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144화 (144/348)

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44화

검은 파도가 천천히 전진해 나간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후폭풍도 없이 고요히 눈앞에 보이는 모든 영역을 뒤덮은 검은 기운.

느리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렇게 거리감이 쉬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콰콰콰콰쾅!

곧이어 그 검은 장막에 닿은 모든 것들이 맹렬하게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 범위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

염라의 피소환물인 좀비를 비롯해, 근처의 마물들은 물론이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염라까지.

수라멸망악심꽃은 가공할 위력으로 그 모든 것들을 휩쓸어버렸다.

‘이게 바리공주의 진가인가.’

서천꽃밭 신계는 아발론과 같이 또 다른 인간 신들의 거주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아티팩트를 양산해내는 무기 공장이기도 했다.

수라멸망악심꽃은 거기서 생산되는 꽃들 중 가장 직관적인 파괴 병기인 것이다.

‘저기 있었다면 나도 멀쩡하지 못했겠군.’

유메미가 저 공격을 사용하기 전에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민간인들을 원격 텔레포테이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기에 휘말리면 누가 되었든 뼈도 못 추릴 테니 말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살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후우…….”

권능 사용을 끝마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작전 연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원치 않은 기분.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망친 건가.”

“그런 것 같네요.”

이 필사의 공격으로도 염라는 죽이지 못했다.

큰 타격을 입히기는 했지만, 그 순간 텔레포테이션 마법을 사용해 도망친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또다시 추격이다.

“젠장. 붙잡을 수 있는가 했더니 상대가 너무 강하고, 그걸 꺾는가 했더니 도망쳐 버리고……. 이래선 끝을 볼 수가 없잖아.”

염라는 예상치 못한 수준의 강자이면서 동시에 도주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뒤쫓아 가며 붙잡아야 하는 이쪽 입장에선 극히 불리한 입장인 것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방금 그 권능은 더 이상 쓸 수 없어요. 서천꽃밭의 꽃을 꺾어 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그렇게 준비 시간이 긴 권능을 저런 녀석이 다시 맞아주지도 않을 테고요.”

유메미의 비장의 무기도 밑천이 드러나 버렸다.

그 권능을 사용하는 데 뭔가 제약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걸 차치하더라도 그녀의 말대로 염라가 한 번 당한 공격을 두 번씩이나 당하겠냐는 것.

‘이번엔 그 녀석이 자신이 가진 힘에 취해 방심했지만,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오진 않을 거야.’

심지어 염라는 여기서 자신의 주력 기술인 강신술은 사용하지도 않았다.

나를 쓰러뜨리겠다는 복수심 때문인지, 오직 주먹만으로 해결을 보려 했던 모양.

결국 이번 전투는 수많은 유리한 요소들이 겹쳐져 만들어낸, 우연한 승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으으…….”

그때, 의식을 잃었던 검제가 다시 깨어났다.

“괜찮나?”

“으…… 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한 방에 나가떨어졌어, 너.”

“아…….”

그제야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파악한 건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 대단하던 검제도 별수 없군. 세계 최강자라는 타이틀도 이젠 옛말인가.”

“그런가 보네요……. 하하.”

“웃긴 뭘 웃어? 지금 그럴 상황 아냐.”

“……미안해요.”

깍듯한 태도를 가졌지만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검제가 처음으로 마음이 꺾인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상대를 만난 것은 그녀도 처음일 테니 말이다.

“……분명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보다시피, 그놈은 우리가 생각했던 걸 월등히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렇네요.”

“이제 과거의 데이터는 무용지물이야. 그 기억은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여기서부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 강신술사를 잡아내려면, 단순히 이렇게 우리끼리 움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각 클랜의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펼칠 각오를 해야 한다.

‘만에 하나 그놈이 아후라 마즈다와 접촉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미래를 떠올렸다.

이종족과의 공성전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만약 내가 생각한 대로의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면.

인류는 분열되다 못해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건 아후라 마즈다가 가장 바라는 일일 터.

시간이 흘러 모든 신격들이 필멸자들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인류라는 우군 없이 저 염라와 같은 신들 수백, 수천과 홀로 맞서야 할 터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그나저나…….”

그런데 그때, 유메미가 표정이 잔뜩 구겨진 채로 말했다.

“음?”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 * *

“야마 님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물러가라! 이 악마들아!”

“우릴 원래대로 되돌려 놔!”

“야마 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들은 잔뜩 흥분한 채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혼란과 공포에 빠져 사방으로 짖어대는 그 모습이 마치 주인 잃은 개들 같았다.

“……글쎄.”

유메미는 무고한 살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구출한 듯하지만.

정작 그 구해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 봐야 위협은 전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가면 전부 마물들에게 죽고 말 거예요.”

“그럼 어디 데려갈 곳은 있고?”

“그건…….”

