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107화
결계가 깨진 순간부터 승부는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내성에 남아 있는 오크 측 병력은 이미 내 미스텔테인 테러에 의해 대부분 죽어 나간 후였다.
물론 그쪽엔 내가 붙잡지 못한 신화급 각성자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그는 백선율이나 최윤아, 둘 중 한 명의 선에서 완벽히 제압되는 수준이고.
그저 병력은 거의 빈 거나 다름없는 내성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며, 네 군데의 점령 포인트를 점거해나가면 끝.
지금 나에게 발목 잡힌 세 명의 신화급 오크 각성자들은, 이제 와서 내성을 방어하러 가려고 해봐야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
그렇게 그대로 점령이 완료되는 순간, 공성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젠장…….”
세 명의 신화급 각성자 오크들은 나를 몰아붙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전투에선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전쟁에선 패배.
이런 건 꽤 흔한 일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룰과 목표가 확실하게 정해진 게임 같은 전쟁에선 더더욱 그렇다.
“젠장……. 인정할 수 없어!”
슈화아아악! 쾅!
오딘 수호령의 오크가 투창에 날카로운 칼바람 돌풍을 실어 던졌다.
난 그것을 미스텔테인으로 막아냈다.
“저놈의 목숨만이라도……!”
그는 끝까지 발악했다.
질 때 지더라도 나를 죽이겠다는 일념하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공격을 퍼부으려 했다.
카앙!
“그만!”
그러나 그런 그를 막은 건, 다름 아닌 같은 편인 외팔 오크.
티르 수호령의 각성자였다.
“요르겐! 날 막지…….”
“우린 패배했다!”
그가 끝까지 발악하려는 오딘 수호령의 오크에게 근엄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저자를 죽일 수도 없다. 이제 그걸 깔끔하게 인정해야 한다.”
의외로 저자는 상당히 신사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단순히 태도가 신사적인 것을 넘어, 저런 행동 뒤에는 합리적인 판단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더 싸워봤자 우리 힘만 빼는 거다! 조금이라도 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이곳에서 탈출하는 게 살길이라는 걸 모르겠나?”
공성전에서 패배한 쪽의 영지는, 공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소멸한다.
승패가 갈라지는 순간, 승자와 패자는 각자의 영지로 이동하게 되니, 그 말인즉 패자는 모두 죽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패자들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바로 승패가 갈라지기 전에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지금 이들 역시 명약관화한 패배 앞에서, 구질구질하게 나와 싸우다 갑작스러운 승패 판정에 의해 어이없이 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도주하는 게 낫다.
저 외팔 오크는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해 자기 편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젠장…….”
결국 그들은 시스템 메시지를 띄워 도주하기 시작했다.
토르 수호령의 각성자는 말없이 사라졌고, 오딘 수호령의 각성자는 분해하면서도 별수 없이 그 말을 따랐다.
“너.”
그렇게 다 같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떠나기 직전, 티르 수호령의 각성자인 외팔 오크가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
“좋을 대로.”
“기억해 놔라. 내 이름은 요르겐이다.”
“그러도록 하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에 있던 다른 오크들도 모두 이 공간을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팟. 파앗.
우리가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던 자들도.
부상을 입은 자들도.
마지막까지 아군에 맞서 싸우던 대항군들도.
모두 탈출했다.
이윽고 알포드 성 내의 오크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제1차 알포드 성 공성전의 승자는 <제1인간계>의 <알포드> 클랜입니다.}
* * *
“백선율. 고맙다.”
난 우선 그를 찾아가 감사를 표했다.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내 지시에 따라준 것에 대한 감사.
“이번 공성전은 사실상 네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싸움이었을 거다.”
그건 진심이었다.
오전의 전면전에서 휴전을 끌어낸 것, 그리고 야간 작전에서 후방 타격의 주 화력이 되어준 것.
모두 그의 공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난 그저 지휘관인 당신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그것도 모두 네 도움 덕분에 작전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거지. 어쨌든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천만에. 어차피 우린 같은 인간이 아닌가? 이종족과 싸우는 데는 얼마든지 힘을 보태겠다. 나중엔 당신도 우리 클랜을 도와야 할 거다.”
“언제든.”
다시금 느끼는 거지만, 백선율은 첫인상에 비해 매우 상식적인 사고방식과 언행을 가진 자였다.
말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이번 도움을 핑계로 무리한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클랜의 공성전이 있을 때 도와달라는 것 정도뿐.
오만하고 비열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처음의 생각이 그저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같군. 이자는 생각이 상당히 똑바로 박혀 있는 인물인 것 같다.
아흐리만 역시 내 의견에 동조했다.
“그나저나, 전투 후에 든 생각인데 말이다.”
“응?”
“적의 전력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것 같더군. 당신도 느꼈겠지만, 많이 버겁지 않던가?”
한편, 백선율은 오크들과의 싸움에서 확연히 드러났던, 전력 차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긴 하지.”
“우리 둘 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너와 나 정도의 강자가 참전한다면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겸손하게 말할 것도 없어. 성황 백선율이 직접 뛰어든다. 그러니 무조건 이긴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잖아? 너 스스로도.”
