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48화
염라가 장악한 영지 안쪽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성벽은 무너지고, 벽 안쪽의 가옥들은 거의 어느 한 곳 성한 데 없이 전소된 수준으로 새까맣게 불타버렸다.
거리엔 피와 시체가 즐비했으며, 좀비들은 그 잔해들을 집어 먹고 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난 거주구 안으로 진입했다.
“으아아악!”
“죽기 싫어! 죽기 싫어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 소환물들에게 둘러싸여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있다.
그들은 살기 위해 건물 안에 들어가 농성을 하고 있지만, 1층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꽃이 곧 기둥을 쓰러뜨리고 저 건물을 통째로 내려 앉힐 것이다.
그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굶주려 아우성치는 저 괴물들의 뱃속에 들어가게 된다.
아니면 그전에 안으로 침입하는 것들에게 모조리 잡아먹히거나.
‘만약 유메미의 말대로 속공을 선택했다면…… 저 사람들은 살 수 있었겠지.’
난 속으로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물론 그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되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이 방법을 선택한 것부터가 저렇게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걸 감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은 적패지를 제거하는 데만 집중하자.’
그러니 저 사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이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스르륵.
나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가벼운 발걸음을 사용해 도심 안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렀다.
원래라면 이렇게 깊숙하게 들어오면 기척과 냄새를 숨긴다 해도 발각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뱀파이어 종족으로 의태한 상황이기 때문에 염라가 소환한 괴물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음?’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안으로 파고들던 도중, 시체의 악취 사이로 무언가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들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냄새.
그것도 이곳의 주민이 아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괴물들 사이에 오랜 기간 섞여 있어서 그에 동화된 냄새였다.
난 어딘가 익숙한 그 냄새를 쫓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자는…….’
놀랍게도 그곳엔 나에게 적패지에 관해 알려준 남자, ‘맥스’가 있었다.
‘뭐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지?’
그는 지난번에 검제의 인도를 받아 벨그레이브 클랜 영지로 들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나머지 다른 민간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대적이라 끝까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자기 딸에 관한 일 때문에 염라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태였던 터라 검제를 따라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랬던 그가 이런 위험한 곳에 와 있다.
아니, ‘어째서’가 궁금하기 이전에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부터가 의문이다.
‘각성자도 아니야.’
그의 머리 위엔 수호령 표시도 없다.
각성자가 아닌 사람은 혼자서는 포탈을 넘지 못한다.
비각성자가 포탈을 통과하려면 다른 각성자와 함께 들어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마 염라에게 다시 붙은 건가?’
이곳에 들어온 게 염라와 함께라면…….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벨그레이브의 영지 바깥으로 나가는 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천하의 염라가 저 추종자 한 명 때문에 친히 거기까지 찾아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우연히 찾아가서 마주친 거라 해도 그 영지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왔을 리가 없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건, 저 맥스라는 남자 스스로 그곳을 빠져나와 여기까지 왔다는 것뿐.
‘대체 어떻게…….’
난 몰래 그 남자에게 접근했다.
그는 낙인 덕분인지 염라의 괴물들에게 적대 당하지 않고 있었다.
“밀리아…… 밀리아…… 거기 있니?”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이다.
‘딸이라고 했나…….’
염라에 의해 괴물로 변해버린 딸이 하나 있다고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모종의 방법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여기 있었구나……. 밀리아.”
그렇게 한참 동안 걸어 다닌 끝에, 그는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꿀럭. 꿀럭.
온몸에서 누런 진물을 토사물처럼 쏟아내는, 거대한 살덩어리를 말이다.
* * *
그건 이미 생물의 형체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져 있는 무언가였다.
온 몸 곳곳에 새나 범, 멧돼지 같은 마수의 신체 부위가 덕지덕지 붙어 있긴 하지만 특정한 짐승의 형태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거대한 덩어리.
땅에 들러붙어 있는 생체 구조물 같은 형상인 것이다.
“밀리아, 그래……. 아빠다. 네가 불러서 여기까지 왔다.”
그 맥스라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저 커다란 살덩어리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부녀간에 남아 있는 영적 고리 같은 게 저런 상태에도 남아서 어떤 힘을 발휘한 것일까.
확실히 저 덩어리에서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느껴진다.
내 몸에 축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지어 저것의 주인인 염라조차도 초월한 수준의 마나.
맥스가 ‘밀리아’라 부르는 저것은 하나의 거대한 생체 마력 발전소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니 어떤 마법의 힘을 써서 자신의 아버지를 불러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염라가 낙인이 찍힌 자들을 비컨 삼아 텔레포트를 하는 게 가능하다면, 역으로 그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래. 이제 나와 같이 있자. 하나가 돼서…… 영원히 함께하자.”
맥스는 그 살덩어리를 껴안았다.
이윽고, 징그럽게 꿀렁거리던 그것은 조금씩 그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곧 육체가 완전히 집어 삼켜질 것처럼, 그 안에 깊숙이 파묻혔다.
스릉.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티르빙을 소환해 냈다.
최대한 빠르게 공격하면 그를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안 돼.’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저벅. 저벅.
이곳에 염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만족하나?”
그는 몸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극심한 상처로 뒤덮여 있는 상태였다.
유메미의 수라멸망꽃 공격으로 인해 입은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아비를 집어삼켰으니, 이제 너도 일을 해야지.”
염라가 그 살덩어리에 손을 대고 말하자, 그것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몸에서 뿜어내는 누런 진물의 양이 훨씬 많아졌고.
