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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87화 (87/348)

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87화

결투.

그건 여기서도 흔한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예와 무력을 중시하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내 선언이 아주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결……투?”

“그 루 라바다에게?”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왜? 무섭나? 무서우면 솔직하게 말하고 인정하면 된다. 싸우고 싶지 않다고.”

루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는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혈관이 터질 듯 벌겋게 충혈된 눈이 그의 모욕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네가…… 감히?”

“그래. 너와 나. 정정당당하게 일대일 대결로.”

이건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무인(武人)이라면 누구든지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다.

심지어 폭력이 엄격히 제한되는 현대에서조차 마찬가지.

싸움을 좀 한다 싶은 사람이, 대놓고 대결을 걸어오는 자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아직 야만적 관습이 남아 있는 이런 곳에선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는지 보자.”

루가 곧장 등에 둘러메고 있는 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 또한 인벤토리에서 큐브를 꺼내들었다.

“자, 잠깐! 잠깐만!”

어떠한 사전 신호도 없이 서로 무작정 부딪히려던 찰나, 우리 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건 투이렌이라는 중년 남자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길거리에서 함부로 싸움질을 하다니!”

“비키시죠. 저자가 먼저 나를 도발했습니다.”

“정신 차려라! 넌 다누 족에서 세 번째로 강한 무장이다! 그런 자가 마을 안에서 싸움질을 하다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냐? 지금처럼 엄중한 시기에!”

‘저자는…… 분명 사사건건 루에게 시비 걸던 인간이었는데.’

그는 회의 때부터 시작해서 항상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비치던 ‘리’였다.

그런 그가 지금 루의 목숨을 걱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힘이 있으니 도전을 받아들여야죠.”

“하……. 이봐! 당신!”

이번엔 투이렌이 나를 불렀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이방인인 주제에 어째서 전사의 명예를 들먹이면서 이런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냐?”

“이유를 묻는 건가?”

“그래! 타당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넌 다누 족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할 거다. 감히 ‘우리’의 정신을 모욕했으니 말이다!”

그는 나를 상대로 영리하게 이 상황을 이끌어가려 했다.

루 혼자만이 아닌, 다누 족 전체를 모욕했다는 식으로 몰아가서 일대일 대결이 성립하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

확실히 나이가 있는 자라서 그런지, 꽤나 그럴듯한 판단을 하는 자인 것 같다.

성향 자체도 냉철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던 온건파 쪽이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막진 못했다.

“이유라면 차고도 넘치지.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동료로 여기며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리아 팔이 예언으로 차기 아르드리에 대해 언급했을 때부터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루가 나의 명예를 대놓고 모욕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에게 아르드리가 될 자격이 없는 거라고.”

결투의 표면적인 이유야 뭐든 갖다 붙이면 그만.

“아니, 그건 당연히…….”

“그래서 난 이 대결로 증명할 것이다. 내가 루보다 먼저 아르드리가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내 말이 억지 같아도 상관없다.

왜냐면 이걸로 그에게도 싸워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 또한 자신의 힘을 깎아내리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비키시죠.”

루는 이미 창을 꺼내들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살벌한 투기가 벌써 나를 죽이려 들고 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에 맞장구를 쳐 주려는 건가!”

“……애초에 다누 족 외의 잡종들은 모조리 죽여 없애버려야 했는데.”

그의 귀엔 더 이상 자신을 만류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극단적인 순혈주의까지 들먹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럼 정당성은 충분히 성립된 것 같으니, 이제 조건에 대해 이야기 하지.”

난 그렇게 불타오르는 루에게 아랑곳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기면 넌 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돼. 어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대신 네가 이기면 어떻게 할래? 네가 원하는 대로…….”

“……왜냐하면 넌 여기서 죽을 거니까.”

물론 그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쐐애액!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창의 길이가 갑작스럽게 늘어났다.

* * *

투이렌이 말했듯, 루는 이곳 다누 일족에서 세 번째로 강한 무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그보다 강한 자는 마나난과 누아다뿐.

하지만 마나난은 그의 아버지이니 싸움으로 우열을 가리는 건 패륜이고, 누아다는 루 자신도 고개를 숙이고 존중하는 인물이라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날 듣도 보도 못한 이방인 하나가 나타나, 그에게 자기 아래임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다.

루는 당연히 이 도발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지. 놈이 가진 군권을 무너뜨리려면.’

루 라바다는 다누 족에서 실질적인 2인자다.

마나난은 애초에 고독한 늑대 같은 인물이라 제외.

여기서 만약 휘하의 전사들이 1인자인 누아다에게 불만을 가진다면, 당연히 2인자인 루에게 붙으려고 할 것이다.

사실상 무력이 권력과 거의 등치되는 이 사회에서, 그가 군권을 장악하기가 매우 쉬웠을 거라는 뜻이다.

-이 결투로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겠다는 건가?

‘그렇지.’

-차라리 아예 죽이는 게 어때?

‘그건 안 돼.’

-어째서냐?

‘루가 죽으면 그 아래에 있는 놈이 루의 역할을 대신할 테니까.’

불온한 2인자 세력은 대대적인 숙청이라도 벌이지 않는 한 우두머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부활한다.

