결국 이종족들은 우리에 비해 월등히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오크와 렙틸리언들은 증식하는 불신과 의혹 속에서 힘든 선택을 강요받고.
엘프들은 영문도 모르고 자신들을 적대하는 이종족에게 별수 없이 포문을 연다.
이게 바로 엘프들의 마법 문명을 이용한, 종족 전체를 속여 넘기는 대 사기극.
지금은 인간계의 상황이 좋지 않아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써 활용한 것이긴 하지만.
엘프들을 이용해 이종족들을 상대한다는 건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튼 이로써 이종족들과의 공성전 부분은 한시름 놓게 된 셈이었고.
이제부턴 백산 클랜의 잔존 병력들을 처리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아, 왔구만. 때마침 작동 테스트를 하려던 참이었어.”
로마노프가 한껏 뿌듯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난 그가 만든 ‘새로운 물건’을 보기 위해서 공방으로 왔다.
“황금 갑옷의 복제를 성공했다고?”
“시제품일 뿐이지만 말이야.”
그 새로운 물건은 바로 엘프들이 입던 황금 갑옷의 레플리카.
하급에 불과한 각성자의 신체 능력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강화시켜 주는 그 갑옷을.
드디어 로마노프가 제작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일단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
공방 안쪽으로 가보니, 로마노프의 조수 중 하나가 그 갑옷을 입고서 성능을 시험해 보고 있었다.
첫 인상은 상당히 심플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전신을 뒤덮는 검은색 계통의 금속 갑옷.
디자인 자체는 확실히 원본에 비하면 상당히 가볍고 현대적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게 꼭 좋다는 건 아니고, 중세 판금 갑옷 같은 느낌의 원본에 비하면 오히려 방어 면적이 줄어서 조금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원본에 비하면 너무 빈약한 것 같은데.”
“나도 알아.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육체 강화 기능과 방어 기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
“시간과 인력과 재료를 갈아넣기만 한다면야.”
로마노프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으지직. 으직.
시험자가 갑옷을 입은 채 맨손으로 두꺼운 금속판을 간단하게 으깼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전투 능력과는 전혀 상관 없는 공방의 조수.
그가 저 정도의 근력을 낸다는 건, 신체 강화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터엉!
곧이어 시험자는 제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근 수십미터의 높이까지 한꺼번에 도달하는 도약력에, 정작 그 갑옷을 입은 당사자가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어, 어엇!”
그는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잃고 엉거주춤한 채로 상체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쿵!
“어이! 괜찮아?”
로마노프는 그걸 보고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웃으면서 떨어진 조수에게 다가갔다.
조수는 바닥에 떨어진 채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몸을 살펴봤고,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화된 근력이 충격을 흡수해 준 모양이군.’
자기 자신이 내는 힘의 반작용으로 인한 충격까지 완벽하게 감당해 내는 걸 보면, 갑옷은 확실하게 완성된 것 같다.
저런 류의 동력갑옷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자기 힘을 감당하는’ 부분이니 말이다.
‘이제 저걸 사용할 사람만 찾으면…….’
아무튼 이제 중요한 건 시제품으로 나온 저 강화 갑옷을 누가 입느냐다.
물론 내가 입을 건 아니다.
왜냐면 난 이미 나 스스로도 저 갑옷이 낼 수 있는 출력보다 훨씬 높은 힘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저 갑옷의 용도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능력치가 부족한 아군에게 입혀서 전력을 강화하는 것.
그러니 기존 강자들은 제외하고, 자체적으로 가진 신체 능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이 저걸 입어야 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저 시제품을 착용해서 실전 데이터를 축적해 줄 사람은…….
“유신우. 나한테 맡길 일이 있다고?”
하비가 적격이었다.
* * *
동유럽 산골의 어느 작은 마을.
지구는 이미 전 세계가 마물들에 의해 폐허가 된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이 마을은 마치 그런 일이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다는 듯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물론 자세히 보면 그 분주함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이긴 했다.
이 마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칼과 창, 방패로 무장한 각성자 혹은 병사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마을 주변으로 다가오는 마물들을 처리하거나 군용물자로 보이는 물건들을 옮기느라 바빴다.
누가 봐도 무장단체가 점거하고 있는 장소인 것이다.
‘저 임시건물 안에 포탈이 있다는 거지?’
바로 그곳에, 하비가 도착해 침투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유신우에게서 받은 마력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내게 이런 걸 주다니……. 그 녀석은 정말 날 믿는 모양이군.’
최초로 제조하는 데 성공한 마력갑옷의 시제품.
그런 귀중한 물건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에게 줬다.
그것도 불멸 능력을 가진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내가 이런 걸 입어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유신우와 하비 사이에는 서로 신뢰할 만한 기반이 전혀 없는 게 사실이다.
이미 한 번 뒤통수를 치고 믿음이 깨진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신우는 그런 그에게 협력을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능글맞은 태도.
그러면서도 선뜻 마력 깁옷까지 주고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기니, 대체 그 의도가 무엇인지 감도 오질 않는다.
‘그래……. 어디 한번 네놈의 수에 놀아나 주지.’
그래서 하비는 일단 유신우의 뜻대로 움직이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급할 건 없다.