그와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요동치며 사방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내 배를 두드리는 듯한 묵직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분노를 힘으로 승화시켜라.”
그 순간, 염라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균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 틈이 벌어지며 저 너머의 다른 차원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붉은 천이 들어 있었다.
‘적패지!’
그것은 곧바로 차원의 균열을 넘어 염라의 손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길고 넓적한, 비단결같이 매끄러운 붉은 천.
거기엔 검은 글씨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맥스가 말했던 대로, 저건 정말 낙인을 찍은 자들이 나열되어 있는 명부였던 것이다.
‘적색파동축적.’
난 그 자리에서 적패지를 태워버리기 위해 체내의 마나를 적색파동으로 변환했다.
주작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저 천을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일격으로 전부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업화의 구.’
거기에 내 기술을 강화시켜 줄, 아지다하카의 불꽃을 온몸에 두른다.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힘을 급격하게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염라는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건 지금 저 앞에 있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파도처럼 뿜어대는 살덩어리에 의해 교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라, 아수라여.”
적패지가 둥실 하늘로 떠오르고, 살덩어리는 마치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곧이어 몸집을 부풀린 살덩어리는 하늘을 향해 주둥이를 내밀고 토사물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그것들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
강한 마기(魔氣)를 지닌, 뿔과 송곳니가 돋아난 흉악한 생김새의 인간형 마물들이었다.
“우오오오!”
저 거대한 살덩어리는 다름 아닌 지상과 지옥을 연결하는 문이었다.
악마들은 밖으로 기어 나와 광기에 가득 찬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파괴와 살육에 굶주린 그들은 당장이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 일을 저지를 기세였다.
‘단순히 강신술을 이용한 언데드 군단을 꾸리는 수준을 넘어, 지옥에서 직접 악마들을 데려오려는 건가.’
그는 바알 같은 대악마가 아니다.
천계에서 죄인들을 심판해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엄연한 인간족 신계의 일원이다.
그런 신이라는 놈이, 떨어뜨린 죄인들을 다시금 불러와 이 세상에 혼란을 불러오려는 것이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돼.’
난 당장 그놈의 행위를 막기 위해, 재빨리 하늘에 떠 있는 적패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주작 제2격, 레바테인.’
화아악!
검에서 뻗어 나온 불의 신수가 날개를 휘저어 대량의 불꽃을 발산했다.
그 불꽃에는 고통의 업화까지 더해져 있어서, 화염의 연소력은 한 층 더 강해져 있었다.
“누구냐!”
염라는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챘다.
그러고는 내 공격이 자신이 아닌 적패지를 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놈은 그걸 거두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화르륵!
이미 화염이 천에 들러붙은 상황.
단순한 주작의 붉은 화염뿐이라면 모르겠으나, 아지다하카의 검은 불꽃까지 더해지자 그 기다란 천은 걷잡을 수 없이 불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염라는 손에서 마력을 방출해 급히 그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이미 붉은 천은 거의 사라지고 난 후였다.
꿀렁거리며 무수히 많은 악마들을 내뱉던 살덩어리는 그때부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또 네놈인가? 앙그라 마이뉴!”
그리고 나는 염라 앞에 본신인 유신우의 모습을 드러낸 채 마주 섰다.
* * *
“정말…… 더럽게 거치적거리는 놈이군.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너희들이 가만히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하지도 않았겠지.”
“닥쳐. 우리가 무슨 짓을 하건 너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무슨 상관이냐고? 너희 때문에 내 가족이 죽고 내가 지옥에 떨어졌다. 그보다 더 큰 상관이 있을 수가 있을까?”
“흥, 그깟 필멸자가 죽든 말든, 뭐가 그리 큰 대수라고.”
신들은 참으로 한결같이 저리도 오만했다.
그건 저승에서 ‘죄인’을 판단한다는 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아.”
그래서 나도 그에게 똑같이 응수해 줬다.
“그깟 불멸자가 죽는 것도 아주 하찮은 일이지.”
“……뭐라고?”
“어차피 나한테 죽으면,”
난 그 앞에서 제우스와 누아다를 정령 소환으로 불러냈다.
“이렇게 내 노예에 불과한 존재가 될 뿐이니까. 한 신계의 주신이라며 군림하던 놈들마저 말이지.”
난 그것들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제우스와 누아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개처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너도 이렇게 만들어줄까?”
“이…… 미친…….”
이 도발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먹혀들었다.
나에 의해 적패지를 잃고서도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던 염라가.
코앞에서 정령 소환을 시전하는 동안에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여유롭던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주먹을 부들거렸다.
“너 이 새끼……. 산 채로 피부 가죽을 벗겨내 주마.”
“할 수 있다면.”
소환한 악마들이 염라의 눈길에 반응해 나를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이번엔 자신이 직접 주먹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악마 군단을 제대로 이용해 전력으로 싸울 생각인 듯했다.
“죽여!”
명령이 떨어지자 이 영지 내에 서 있는 모든 악마와 언데드 괴물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구구궁.
거의 지진을 방불케 하는 진동이 온 사방에 들릴 정도의 대규모 공세.
화악.
난 그 공세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종잇조각들을 흩뿌렸다.
“죽이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그건 한참 전 적패지를 제거한 순간에 주머니 속에서 찢어 놓았던, 유메미가 준 스크롤이었다.
피잉! 쐐애액! 투쾅!
푸른 섬광을 시작으로 온갖 종류의 마법과 무구들이 저 먼 곳으로부터 날아들어 염라의 군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