“……그래. 솔직히 그랬다.”
그는 괜히 ‘너와 나’라는 표현을 써 가며 나를 띄워줬지만, 굳이 내 앞에서 그럴 것도 없었다.
이 ‘매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의 실력에 대해 못 미더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무려 ‘성황’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엄청나게 고전했다는 거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서 백선율은 나름대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신화급 각성자, 최윤아까지 데리고 왔는데도 그랬다.
“아무튼, 그래서 대체 왜 그렇게나 전력 차이가 컸던 거라고 생각하나?”
“그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병력의 질.
이 공성전은 나름대로 밸런스를 위해 수비 측과 공격 측에 참여할 수 있는 최대 인원수가 정해져 있다.
당연히 공격 측에 허용되는 참가 인원이 더 많고.
그런데도 우리가 힘에서 밀렸다는 건, 적군 하나하나의 능력이 훨씬 높다는 뜻이다.
특히나 다른 것보다도 영향이 컸던 요인은 신화급 각성자의 수.
“……각성자 때문이겠지.”
“맞아. 당신도 상대해봤으니 알겠지? 저쪽의 신화 수호령 각성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들인지 말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에선 당신의 재치와 생소한 기술들로 어떻게든 이겼지만, 다음부터 그런 건 통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그때는 철저한 힘 싸움 위주의 전투가 될 거야.”
“……그래서 네 말의 요지가 뭐지? 우리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건가?”
“아니지. 그게 아니야.”
“그럼?”
백선율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우리도 신화 수호령의 각성자들을 더 많이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더 많이 데리고 있다니……. 검제나 염왕을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오크들 또한 서로 적대적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협력을 끌어낸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원론적으로는, 우리 인간들 역시 잠시간의 휴전을 하고 다 같이 협력하는 게 이상적인 일이겠지.
하지만 백선율의 말의 진의는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신화급 각성자.”
“새로운 신화급 각성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난 그 말을 그대로 되짚었다.
“그래. 양성해 내는 거다. 내가 최윤아를 신화급으로 길러낸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서슴없이 자기 휘하 클랜원의 전력을 노출하며 그리 말했다.
난 이미 그녀의 수호령을 악의의 오른쪽 눈으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자기 입으로 그걸 누설하는 건 다른 차원의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각성자들을 신화급으로 키워내자는 소리를 말이다.
“매튜,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가 한 가지 뭔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당신 정도의 다이아 동원력이라면 우선 신화급 각성자 양성의 전제조건인 전설급 각성자 확보를 누구보다도 쉽게 해낼 수 있다. 그 과정에 필요한 각종 부가적인 요구사항들은 내가…….”
그는 내게 패치노트를 얻게 해준 다이아 획득 능력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이아는 직접 양도할 수 없고 퀘스트 계약으로 보상을 이전받아 모으는 수밖에 없다.
즉, 내 능력으로 얻는 다이아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들에게 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거 곤란하게 됐군.’
그는 뭔가 인류를 위한 아주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난 그런 계획에 호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가? 내 계획이?”
“그, 그래. ……좋은 것 같군.”
일단은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난 적당히 그의 말에 수긍하는 것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백선율은 내 속사정도 모르고 “좋아!”라며 들떠 있었다.
정말 인류의 승리에 진심인 녀석인 것 같다.
* * *
“형님? 형님 맞죠?”
눈을 붕대로 감고 있는 이진윤이 내 기척을 알아채고 그렇게 말했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는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였다.
“가만있어. 무리하지 말고.”
“아닙니다! 저 지금 완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아직 몸의 컨트롤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을 정도로 상처가 심하다는 증거다.
“너 지금 손 떨고 있어.”
“어엇? ……아, 하하하.”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는다.
하지만 저건 저렇게 그냥 웃어넘길 만한 상처가 절대 아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영원히 전신 마비가 왔어도 모자랄 만한 중상.
그나마 각성자라는 축복받은 신체 덕에 여기까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십니까? 저한테 뭐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꼭 용건이 있어야 되나?”
“예? 그럼…….”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너 상태 어떤지 보러 온 거야.”
“헉.”
그가 갑자기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더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혀, 형님…….”
사실 나 개인적으로는 백선율보다도 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이진윤이었다.
이 녀석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나와 친구들을 살려내려고 한 것이니 말이다.
전체 공성전 흐름으로 보자면 백선율의 영향력이 더 컸지만, 자신의 몸을 던져서 나를 지키려 했던 이진윤의 활약은 단순히 성과만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는 확실히 성장했다.
처음 만났을 때, 겁에 질려 숨기 바빴던 그 모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누구보다도 용기 있게 앞서 나가서 남들을 지켜줘야 할 전위 방어 포지션.
그 역할을 이젠 거의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윤아.”
“예?”
그러니 이제 그에게도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너 몸 다 회복되면, 신화 수호령 얻으러 가자.”
“예에에에에?”
그 순간, 이진윤의 떨리던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