따라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숙청 작업을 제외하면, 아예 루 라바다를 산 채로 내 밑에 복속시켜 버리는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다.

-복잡하군.

‘당연하지. 아무리 무력과 권력이 결부되는 사회라 하더라도, 게임처럼 ‘대장 죽이면 끝’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까. 이 결투도 결국은 정치적 계산 하에 이뤄지는 거라고.’

그러한 여러 가지 상황 판단이 들어간 대결.

이제 관건은 내가 그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는 것뿐이다.

쐐애애액!

카앙!

길어진 창날이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날아들어 내 갈라틴을 두드렸다.

‘빠르다. 그리고 변칙적이야.’

루의 창은 마치 뱀처럼 이리저리 궤적을 꺾어가며 나를 괴롭혔다.

앞에서 달려드는가 싶으면 갑자기 한 바퀴를 돌아 뒤를 공격했고.

그걸 막고 반격하려면 어느 샌가 다시 그의 손에서 창이 날아온다.

심지어 그런 변칙적인 공격들은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질 만큼 빨랐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저번에 처음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볼 때는 별것 없다고 느꼈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적들을 휩쓸던 누아다의 위압감에 비하면 그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보니, 이 녀석은 다수보다는 일대일 대결에 강한 테크니션이었다.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계속 방어와 회피만 하는 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덤벼보시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강하게 몰아친다.

난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반전시켜야 한다.

‘힘겹게 이기는 건 안 돼.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서 격의 차이를 보여줘야 해.’

에테르를 극한까지 순환시켜서 빠르게 파동연계기를 사용한다?

엑스칼리버. 칼라드볼그. 아론다이트. 아르테미스의 활.

아니다.

이것들로는 뭘 해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에테르 증폭.’

도박수였다.

콰웅.

그 순간, 난 다시 심상세계의 아지다하카를 만났다.

현실세계의 내 몸 전체에서는 흐르는 에너지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악의의 전당.’

그리고 10자루의 무구가 한꺼번에 소환되었다.

쐐애액! 파캉!

그중 하나가 뱀처럼 휘어 들어오는 창을 막아냈다.

그리고 난 그 상태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음?”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드러낸 루 라바다.

바로 이 틈 사이.

그 찰나의 빈틈에 내가 지닌 9자루의 무기를 모두 꽂아 넣었다.

콰콰콰콰쾅!

“으아악!”

“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무구들이 발사되면서 만들어낸 충격파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둘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할지 다들 예상했기에, 구경꾼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죽일 셈이냐?

‘아니. 놈은 이 정도로 안 죽어.’

난 그쯤에서 공격을 멈추고 에테르 증폭을 풀었다.

유지 시간은 대략 3초.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만했다.

지난번처럼 정신을 잃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후우……. 후…….”

물론 그렇다고 해도 힘의 소모는 극심했다.

에테르 증폭을 짧게 여러 번 발동하는 건 불가능.

‘게 볼그.’

그저 지금 남은 힘으로 빈사 상태가 되었을 루를 제압하는 게 전부였다.

쉬익!

먼지구름 사이로 창이 날아가 꽂혔다.

난 그걸 발동시켜 사방에 가시를 뻗게 만들었다.

촤악!

“큭……. 쿨럭, 쿨럭.”

이윽고, 먼지가 걷히면서 그 아래 흙더미에 파묻힌 루 라바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누운 채, 게 볼그가 내뻗은 복잡한 가시들 사이에 끼어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창에 직접 꿰뚫리지는 않았지만, 30개의 가시가 마치 그물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루……. 라바다.”

난 숨찬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 앞에 자신만만한 얼굴로 다가갔다.

“어쩌지? ……내가 이겨버렸군.”

“크윽…….”

“이제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네가 내 아래라는 걸.”

“차라리…… 죽여라.”

역시나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이 결투도 무의미.

그래서 난 그에게 다가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난 아르드리라는 자리에 관심이 없어. 오직 포보르 족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

찍어 누르기만 한다고 해서 굴복이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 회유책을 섞어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해야만, 마음을 꺾을 수가 있다.

“예언에서 말했지? 누아다 다음 아르드리가 나라고. 내가 그 자리를 빼앗아서 곧바로 너에게 줄 테니까, 넌 나를 도와줘.”

적의 적은 아군이다.

그만큼 쉽고 간단한 논리가 어디 있을까.

난 루로 하여금 누아다를 우리 사이 ‘공통의 적’으로 인식하게 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누아다에게서…… 자리를 빼앗는다고?”

“그래. 잘 생각해 봐. 지금 우리 둘이 싸운 걸로 ‘두 창이 부딪힌다’는 예언이 이뤄졌어. 그리고 내가 누아다의 자리를 빼앗으면 세 번째 예언이 이뤄지는 거지. 거기서 내가 포보르 족을 물리친 후 너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럼 사람들에게도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어? 넌 영원불멸한 다누 족의 통치자가 되는 거야.”

물론 이 속임수가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관계는 언제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평화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

이후에 벌어질 쿠데타? 폭정?

어차피 이 시련만 끝나고 나면 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상일 뿐.

“난 너에게 권력을 주고, 넌 나에게 힘을 준다.”

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약속 지켜라.”

“당연하지.”

난 그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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