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92화
다누 족 디안케트의 아들 키안.
포보르 족 발로르의 딸 에스니.
그 사이에서 태어난 루 라바다.
금단의 사랑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격노한 발로르에 의해 버려지고.
그 아이는 친부인 키안에 의해 마나난 막 리르에게 맡겨진다.
그렇게 루는 마나난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철석같이 믿으며 자란다.
이후 그는 일련의 사건을 거쳐 포보르 족 혼혈에 대한 극심한 혐오주의자가 되어버렸지만.
종국에는 정작 자기 자신이야말로 바로 그 포보르 족 혼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유신우는 루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전에 빠르게 시나리오만 끝내고 도망치려 했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해서야, 이 꼴사나운 광경을 볼 수 없지 않은가.
어차피 환상이지만, 그래도 실제 신의 인격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이곳에서만이라도 저놈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었다.
“루. 갑자기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네 손으로 부모를 죽이는……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이딴 더러운 포보르 년의 피가 내 몸에 흐른다고?”
자신이 저지른 업보가 그대로 비수가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그동안 질투와 복수심, 증오심으로 타오르던 그의 눈동자 속 불꽃이 사그라진다.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루는 이제,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비극이로군. 하하하하!”
난 그런 그를 한껏 비웃어주면서, 메인 시나리오의 종료를 맞이했다.
어쩐지 너무나도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이곳에서의 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메인 시나리오 클리어}
{시련이 종료됩니다. 당신에게 메인 시나리오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신화 수호령, 누아다 아르게틀람이 당신의 수호령이 됩…….}
{누아다 아르게틀람의 영혼을 흡수한다.}
{악의의 전당 소환 무구 목록에 <성검 클리브 솔리쉬>가 추가된다.}
{아지다하카와의 동화율이 증가했다. 41.39%}
그와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렇게나 신들을 미워했는지, 왜 루 라바다의 비극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인지.
이곳, 티르 나 노그 또는 아발론이라는 신계의 인간 신들이 왜 나의 원수가 되었는지.
그때의 기억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신화시대.
나는 야드가르와 사람들을 구출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오크 족 영토를 가로질러 되돌아오는 길에 위협은 없었다.
이미 아르테미스마저 집어삼켜 버린 나를 그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아, 아니? 저 흉물스러운 것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악마가 이 땅까지……!”
그렇게 돌아온 나를 맞이한 건 신관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오크들에게 모조리 잡혀가던 그 순간에도, 용케 자기들만 아는 은신처에 숨어서 살아남은, 야비한 족속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질겁하며 자신들의 종교 상징물인 날개 조각상을 들이밀었다.
“그는 아흐리만 장군입니다! 악마가 아닙니다!”
나와 대장정을 함께 한 주민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이런 말들이 오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건 바로 내 몸이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온몸을 뒤덮은 검고 딱딱한 비늘.
짐승의 것보다도 더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
족히 장정 수십 명을 뒤덮기에 충분할 만큼 커다란 날개에, 허리 아래에서 뻗어 나온 파충류 꼬리까지.
난 그야말로 악마를 연상케 하는 외형이 되어 있었다.
“아흐리만……! 역시, 네놈은 앙그라 마이뉴였군!”
신관들은 날더러 자신들의 경전에 기록된 악마, 앙그라 마이뉴라고 불렀다.
그래, 차라리 악마가 되어서라도 나와 내 가족,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신 ‘아후라 마즈다’ 따위보다, 조금 흉측해도 이 자리에 실재하는 악마가 나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우릴 지켜줬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우리가 잡혀갈 동안 뭘 해줬지?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우릴 구하러 와줬어!”
“더 이상 신관은 필요 없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리고 이제 사람들도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황된 믿음 따위보다, 눈앞에 존재하는 진짜 힘에 의지하는 게 옳다고.
“이…… 어찌 이런…….”
신관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들의 권위는, 대중을 속이고 호도해 만든 거짓에서 나온 것.
이제 사람들이 그 거짓을 깨달았으니, 앞으로 저런 쓰레기들은 더 이상 설치지 못할 것이다.
“이놈들! 조용히 하지 못할까!”
대신관이 분노한 군중들 앞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소리쳤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모양.
……이라고 생각했는데.
“너희 모두 천벌을 받을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께서 우리에게 직접 강림하셨으니 말이다!”
그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기 뒤에 서 있는 어떤 남자를 가리켰다.
그자는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아리따운 남자였다.
“모두 머리를 조아려라!”
난 처음에 그것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대신관의 말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그자의 몸에선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강한 마력이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신.’
그래, 그건 신이었다.
