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99화
“백선율이다.”
“매튜.”
나는 이진윤의 소개로 만나는 것처럼 위장하고 백선율을 만났다.
당연히 유신우가 아닌, 다른 인물로서 말이다.
지금 난 이쪽으로 날아오는 도중에 포식했던 뱀파이어의 모습으로 외모를 바꾼 상태였다.
굳이 가만있던 인간을 잡아먹을 수는 없었기에, 일부러 인간과 가장 닮은 마물인 뱀파이어를 고른 것이다.
다행히 그 뱀파이어의 외모는 흠잡을 데 없으리만치 완벽한 백인의 모습이었고, 이름도 적당히 흔한 이름을 지어냈다.
“영어가 좀 서툴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선율은 금세 나로부터 어떤 수상함을 간파한 모양.
그는 굳이 초면에 지적하지 않아도 될 부분을 지적했다.
내 어색한 영어 억양 때문이었다.
“모국어가 아니라서.”
“굳이 서툰 말로 할 필요는 없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뭐든 가능하니 그쪽이 더 편한 말로 얘기를 나누자고.”
역시 로얄 패밀리라는 건가.
그는 수십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나에 대한 압박을 더욱 좁혀 들어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한국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영어로 하지. 그게 더 직관적으로 말이 통할 테니까 말이야.”
난 그래서 그냥 내 의사를 밀어붙였다.
“뭐, 정 그걸 원한다면.”
백선율도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서 붙잡고 늘어지진 않았다.
그는 씩 웃으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래, 얘기는 들었다. 영국에 자리 잡고 있는 클랜이라고.”
그러고는 곧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뭐지?”
“알려줄 게 있어서.”
나 또한 거칠 것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다리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패치노트를 보여줬다.
“……이건.”
역시, 아무리 초반부터 내 기선을 제압했던 그라지만, 이걸 보고도 여유만만한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백선율은 그걸 보자마자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난 그런 그의 눈앞에서 잠깐 동안 띄워놓았던 패치노트를 치워버렸다.
“……당신이 경매 낙찰자였군.”
“그래.”
백선율은 이제야 나에 대해 알아봤다는 듯, 아까와는 달리 진중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매튜라는 이름의, 영어를 어색하게 구사하는, 처음 보는 남자.
그런 사람이 패치노트를 쥐고 있다.
스스로 세상을 지배하던 지배자의 일원이었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건 꽤나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여버릴 수도 있는데.”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강력한 경쟁자인 나를 제거할 생각부터 떠올렸다.
“내가 왜 당신 손에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난 예전의 그 약해빠진 유신우가 아니다.
염왕의 손에 속수무책으로 멱살이 잡히던, 그런 때는 이미 지나갔다.
지금 난 칭호만 얻지 못했을 뿐, 사실상 1급 각성자와 거의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신화 수호령을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직접 소환까지 해낼 수 있다.
이게 다 벨그레이브에서 훔쳐 온 과거 5년간의 패치노트 내역과 시련에서 얻은 악룡포식 덕분이었다.
“흥, 힘으로는 못 뺏는다, 이건가?”
백선율 또한 그렇게 말해놓고도 내 안에 잠재된 힘을 느꼈는지 섣불리 움직이진 못했다.
“정답.”
“그래서 이렇게 하는 진의가 뭐냐?”
난 다시 백선율에게 패치노트를 띄워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을 빠르게 훑어나간다.
“보다시피, 내년부터 인류는 이종족들과 전쟁을 벌일 거다. 이 정보가 없으면 제대로 된 대비도 하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겠지.”
“공성 토너먼트…….”
“그래서 난 우리가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다른 종족들 중에서도 이 패치노트를 받고 힘을 합치는 자들이 생겨날 테고, 그러면 우리는 이종족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는 꼴이 될 거다. 인간끼리 서로 싸울 땐 싸우더라도, 이종족에게 당하는 일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
내 설득을 들음과 동시에 패치노트 내역을 빠르게 속독한 그가, 다시 아까처럼 몸을 뒤로 젖혔다.
“결론은 나보고 도와달라, 이거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백선율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미소를 지었다.
누가봐도 저 머릿속에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는 표정이다.
‘진짜 더럽게 찝찝한 인간이군.’
난 그런 그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면에 상대방 영어 억양을 지적하는 무례함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분 나쁜 것 투성이다.
-동감이다.
그건 아흐리만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도와주지.”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금세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월 1일, 알포드 성. 이게 당신 클랜 소유의 성이겠지?”
그리고 내가 말한 적도 없는 내 소유의 성을, 눈치만으로 알아맞혔다.
“……그래. 맞아.”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곧장 도와주도록 하지.”
심지어 즉각적인 지원 약속까지.
현재 백선율이 운영하고 있는 클랜은 ‘백산’ 클랜.
인류를 대표하는 4대 클랜 중 하나이니, 이곳에서 우릴 도와준다면 상당히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그럼 병력은…….”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그런데 그가 도와주겠다는 제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었다.
“……당신이 직접?”
“왜, 싫나?”
“아니, 아니야.”
성황의 직접적인 공성전 참전.
그런 전력이라면 당연히 질 리가 없다.
* * *
회담이 끝난 후, 난 백산 클랜의 영지 안에서 잠시 기다려야 했다.
