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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86화 (86/348)

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86화

언덕 위에 세로로 우뚝 솟은 기다란 바위.

다누 족의 새로운 아르드리가 정해졌을 때, 폭풍우를 내리고 예언을 보여주는 신물.

리아 팔(Lia Fáil).

누아다는 나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갔다.

“나와 오하드가 준비하던 것은, 포보르 족을 상대할 무기였다.”

그가 바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무기는 바로, 우리의 적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무수한 영웅들의 영혼.”

파아앗.

그 순간, 리아 팔로부터 예의 푸른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대관식 때 봤던 정순한 마나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내 손을 잡아라.”

누아다가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난 주저 없이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 세상의 색감이 흐릿하게 바뀌면서, 곳곳에 온갖 다채로운 색깔의 빛무리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덩어리, 한 줌의 물, 또는 희미한 안개.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강대한 힘을 담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전장에서 쓰러져 간 우리 다누 족의 전사들, ‘에스 시어’들이다.”

“이 정령들을…… 전부 불러낸다고?”

“원래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지만, 이 리아 팔을 매개로 하면 그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렇게 하나로 집중된 힘을 정령 거인으로서 현세에 구현시키는 거지.”

‘정령들을 합쳐서 만든 정령 거인이라니……. 무슨 합체 로봇도 아니고.’

누아다는 단순히 대책 없이 미래만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비밀 병기를 숨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합체 로봇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로 그런 만화영화 속 물건에 비견될 만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정령들을 그대로 불러내기만 해도, 벨그레이브는 간단히 제압한 다음 지구 정복도 가능할 것 같았으니까.

“아까 말했었지? 다누 족의 힘은 계속 약해지고 있다고. 그래. 거기엔 나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나도 빨리 이것을 발동시키려고 한다.”

누아다 역시 자신의 동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만 이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동족에게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루도, 마나난도, 그리고 오하드를 비난하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는 그를 지지하던 온건파까지.

그렇게 같은 편까지 모두 속였다.

혹여나 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갔다간, 포보르 족은 당연히 이 돌부터 부수러 올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걸 아직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건, 뭔가 부족한 게 있는 모양이군?”

“그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재료. 그걸 모아야 한다.”

“그 재료란 게 얼마나 많이 필요한 거야?”

“양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얻기가 어렵다는 것도 문제지. 하지만 적어도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는 끝내려고 한다.”

어젯밤에 달이 꽉 차 있었으니, ‘다음 보름달 전’이라는 건 대략 한 달쯤 걸린다는 뜻일 것이다.

3, 40년이 걸리는 비현실적인 장기 계획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것도 생각을 좀 해봐야 된다.

“후우…….”

난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내가 이 시나리오를 시작한 게 9월 4일.

이곳의 시간 흐름 속도가 바깥세상과 똑같다는 가정 하에, 여기에 들어온 지 2주가 흘렀으니 오늘이 9월 18일쯤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달 후면 대략 10월 중순.

‘거기서 또 포보르 족과 전쟁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테고…….’

11월 1일이면 전 세계의 레이드 시즌이 끝나고 동시에 마물침공이 시작된다.

그러면 세상은 극한의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알포드 클랜은 마스터인 내가 자리를 비운 채 그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진윤과 다리우스가 나 없이도 잘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 날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늦어도 10월 말까지는 이 시나리오를 전부 끝내야 한다.

“지금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나?”

“오하드, 너와 나. 그리고 옹구스를 비롯한 드루이드들.”

“드루이드……. 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당연하지. 그들은 리아 팔이 인정한 정당한 아르드리에게 무조건 충성을 바친다. 그렇지 않으면 티르 나 노그의 영혼들이…….”

“아니, 내 말은 전투 능력에 관한 것 말이야.”

누아다가 하던 말을 멈추고는 빙긋 웃었다.

“물론.”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한 얼굴.

“좋아. 그럼 예상한 것의 절반으로 시간을 줄인다.”

나 또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 * *

오하드가 그렇게나 말하던 ‘준비’의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즉, 그가 했던 말은 모두 사실이라는 뜻.

오하드가 다누 족을 몰래 갉아먹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루의 주장은 틀렸다.

따라서 그에게 뒤집어 씌워진 각종 혐의들 역시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누아다의 말대로라면 그는 진심으로 다누 족을 위해 일하는 아르드리였다. 그런 그가 자기 아내인 브리이드를 죽이거나 풍요의 가마솥을 빼돌릴 이유가 없어.’

그래서 난 그를 직접 찾아갔다.

다행히 그는 풍요의 가마솥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아직까지 처형되지 않고 살아있었다.

“으으……. 어…….”

“오하드.”

“으…….”

다만 그 덕분에 죽은 것만도 못한 상태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

매일 이어지는 고문 때문에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식사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그는 사실상 살아 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를 오해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난 그에게 사과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설령 그게 전적으로 루의 의도와 속임수였을지라도, 내가 한 행동 또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남에게 휩쓸려 수동적으로 이끌려갔던 것 또한 내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젠 이 시나리오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내 힘으로 직접 바로잡아야 한다.

“나와 누아다……. 아니, 다누 족에게는 네가 필요하다. 넌 이렇게 죽어선 안 돼.”

난 감옥 열쇠를 열고 안에 갇혀 있는 그를 밖으로 꺼내줬다.