그것도 아르테미스보다 월등히 격이 높은 신이었다.
“어, 어떻게 된…….”
신관들에게 항의하던 사람들은 금세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기운을 느끼는 건 나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외모, 분위기, 태도, 모두 단순히 허풍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위압적이었다.
“네가 아흐리만이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신이시여! 저런 불경한 자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옵소서! 저 악마는 저희가 직접…….”
“모두 물러가라.”
그러고는 자신의 옆에서 호들갑을 떨던 신관들을 전부 물리쳤다.
“아…… 알겠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아후라 마즈다라는 자의 말에 복종하는 것 외엔 없었다.
나와 함께 귀환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난 그자와 단둘이 남았다.
* * *
“반갑다. 아흐리만.”
아후라 마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지금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네가 정말…… 저 신관들이 말하는 아후라 마즈다라고?”
“그래, 내가 바로 이곳 사람들의 신이다.”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지?”
그 낯짝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대체 그렇게나 간절한 사람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가호나 축복을 내리지 않았는가.
왜 다른 종족들에게 유린당하는 우리를 이렇게나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인가.
“실험이었다.”
“……뭐?”
“인간은 과연, 신의 도움 없이 어디까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가? 라는, 순수한 호기심.”
“……실……험? ……호기심?”
“그래. 몇천 년 전까지만 해도 난 너희들에게 이런저런 축복을 내렸지. 그땐 솔직히 내 능력을 찬양하며 승승장구하는 신자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취해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했더니 어느샌가 너희의 선조들은 대제국을 건설해 있었다.”
역사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한때 우리의 왕국이 엄청나게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러던 그들이 이렇게까지 몰락하고 만 것은, 그 번영에 취해 탐욕과 나태함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벌을 내린 건가? 그 타락한 사람들 때문에?”
“아니.”
“그럼?”
“질렸다.”
“……?”
“매번 가호를 받아 이기고, 승승장구하고,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는 걸 보다 보니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반대로 몰락하게끔 한번 내버려 둔 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엔 어떠한 악의나 선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즐거운 놀이에 대해 설명하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
“그러다가 결국 아까 말한 것처럼 의문이 들었지. 과연 너희 필멸자의 한계는 뭘까?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궁금증 말이다.”
결국 저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었다.
내 아내, 모나, 그리고 대장군을 포함한 모든 희생자들.
그들이 전부 이 신이라는 존재의 하찮은 호기심 때문에 죽어버린 것이다.
“겨우 그딴 호기심 때문에?”
“그래. 내가 미쳤지. 그딴 호기심 때문에 너 같은 존재를 탄생시키다니.”
“미친…….”
역시 신이라는 것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난 곧장 손톱을 세우고 이 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잠깐. 기다려라. 후회할 짓은 않는 게 좋을 거다!”
“닥쳐.”
“난 널 도우러 온 것이다.”
아후라 마즈다는,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의 여유롭기만 하던 태도와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정말로 다급해 보였다.
“네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난 그 한마디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들……. 그래. 야드가르.
내 마지막 희망.
그 때문에라도 일단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래. 그래야지.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아후라 마즈다는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지금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원래 우리 불멸자들끼리는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죽지도 않는 우리끼리 전쟁을 하다가는 온 세상이 다 부서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대신 필멸자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며 전쟁 욕구를 달래고 있던 거였는데…….”
“내가 아르테미스를 죽였다?”
“그래. 그래서 지금 올림포스의 신들 전부가 엄청나게 분노했다. 이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당분간 좀 숨어 있어야 할 것 같다. 올림포스의 신들 눈에 띄지 않도록. 그동안 이 사태의 원인인 내가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숨어서 지내라니.
솔직히 내가 왜 이런 미친 것들을 피해 다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서 전부 아르테미스처럼 소멸시켜도 모자랄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난 그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겐 야드가르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신들을 다 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싸움 과정에서 연약한 필멸자인 야드가르가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좋아. 네 말대로 하지.”
“잘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어디에 숨어 있어야 하지? 내가 아는 곳 중에 그 신이란 것들의 눈을 피할 만한 장소는 없는데.”
그건 바로 은신 장소.
신들은 세상 모든 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어디에 숨든 금방 발각되고 말 터.
하지만 아후라 마즈다는 그에 대해서도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인간 신들이 있는 곳에 숨으면 된다.”
“우리와 같은 인간 신들?”
“그 녀석들도 올림포스 귀쟁이 놈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분명히 우릴 도와줄 거다.”
신계 아발론.
혹은 티르 나 노그라고도 불리는 세상.
내가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