자신은 불멸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뭣하면 이 마력갑옷을 가지고 튀어버리면 그만이다.
불멸의 대가로 능력의 성장이 정체된 그에게 이건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
유신우는 사실상 하비에게 날개를 달아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멈춰. 신분을 밝혀라.”
한편, 대놓고 정문으로 걸어 접근하는 하비를 마을의 무장 병력들이 막아섰다.
그들은 제각기 푸른빛으로 빛나는 투영무구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이곳에 신이 계신다는 걸 알고 있다.”
하비가 다짜고짜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자, 무장 병력들은 각자의 무기를 더 강하게 움켜쥐며 경계심을 높였다.
자신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탄로 나버렸기 때문이다.
“놈을 포위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라!”
하비의 말대로 이곳은 진정한 신으로 각성한 신화급 각성자가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주둔하는 곳.
백산 클랜의 잔당이자 현 인간계의 가장 큰 위협들이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난 그 신께 충성을 바치러 온 거니까.”
그의 사정에 병력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추종자를 늘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의지를 따르겠다며 제 발로 찾아온 더더욱 필요한 인물이고 말이다.
“어, 어떡하지……?”
“어떡하긴, 처리해야지!”
“하지만 우릴 따르겠다고 온 사람을…….”
“우린 그냥 침입자를 죽이기만 하면 돼! 그런 걸 판단하는 건 사제님들이라고!”
병사들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NPC도 아니고, 엄연히 자신만의 영혼을 가진 주체적인 각성자였음에도 그랬다.
사제라고 불리는 자들이 대신 결정해 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판단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쳇, 직접 처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일단은 도망쳐야 하나?’
하비가 좋지 않게 흘러가는 현 상황의 타개책을 찾아내려던 순간.
“그 사람을 안으로 데려오세요!”
마을 안쪽에서 한껏 근엄하게 꾸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소개받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 저자가 이 녀석들이 말한 그 ‘사제’인 모양이군.’
덕분에 하비는 굳이 마력 갑옷의 성능을 테스트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곧장 결판을 지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신께 충성을 맹세하고 싶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사제 앞에서는 최대한 공손하게.
저 앞의 병사들은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자신을 데리고 온 사제에게는 행동거지를 다르게 해야 한다.
그런 판단하에 하비는 자신을 낮췄다.
“좋습니다. 당신을 그분께 데려다 주도록 하죠. 그 대신 이 팔찌를 착용하세요.”
사제가 그에게 한 쌍의 은제 팔찌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마력을 억제하는 장치입니다. 신 앞에서 불경한 행위를 취하는 걸 막기 위함이지요.”
‘뭐야, 결국 신과 만나려면 손발을 다 묶어야 된다는 거네.’
물론 이제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다.
어차피 지금 그가 하려는 건 무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기도 하고.
하비는 순순히 사제가 하자는 것들을 모두 따라줬다.
“가시죠.”
저벅. 저벅.
그리고 잠시 후, 임시 건물 안의 포탈을 타고 영지로 넘어간 두 사람은 긴 흑발의 남성이 기다리는 장소에 도착.
그 남자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이 느껴지게 하는 자였다.
하비 역시 무서울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몸이 딱딱하게 굳은 자신을 발견했다.
“투이렌 님의 추종자가 되겠다는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사제가 흑발의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심드렁한 태도로 대답했다.
“잘됐네. 데려가서 클랜 가입시켜.”
“알겠습니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아주 손쉽게 침투하는 것에 성공.
물론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중요한 건 이다음부터다.
“클랜원이 된 이상, 당신은 앞으로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규율에 따라야 할 겁니다.”
“예.”
“내일부터 교육이 시작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장한 병사 둘이 그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치 죄인을 연행하듯 거의 끌고 가다시피 클랜원 거주 구역으로 데리고 간다.
들어오는 건 쉬워도 나가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의 추종자가 되는 일.
이런 식으로 내부에 침투하는 걸 유신우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영영 갇히거나 무력을 동원해서 억지 돌파를 감행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제대로 된 공작을 행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말이다.
반면 하비는 그 모든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
‘자폭.’
그는 늘 하던 것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는 마법을 사용해 죽는다.
그리고 지정해 두었던 부활 지점에서 되살아난다.
그 부활 지점은 당연히 투이렌이 거주하던, 기밀이 잔뜩 쌓여 있는 집무실.
스슥.
거기서 중요한 자료들을 챙긴 다음.
다시 자폭마법으로 죽고 알포드 성에서 되살아난다.
이로써 그 모든 기밀자료들을 훔쳐서 아무런 리스크 없이 복귀하는 대에 성공한 것이다.
인벤토리에 넣은 소지품들을 모두 가지고 그대로 되살아나는 부활의 특성을 활용한, 공간이동 정보탈취 전법.
“수고했다. 역시 널 믿은 건 신의 한 수였어.”
유신우는 하비가 눈앞에 대령한 문서들을 읽으면서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는 현재 비밀스럽게 연결된 백산 클랜 잔당들에 관한 꽤나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각 조직의 신화급 각성자가 누구인지부터 시작해, 주둔하고 있는 위치, 병력 배치 계획까지.
현재 유신우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정보들이 모두 적혀 있는 것이다.
“훗.”
그의 우호적인 반응에, 하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