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79화
나는 루 라바다로부터 이곳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는 누아다 님이 아르드리였어. 하지만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게 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지.”
“팔을 잃는 거랑 왕위에서 물러나는 거랑은 무슨 상관이지?”
“그건 우리 다누 족의 규칙이야. 아르드리의 신체는 완전무결해야 한다. 어느 한 군데라도 불구인 사람은 될 수 없지.”
“그것 때문에 누아다가 물러났고, 그 후에 오하드라는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한 건가?”
“그래.”
“아까 들어보니 그자는 포보르 족에게 굽실거린다고 하던데.”
“맞아. 그것 때문에 우리 다누 족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어. 원래는 흉년이 들면 응당 군주로서 베풀어야 하는 식량도 작년보다 훨씬 줄어들었지. 놈은 우리에게 줘야 할 걸 포보르 족에게 다 갖다 바쳤다고.”
‘그래서 음식 상태가 이 모양이었던 건가.’
그 말을 듣고 나니 잔칫상에 올라온 음식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이해가 되었다.
이들은 오하드라는 암군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배를 굶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보아하니 너희는 포보르 족과 사이가 나빠 보이던데. 아까 너희를 공격한 자들도 포보르 족 아닌가?”
“이유를 알고 싶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가 매우 역겹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자의 아버지가 포보르 족이거든. 자기 피를 찾아가는 거지.”
“혼혈이라는 건가?”
“그래. 그것도 그냥 저들의 일원이 아니라 그들의 선왕이었어. 심지어 우릴 잔혹하게 학살하기까지 한.”
여기엔 꽤나 막장 같은 사연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다누 족의 한 여성이 적군인 포보르 족의 왕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다누 족의 왕이 됐다는 거다.
그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계략에 제대로 걸려든 것 같았다.
“잠깐, 그럼 대체 그자는 어떻게 너희의 ‘아르드리’가 된 거야? 아버지 혈통을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 쪽의 영향력이 큰 건가?”
“아니. 어느 쪽도 아니야.”
“그럼 어떻게?”
“누아다 님이 직접 지목했어.”
“누아다가?”
“팔을 잃고 난 후, 스스로 물러나시면서 오하드를 후임 아르드리로 선택했지. 포보르 종족과 말이 통할 거란 이유로 말이야.”
“아…….”
누아다도 나름대로 뭔가 생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의도야 어쨌든 결과가 이 꼴이니,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건 자명한 일.
‘이거 일이 좀 복잡한데…….’
확실히 이 시련을 그리 쉽게 해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스템도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고했고, 이전의 사례도 있으니 각오는 충분히 했던 사항.
하지만 그 ‘어려움’이라는 게 이런 식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순히 강한 적과 싸우는 문제를 넘어,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을 줄은.
‘그렇다고 무작정 포보르 족이라는 놈들에게 우리끼리 쳐들어간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시련에 입장 가능한 파티 상한선인 8명으로는 국가 대 국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전투에서 전승하고서도 전쟁에서 지는 상황은 실제 현실의 역사에서도 무수히 존재했었고.
더군다나 지난번에 싸우던 모습을 보면 이곳 병사 하나하나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었다.
그때는 우리가 손쉽게 이겼지만, 아마 본격적으로 싸우려 들면 제대로 된 본 전력과 맞붙어야 할 터.
그러니 단순히 내가 가진 무력만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루.”
“응?”
“아까 보니까, 누아다는 너한테 신임을 가지고 있던데. 네가 말해보는 건 어때? 오하드 대신 다른 사람이 왕을 해야 한다고.”
“이미 말한 지 오래야. 근데 아까 봤잖아? 누아다 님의 고집은 절대 꺾을 수 없다고.”
“하아.”
“내 아버지도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평소 같았으면 다누 최고의 전사이신 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따랐을 텐데, 이것만큼은 아버지도 힘들다고 하더군.”
‘다누 최고의 전사?’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네 아버지가 누군데?”
“마나난.”
“마나난? 마나난 막 리르?”
난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다.
바로 검제의 수호령이었다.
“호오. 그래, 맞아. 의외인걸. 이방인인 네가 그분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거야…… 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네가 내 아버지를 알고 있다니, 내가 다 자랑스럽군.”
검제의 수호령.
그런 존재라면, 분명히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가 나를 돕는 건 무조건 이득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방인인 내가 이곳의 정치에 끼어 들 수 있는 방법은 누아다의 주변인들을 포섭하는 것뿐.
루의 말대로라면 마나난도 오하드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지금 나에게는 그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생각이 뇌를 스치던 찰나.
{서브 시나리오 발동}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서브 시나리오>
마나난 막 리르와 친분을 쌓으십시오. 마나난은 강한 전사를 좋아합니다. 마수 곰을 사냥해 당신의 가치를 인정받으십시오.
조건: 지정된 장소에서 마수 곰 사냥(단, 반드시 혼자 해야 함)
보상: 마나난 호감도 +30
───
시스템은 나에게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새로운 임무를 던져줬다.
* * *
마을 밖으로 한참을 걸어간 후에 마주친 어느 숲속.
내 발밑에서 뻗어 나오는 가상의 선이 저 숲 안쪽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서브 시나리오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시스템의 안내선이었다.
‘토굴……. 저 안에 마수 곰이 있겠군.’
목표의 난이도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마수 곰 한 마리를 잡는 것으로 충분.
이미 에테르 순환 테크닉으로 스탯을 5천 이상까지 늘릴 수 있는 나에게, 마수 곰 정도는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는 마물이었다.
그르르.
토굴 안으로부터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간 것도 아니고,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데 벌써부터 내 존재를 알아채고서 반응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로 나 역시 저 안에 있는 마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토굴 주변에 펼쳐져 있는 온갖 흔적들.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각기 다른 생명체들의 사체 수십 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개중에는 인간도 있었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흔적들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많아졌다.