탈출 과정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신화 사냥꾼의 본능을 활용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그렇게 오하드는 누아다가 미리 마련해준 은신처에 데려다 놓았다.

“막시모, 가렌.”

“예.”

“너희 둘은 오하드가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그를 돌보고 호위해라.”

“알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접근한다면 최대한 충돌을 피하는 방향으로 대처하도록.”

이렇게까지 그를 돕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마법 지식 때문이다.

-리아 팔을 통해 정령 거인을 소환하는 마법 술식을 고안한 게 바로 오하드였다.

누아다는 애초에 포보르 족에 대해 이런 반격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준 게 다름 아닌 오하드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마법과 주술이 발달한 포보르 족의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이미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획득했다고 한다.

리아 팔의 정령거인은 바로 그 마법 지식을 다누 족의 특기인 정령술과 접목해서 개발해 낸 것이었다.

-그 술식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반드시 오하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형수인 그를 억지로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이제 의식에 사용할 재료만 구하면 되는 건가.’

재료의 종류와 획득 방법은 이미 누아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얻는 과정도 그리 어렵거나 생소한 게 아니다.

난 이미 바깥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해냈으니 말이다.

‘문제는 루인가.’

모든 게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지금,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다름 아닌 루 라바다였다.

‘오하드가 결백하다면……. 그 사건들은 결국 그 녀석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풍요의 가마솥이 사라진 것과 오하드의 아내 브리이드가 살해당한 사건.

무슨 방법을 썼든지 간에, 루가 만약 자신이 왕위를 얻기 위해 그 두 사건을 조작해서 오하드를 해친 거라면?

이제 그 흉계는 나와 누아다를 향하게 될 것이다.

그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 * *

우선 루에 대한 정보를 좀 더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곳곳에서 오가는 이야기들.

난 그런 이야기들을 본격적으로 엿듣고 다녔다.

신화 사냥꾼의 본능은 내가 듣고자 집중하는 대상의 목소리를 먼 곳에서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목격자를 처리하라고 하셨다.”

“그때 그 남자 말씀이십니까? 이미 그자는…….”

“아니.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자가 돌팔매를 언급했다고 한다.”

“아……. 알겠습니다.”

‘목격자? 돌팔매?’

루의 끄나풀로 보이는 자들을 찾아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브리이드가 살해당할 당시에 그 장면을 봤던 목격자가 또 있었던 모양이다.

루는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모양.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돌팔매’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난 그자들을 미행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납치를 벌였다.

“읍! 으읍!”

내 클랜원들이 노상에서 잡아들인 네 명의 남자를 포박해서 내 앞에 데리고 왔다.

“루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라.”

그리고 그들을 협박해 정보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

“안 되겠군.”

처음엔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난 그들을 각각 네 군데의 격리된 장소에 가둬 놓고,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는 것을 털어놓을 때마다 조금씩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서로가 함께 있을 때는 소속감과 안정감 때문에 웬만한 겁박에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립된 상태에서 타인의 진술로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신뢰나 의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브리이드의 죽음을 빌미로 포보르 족과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

“브리이드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아르드리가 될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제각기 말하는 것은 달랐지만.

저들이 하는 말 안에 들어 있는 공통된 진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

‘브리이드를 죽인 건 어쨌든 루가 맞다는 거군.’

내가 생각했던 대로, 브리이드를 죽이고 오하드에게 뒤집어씌운 건 루의 소행이 맞았다.

“그런데 어떻게 당사자인 그녀가 자신의 살해범이 오하드가 맞다고 착각하게 만든 거지?”

“다들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루 님은 오하드 그자와 상당히 닮았다. 오하드가 하고 다니는 진한 화장을 그날 루 님이 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브리이드 본인을 속인 것은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루가 오하드와 닮았다? ……흐음.’

난 그 부분에서 뭔가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에 일단 넘어갔다.

“그럼 풍요의 가마솥……. 그것도 루가 한 짓인가?”

풍요의 가마솥을 찾아오라는 서브 시나리오.

난 아직 그걸 완료하지 못했다.

리아 팔에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대로라면 난 아르드리가 될 테고, 그걸 완료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내야 한다.

그래야 포보르 족과 전쟁을 할 때 다누 족을 이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파헤쳤다.

“그렇다.”

“어떻게 한 거지? 아무리 그라도 제단에 손을 대기는 어려웠을 텐데.”

“루 님은 지금, 다누 족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 누아다 님의 밑에 계시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해서 늘려나갔고, 급기야는 그분의 명의로 제단 경계병들의 배치까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루는 이곳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오하드 실각 직후에 사람들이 선뜻 그를 아르드리로 지목한 건, 단순히 그가 촉망받는 전사여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군권을 장악해 있다? 이건…… 위험한데.’

그렇다면 지금은,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다.

분명히 리아 팔의 예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이방인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다누 족을 뒤집으려 들 것이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누아다에게도 중대한 위협이다.

‘막아야 해.’

이전까지의 각성자들은 이런 식으로 내부 투쟁이 벌어지는 걸 막지 못해서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당하지 않는다.

루가 무언가 일을 벌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주도권을 빼앗아 올 작정이었다.

“루 라바다!”

마을 한가운데의 노상.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다.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 스스로 영웅의 반열에 오를 진짜 전사라 생각한다면 내 칼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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