알포드 성으로 가기 전에, 이것저것 처리할 일들이 있다는 백선율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 녀석……. 머리 위에 수호령이 보이지 않았어.’
한편, 난 아까 그에게서 수호령을 보지 못했다는 것에 상당한 수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백선율이 맞는데.’
그가 비각성자인 가짜 백선율이라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연예인처럼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어서 나도 보자마자 알아볼 정도였고.
무엇보다 같은 집안 사람인 이진윤 역시 백선율이 맞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의 몸에서는 절대 보통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충만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흐리만, 뭐라고 말 좀 해봐.’
난 ‘악의의 오른쪽 눈’ 특성의 원주인인 그에게 이 현상에 대해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러나 그 역시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던 신화시대엔 ‘수호령’이란 게 없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강자라서 수호령을 숨길 수 있는 능력 같은 게 있는 건가?
‘그건 강함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
난 지난번 레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수호령인 ‘마나난 막 리르’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훨씬 더 약했었고, 검제는 성황보다 더 강력한 강자로 알려져 있는 걸 생각하면, 이 현상은 강함과는 무관한 것 같았다.
‘아리송할 따름이군.’
결국 그의 수호령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지 못한 채로 대화가 끝났다.
“형님.”
그때, 이진윤이 걸어왔다.
그는 나를 백선율에게 소개시켜 주기 위해, 영국에서 이곳 백산 클랜의 영지가 위치한 한국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뭐야, 너 울었냐?”
“……아닙니다.”
그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가족들이랑 얘기가 잘 안 됐나 보네.”
“……네.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이진윤의 가족들은 모두 그를 외면하고 이곳에 살고 있었다.
각성자일 때부터 지금까지, 인정받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지만.
그 뒤에 무슨 자세한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완전히 갈라선 신세가 된 것이다.
“괜찮아. 나중엔 다 잘될 거야. 그런 것 가지고 신경 쓰지 마.”
“……네.”
내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이진윤의 표정은 하나도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는데 위로가 될 리가 있나.
‘나보고 어쩌라고. 난 가족이란 게 아예 없어서 저 상황에 공감을 할 수가 없단 말이다.’
-쯧쯧. 네놈도 어지간히 불행한 인생이군.
불행의 대명사인 아흐리만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까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야, 됐어. 그냥 지금 옆에 있는 사람끼리 잘 지내면 되는 거야. 다리우스 그 녀석이 하는 말 못 들었냐? 우린 다 패밀리라고.”
“형니임…….”
“그러니까 질질 짜지 마. 네 옆에 가족은 없어도 패밀리가 있잖아.”
그래서 그냥 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이 말이 ‘네 가족은 됐고 나한테나 잘해라’라는, 조금 이기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통했는지, 이진윤의 얼굴은 매우 감동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한테……. 잘…….”
그런 그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나를 향하다, 점점 초점이 흐트러졌다.
그는 내가 아닌, 내 뒤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게요.”
심지어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이다.
“오랜만이네, 이진윤.”
“으, 응.”
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최윤아였다.
옷차림도 그렇고, 분위기가 지난번 봤을 때와는 또 확 달라진.
마치 여왕같이 화려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이었다.
* * *
백선율이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한 병력은 단 두 명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과 최윤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둘 다 기준 이상의 능력을 가진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쩌저적. 쩌억.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최윤아가 손에서 마력을 뿜어, 직경 5미터쯤 되는 둥근 원형의 마법진을 바닥에 그렸다.
나와 이진윤, 백선율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그 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여긴 한국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는, 다름 아닌 알포드 성이 위치해 있는 영국.
아음속으로 순항하는 항공기를 타고도 10시간 이상은 거뜬히 비행해야 하는 거리였고.
세상이 멸망해 기존의 이동수단을 기대할 수 없는 지금은, 아지다하카의 날개로 날아가더라도 꼬박 1박 2일을 꽉 채워 날아가야 할 만큼 먼 곳이었다.
그 먼 거리를.
쿠구구궁. 쿠궁.
마치 땅을 접는 것처럼, 순식간에 공간을 왜곡해 바로 코앞에 닿게 만든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시간은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최윤아는 그런 엄청난 이동 마법을 사용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수고했다.”
백선율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눈앞에 있는 알포드 성 진입 포탈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어…….”
이진윤은 그런 엄청난 권능을 사용한 최윤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심정은 그와 마찬가지.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군.’
하물며 난 더더욱 최윤아를 보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눈엔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수호령이.
{수호령: 다누(신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역사 수호령을 가지고 있는, 여느 각성자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최윤아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새 신화 수호령을 가진, 백선율과 거의 대등한 인물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단지 그녀가 신화 수호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 몸에서 풍겨나오는 저 위엄. 공간이동까지 할 수 있는 대지 조작 능력. ……저건 확실히 어머니 여신 ‘다누’가 맞다.
다누.
다누 족.
난 그 이름을 이미 들어본 적이 있다.
바로 누아다의 수호령을 얻는 시련에서 말이다.
아발론 신들의 종족 명으로 불리던 바로 그 이름.
어머니 여신 다누.
‘모든 아발론 신들의 선조 격에 속하는 수호령을…… 최윤아가 가졌다는 건가?’
-그래.
누아다, 루, 마나난을 태어나게 만든 바로 그 존재의 힘이, 지금 최윤아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