유메미는 내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지난번 쇼핑몰에서와 같은 상황이다.

이들을 억지로 영지 어딘가에 데리고 가려 해봤자 거기서 제대로 지낼 리가 만무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밖을 돌아다니는 마물에 의해 몰살당할 게 뻔히 보인다.

그나마 그때는 사람들이 좀비들에 의해 보호받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없어서 상황이 더 심각한 것이다.

“음…….”

“사실 네 말대로 이 사람들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더 중요한 건 여전히 이들이 염라의 텔레포트 비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야.”

게다가 이 사람들은 염라가 새겨 넣은 낙인의 소유자들.

‘산 제물’로 이용되는 민간인들은 팔뚝에 그려진 표식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술자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언제든지 즉각적인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출입구로 작용한다.

즉, 이들의 존재가 염라의 이동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영지로 데려간다면 그건 곧 저 강신술사에게 안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물론 바깥에 놔둬도 도주로로서 역할을 하겠지만…… 적어도 괜히 영지에 들여놔서 ‘우리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쇼핑몰에서도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둬야 한다고 먼저 주장했던 게 유메미다.

물론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 사람들이 죽을 게 확실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어. 원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건 쉬워도 구하는 건 어려운 법이니까.”

난 그런 그녀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누군가를 구하고 지키려 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희생이 따른다.

그리고 때로는 그 희생이 지키려는 대상보다 훨씬 더 커져 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한쪽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검제 역시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텔레포트와 낙인 연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는 환각 마법으로라도 사람들을 구하자고 주장했던 그녀이지만.

막상 그 원리를 알고 나서 목숨값의 계산이 끝나자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한 것이다.

정의로움과 냉혹함.

무서울 정도의 양면성이 그녀의 내면에 공존하고 있다.

“그럼, 가자.”

“……네.”

그렇게 미련 없이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나려던 찰나.

“……저기.”

민간인 무리 사이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자의 얼굴은 내게 익숙했다.

“……음?”

“당신은……?”

아까 전 강신술사를 불러내려고 소란을 일으킬 때, 우리에게 동조했던 유일한 추종자였다.

어째서인지 괜스레 마음이 쓰였던, 바로 그 중년 남자.

“얘길 들어보니, 문제는 야마의 추종자들에게 새겨진 낙인인 것 같은데…….”

우리 일에 그다지 도움은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던 그가, 대뜸 우리가 했던 대화의 핵심을 짚었다.

“……그런데, 그게 왜?”

“전 이 낙인을…… 제거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현 상황에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핵심을 말이다.

* * *

염라가 추종자들에게 새긴 낙인은 유메미의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걸 지우는 게 가능하다면, 설령 추종자들이 우리에게 협력할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염라의 강신술을 크게 제한하는 게 가능해진다.

우리가 이전에 했던 모든 고민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셈이다.

“낙인을 새긴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부가 있습니다. 거기에 이름이 적히면 낙인이 새겨집니다.”

“명부라고?”

난 그에게 되물었다.

“새겨지는 건 그렇다 치고, 지우는 건? 그 명부에서 이름이 사라진다고 낙인이 지워진다는 보장은 없잖아?”

“제가 봤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번쩍 눈을 뜨고서 대답했다.

그의 눈빛에는 강한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거기서 이름이 지워지면…… 낙인도 사라지는 걸…… 직접 봤습니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그건 진심이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

“하지만…… 그건 이상한데. 염라가 굳이 명부의 이름을 지워서 낙인을 제거할 이유가 뭐가 있지? 그냥 대상을 죽이면 그만…….”

“제 딸이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제 눈앞에서…… 그자는 제 딸을 형용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곤 낙인을 지웠습니다. 전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잠시나마 이 자가 그냥 헛것을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 말을 들으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진짜라고.

머릿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비극적인 기억.

수만 년이 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신들이 나에게서 야드가르를 빼앗던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이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눈앞에서 가장 사랑하는 혈육을 빼앗기는 그 순간의 장면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명부는 붉은 천이었습니다. 거기에 낙인을 새긴 자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습니다. 그걸 불살라 없애버리면…… 분명 사람들도 해방될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그의 설명은 신뢰성을 더욱 높였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붉은 천……. 그거였군. 적패지.’

염라가 저승차사들에게 하사하는,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부.

원래는 필멸자들의 생사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 용도의 아티팩트였을 텐데.

지금 이곳에 나타난 그놈은 그걸 강신술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 유용하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나 현대에 재강림하더니, 신화시대 당시보다 더 악질적인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가만 안 둬.’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놈을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신들이 필멸자를 상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

내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절대 착한 놈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개짓거리를 신이 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그 역겨운 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어 마땅한 것들이다.

하물며 과거와 똑같은, 아니, 과거보다 더한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름이 뭐지?”

“맥스……입니다.”

난 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네 딸의 복수. 반드시 이뤄주마.”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