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38화
나와 유메미는 레아를 찾기 위해 북미로 왔다.
벨그레이브의 본거지가 위치한 이곳.
구 벨그레이브는 실질적으로 네 등분이 나 버렸지만, 수장이었던 레아는 여전히 그 이름을 유지한 채 북미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클랜이라는 것도 여전했고 말이다.
“클랜 마스터라는 녀석이 도대체 뭘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런데 그 거대한 클랜의 클랜 마스터를 만나는 게 쉽지가 않다.
절차 문제 같은 게 아니라, 레아 본인이 너무 이곳저곳 돌아다닌 탓에 아무도 제대로 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예전 같았으면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통신기반시설이 다 무너진 지금은 그것도 안 된다.
새삼 자신들의 문명을 그대로 유지했다던 엘프들에게 부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검제는 예전부터 그랬어요. 뭐든지 직접 가서 해결하고 보는 성격이었거든요.”
“그런 성격에 잘도 리더 자리를 유지했나 보네.”
“필요할 때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나머지는 다 주변 사람들이 해결했으니까요. 그 사람 주위엔 유능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이거 완전…… 무슨 발로 뛰는 대기업 총수의 성공신화 같군.’
생각해보면 레아는 그 특유의 매력으로 여러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인물이었다.
자기 자신이 유능하고 강한 힘을 가졌으면 인맥 부분에서 소홀할 만도 한데, 그녀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SNS 인플루언서에, 벨그레이브 리더에, 세계 최강 각성자 타이틀까지…… 하나만 해도 피곤한 걸 혼자서 다 하고 있었잖아?’
“그런데요.”
“음?”
“신우 씨, 혹시 검제랑 아는 사이세요?”
유메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 TV에서 자주 봤으니까.”
“아, 그래서…… 전 신우 씨가 검제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내가 검제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레아 본인도.
그렇다 보니 내가 그녀를 안다는 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아니…….”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도중, 난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잠깐만. 이 마력 흔적…….”
“네?”
“이거 검제 것, 맞지?”
그건 레아가 남긴 마력의 흔적이었다.
“아, 그렇네요! ……근데.”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
아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새겨진 흔적.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의 눈앞에 뜬금없이, 원래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위적인 열십자 모양의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 불과 몇십 분 전까지 존재했을 두 종류의 막대한 마력이 서로 이리저리 뒤엉켜 남겨진 채로 말이다.
* * *
“검제 씨!”
“음? 마존? 그리고 당신은…….”
우리는 마침내 레아를 찾아냈다.
그녀는 방금 마주했던 그 거대한 전투의 흔적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버려진 주유소 건물에서 홀로 상처를 치료하며 쉬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나를 보고도 짐짓 모른 체하는 레아.
하얀 가면은 예전보다 좀 낡았다는 것을 제외하곤 여전히 그대로였다.
“유신우.”
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명목상의 자기소개를 했다.
“아아. 이름을 들으니 알 것 같습니다. 레아 씨랑 아는 사이시죠?”
그러자 그제야 나를 알아보는 척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예전에 내가 벨그레이브에 가입할 때 스카우터인 레아에 의해 검제에게 직접 소개되었다는 설정이라, 저런 식으로 반응한 것이다.
워낙 하는 일이 많다 보니 그런 세세한 가상의 관계도 같은 건 잊었을 법도 한데, 그녀는 꽤나 치밀하게 자기 캐릭터를 구분했다.
“그래.”
“반갑습니다. 제가 그 검제입니다. 보다시피.”
더 말할 것도 없는 간결한 인사.
이미 그 하얀 가면 자체가 검제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보니, 자기소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내가 아무리 그녀를 알고 있더라도 섣불리 믿는 것은 금물.
어찌 됐든 레아 역시 신화 수호령의 각성자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위험요인은 있다.
난 그 상태에서 곧바로, 유메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불쑥 던졌다.
“영멸이 두려운가?”
그와 동시에 오른쪽 눈의 심연을 개방.
아발론 신계의 일원인 마나난 막 리르를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그러자 순간 검제의 몸에서 투기가 치솟았다.
내가 뿜어낸 기운을 역으로 받아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역시나 유메미와 비슷한 반응.
영멸이라는 단어는 알지도 못하고, 오른쪽 눈의 심연을 그저 조금 적대적 기운 정도로 받아들이는 걸로 보아, 레아 역시 동화율 100%를 달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검제조차도 동화율이 100%가 되지 못했다……. 그럼 대체 누가 신에게 종속당한다는 거야?’
이쯤 되니 궁금해질 지경.
대체 동화율 100%를 달성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검제와 마존이 못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혹시 시스템이 조건을 잘못 만든 게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방금 뭐라고 한 겁니까?”
한편 검제는 방금 내가 한 말에 대해 되물었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
유메미와 검제, 둘 다 나를 사이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한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 의문을 가지는 모습.
이럴 땐 화제를 돌려야 한다.
“그나저나 이 근처에서 무언가와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지?”
난 검제의 마력 흔적이 남아 있던 거대한 인공 계곡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 그건.”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을 꺼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상대였던 모양이다.