‘……이건 평범한 마수 곰이 아닌데.’
그 인간이 아닌 흔적들은 아무리 봐도 다른 마수들이었다.
물론 마수들이 다른 동물이나 마수를 잡아먹는 경우는 흔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험하게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살기 위해 먹이를 잡아먹는 것, 그 이상으로 싸우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소모의 문제도 크고, 설령 싸워 이긴다 하더라도 그 싸움과정에서 상처를 얻으면 마수에겐 너무 큰 손해다.
‘이건 아예 입도 대지 않았어. 그냥 말 그대로…… 살육한 거야.’
그런데 여기에 흔적을 남긴 마수 곰은 다른 생물들을 먹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냥 죽인 것 같았다.
먹지도 않을 걸 굳이 힘과 에너지를 소비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마치 인간처럼.’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살육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건지.
혹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어쨌든 지금 여기서 시스템이 마커로 가리키고 있는 저것은, 절대 평범한 마물이 아니었다.
쿵. 쿵.
이윽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토굴 안에 있던 곰이 나를 인지하고 덤벼들려는 것이다.
‘페일노트를 쓸까?’
난 거기에 대응해 원거리에서 활로 선공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사냥꾼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저 존재의 무게감으로 보건대, 화살 한 발로 고꾸라뜨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라드볼그 연계? 아니다……. 아론다이트로 가자.’
내가 선택한 것은 참격파동 연계기.
저지력을 따지면 칼라드볼그 연계기가 더 나은 것 같지만, 저 곰은 힘으로 그걸 뚫고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차라리 연속적으로 다량의 상처를 낼 수 있는 참격파동 연계기로 출혈 효과를 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쿠오오오오!
쿵!
그때, 토굴 안에서 돌격 준비를 하던 곰이 갑자기 포효하면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놈의 거대한 몸뚱이가 토굴을 무너뜨리면서 바깥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콰쾅!
거리는 적어도 수백 미터.
그것이 흉흉한 적색 안광을 쏟아내며 내 쪽으로 똑바로 달려왔다.
쿵! 쿵! 쿵! 쿵!
그건 단순히 원본 동물에서 크기만 커지고 난폭해지는 수준의 마수가 아니라, 형태 자체가 아예 달라진, 진짜 ‘괴수’였다.
두꺼운 가죽 위로 징그러울 정도로 울퉁불퉁한 근육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다.
‘갈라틴.’
난 그런 괴물체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고, 생각해놓았던 연계기를 펼칠 준비를 했다.
태양검 갈라틴을 양손으로 감아쥔 채, 적이 내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크와아아악!
그 거대 마수 곰이 악을 쓰며 나에게 뛰어들었다.
화르륵!
이 순간을 기다렸던 나는 갈라틴의 검신에서 10미터 길이의 화염 칼날을 뻗은 다음, 곰의 몸통을 향해 휘둘렀다.
서걱!
‘이런!’
그러나 잘려나간 것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나무들뿐.
그 곰은 덩치에 맞지 않게 엄청난 반사 신경과 민첩함으로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내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피해낸 것이다.
‘아직. 집중력을 잃으면 안 돼.’
그럼에도 난 당황하지 않고 이어지는 연계 공격을 시행했다.
상대는 하늘에 떠 있으니, 지금 공격을 하면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혈마창 루인.’
난 하늘에 떠 있는 그 괴물을 향해 붉은 창을 내질렀다.
악의의 전당 덕분에 내 공격 간의 빈틈은 거의 없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들고 있던 무기가 사라지므로, 다음 공격 자세를 취하기 위한 회수 동작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츄카가가각!
창에서 붉은 악귀 팔들이 뻗어 나와 마수 곰을 사정없이 베어댔다.
역시나 놈은 내 예상대로 피하지 못한 채 그 공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전신에 깊은 상처들이 생겨나며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스스슥.
난 가벼운 발걸음을 사용해 옆으로 멀찍이 위치를 이동한 다음, 아론다이트를 손에 쥐었다.
상처 입은 채로 바닥에 떨어지는 곰에게 마무리 공격을 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쩌렁!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하늘에 뜬 채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마수 곰의 낙하 방향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지난번 아델이 했던 것과 같은, 하늘에서 공기를 밟으며 내리꽂는 바로 그 기술.
마수가 사용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속공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콰앙!
“커헉!”
육중한 체구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앞발 강격이 나를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급히 손에 쥐고 있던 아론다이트를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충격을 받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텅, 터엉.
난 그대로 저 멀리 튕겨 나가 한참 동안 바닥을 굴러야 했다.
입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고, 입으로 내장을 다 토해낼 것 같은 욱신거림이 배에서 느껴졌다.
굴러가는 몸을 멈추고 자세를 잡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젠장……. 분명 그냥 마수 곰이라고 했는데…….’
저런 건 내가 살던 바깥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크 같은 인간형 마물도 아니고, 지성이라곤 없는 마수가 사람처럼 기술을 사용하며 싸운다는 건 들은 적도 없었다.
방금 그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기술은, 마나를 정교하게 다듬고 조절해야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저건 무슨…….’
“쿨럭!”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젠장…….”
쿵! 쿵! 쿵! 쿵!
여전히 곰은 멈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나를 완전히 끝장낼 모양이다.
‘안전주의로만 해서는 절대 못 이긴다. 이기기는커녕 도망도 칠 수 없다.’
힘과 속도, 인지능력 면에서 모두 압도적인 적.
결국, 여기서 난 결심해야만 했다.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로 말이다.
‘에테르 증폭.’
내 의식은 악룡 아지다하카가 살고 있는 심상세계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