“이 근방에서 쓰레기 짓을 하는 놈이 있어서 말입니다. ……결국 놓쳐 버렸지만.”
“쓰레기 짓? 사람이?”
“네. 마물이 아니고 사람이요.”
난 사실 그 말을 들었을 때,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난 후에 같은 사람끼리 싸우거나 전쟁을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클랜 간 전쟁을 통해 영지를 뺏고 빼앗기는, 그런 공성전은 매우 자주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도 흔했고.
그런데 이제 와서 ‘쓰레기 짓’이라고 할 만한 게 뭐가 있냐는 것이다.
“분쟁이 심하게 붙었나 보지?”
난 그런 생각들을 ‘분쟁’이라는 단어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아뇨. 그냥 이게 단순한 클랜 간 분쟁 같은 거라면 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검제가 말하는 건 내 상식을 훨씬 뛰어넘은 케이스였다.
“그 녀석은 악마입니다. 분쟁을 일으켜서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도, 순수하게 사람을 죽이는 게 더 우선 목적으로 보일 정도니 말입니다.”
“순수하게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고요?”
유메미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네. 그놈은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며 영지에 들어가지 못한 약자들을 닥치는 대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럼 그 약자들 입장에선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각성자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거니까.”
“문제는, 그렇게 데려가서 한다는 짓이 자기 강신술의 제물로 바치는 거라는 겁니다.”
“흐음…….”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깥에 남겨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클랜의 책임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전 여태껏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밖을 돌아다니며 그런 사람들을 구출해왔습니다. 우리 클랜원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고요.”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거군.’
“그런데 그 강신술사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마물보다 더 악랄하게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차라리 뭔가 얻을 게 있어서 그러는 거라면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얻을 게 없는데도 싸움을 건다고?”
“그렇습니다. 제일 최악인 부분이 바로 그겁니다. 공성전. 수비력이 약한 영지에 공성전을 걸고, 그 안에 사는 모든 민간인들을 깡그리 죽인 다음, 황폐화된 영지는 버리고 또 다른 곳에 가서 공성전을 건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에엑…….”
“허.”
나와 유메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성을 먹었는데 그걸 그냥 버린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 싸움을 건다?
말 그대로 살육에 미친 사이코나 할 만한 짓이었다.
‘레아가 화가 날 만하군.’
사실 이런 케이스라면 나도 똑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정의의 개념 문제가 아니라, 벨그레이브의 소유 영역인 북미 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점령한 영지를 가혹하게 수탈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건 아예 다시는 영지로서 기능하지 못하도록 파괴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들 클랜 측은 그만큼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고 말이다.
‘이거…… 협정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겠는데.’
이런 상황에서 엘프와의 협정 이야기를 꺼내봤자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그냥 조용히 물러가 주는 게 상책……
‘……아니지.’
……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건 기회였다.
‘이참에 검제를 아예 내 편으로 만들면 되는 거잖아?’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인물.
동시에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냉철한 성격.
이럴 때 도움을 줘서 빚을 지게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갚으려 하게 마련이다.
“좋아, 그럼 그 강신술사의 특징에 대해 말해봐. 인상착의라든가.”
“……네?”
* * *
푸확! 푸확!
온몸에 날붙이가 파고든다.
전신의 상처에서 피가 솟구치듯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튄다.
그 와중에 주변으로 달려드는 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나 느리다.
그 한없이 약해빠진 주먹으로는 적을 쓰러뜨릴 수 없다.
그래서 힘을 줘보지만,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인지 몸에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콱! 투확!
다시금 날붙이가 온몸을 파고든다.
결국 누적된 상처로 인해 힘이 완전히 빠진다.
그대로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쿨럭……. 쿨럭…….”
이런 상처를 입었으면 이미 신경은 마비되었어야 정상이나, 통증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이상할 정도로 온몸이 아프다.
그만하고 싶다.
이 악몽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저벅. 저벅.
그때 누군가가 걸어온다.
검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동자.
소름 끼치도록 짙은 악의가 가득 담긴 저 눈빛.
그 남자의 이름은…….
‘유신우.’
간신히 떠올렸다.
그 저주스러운 이름을.
그 순간, 눈앞에 어떤 메시지들이 나타난다.
{특성 <저승차사의 명부>가 발동됩니다.}
{수호령과 함께 임의의 비각성자의 몸으로 전생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점차 기억이 선명해진다.
자아가 확연해진다.
‘그때 그 주차장. 거기서 난…… 단 한 번 발동되는 전생 특성에 의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나 리.
칼리닌스카야 브라트바의 하급 사냥개였던 여자.
유신우를 쫓다 그의 계략에 걸려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던.
그녀가 악몽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염라대왕과의 동화율이 0.01% 상승했습니다: 100%}
{신화 수호령의 동화율이 최대치에 이르렀음에 따라, 신격이 육체를 지배합니다.}
“……큭…….”
그녀가 웃었다.
“큭큭큭큭…….”
그건 환희였다.
키에에에엑!
그러자 온 사방을 가득 메운 망자의 군단이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