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68화
위이이이잉.
덜컹.
시끄러운 엔진음이 지속되는 가운데, 수송기 뒷부분의 램프도어가 열리며 바깥의 아스팔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멕시코의 어느 지역의 군사공항.
벨그레이브 클랜의 대규모 각성자 병력이 이곳에 군용 수송기를 타고 도착했다.
밖에는 이미 수백 명에 달하는 벨그레이브의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온갖 물자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거 좀…… 괜찮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소속감이 들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제복은 나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딱 맞는 멋들어진 코트 정장 형태의 그 검은 제복은, 마치 내 피부인 양 상당히 편안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신축성이 좋은 게, 뭔가 새로운 소재를 쓴 것 같다.
‘멋진 제복으로 조직원들로 하여금 소속감을 갖게 하고 외부인들의 경외심 가득한 눈빛을 받게 만든다. 오래됐지만 정석적인 방법이지.’
이렇게 멋을 잔뜩 부린 제복을 입힌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꼭 이런 사소한 부분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벨그레이브는 그 위세를 계속해서 넓혀가고 있다.
“올라!”
군복을 입은 한 멕시코인 준장이 다가와 염왕 브랜든에게 인사했다.
브랜든 역시 유창한 스페인어로 화답했다.
나이 차이는 상당히 많아 보이지만, 브랜든은 그 장성을 마치 친구 대하듯이 팔뚝을 맞잡고 인사하며,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와우, 저 사람도 벨그레이브 소속인 모양인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드레스가 내게 말했다.
그는 나와 같은 팀으로 움직이던 볼리비아인 훈련생이다.
그 역시 스페인어를 했기 때문에, 저 대화를 모두 알아들은 듯했다.
“멕시코 공군 장성이 벨그레이브 소속이라고?”
“얘길 들어보니 대충 그런 것 같은데.”
이들의 세력 확장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빨랐다.
하긴, 각성자 네 명이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박살 내고 핵무기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 이제 국가의 공권력도 무의미하다는 걸 전 세계인이 알았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덕분에 우린 이렇게 손쉽게 남의 나라 군 공항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아앙.
그런데 그때, 또 다른 군 차량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엔 별 두 개의 계급장을 달고 있는 소장이 타고 있었고, 그자는 내리자마자 방금 그 준장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삿대질하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준장은 거기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자기보다 상급자인 그에게 대들었다.
“저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난 다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안드레스에게 물었다.
“지금 온 저 사람은 벨그레이브 소속이 아닌 모양인데? 누가 멋대로 외부 세력을 기지에 들여놓냐고…….”
얘길 들어보니, 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심한 모양이다.
장성들 간에 서슴없이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고, 심지어 군용기를 타고 멕시코 영토에 들어왔는데 이것도 제대로 허가를 받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방공망조차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나라 꼴이 엉망이군.’
물론 조금 있으면 시작될 대규모 마물 침공 시기가 되면 꼭 이들이 아니라도 국가들은 알아서 붕괴할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벨그레이브 같은 거대 각성자 단체 아래에 들어가 있는 게 더 안전하겠지.
결국은 저 공군 장성도 미리 자신의 살길을 찾아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모두 이동! 차량에 탑승해!”
멕시코군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벨그레이브는 해야 할 일을 해나간다.
우리는 각자 수송 차량에 탑승해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처음엔 이번 일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변칙 현상’이 무엇인지 들었을 때, 난 이곳에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성전 시스템의 존재가 드러났다.’
그건 곧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존재가 숨겨져 있던 알포드 성 또한 벨그레이브의 목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알포드 성의 주인은 이진윤이고, 그 이진윤이 사활을 걸고 진행 중인 무기 판매 사업을 건드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면 그는 범백산가의 일원이자 백선율의 사촌 동생이니까.
아무튼 그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내게 영향력을 끼치는 요인이다.
그건 바로 패치노트였다.
‘여기가 코홀리테 요새인가.’
지금 나는 현시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점령지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공성전 시스템은 올해 처음으로 등장했고, 올해에 추가되는 요소에 관한 모든 정보는 작년 말에 등장한 패치노트에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클랜이 오늘 공략하려는 요새에 대한 정보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숨겨진 보상에 대한 것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나 혼자만.
그러니 당연히 이번 기회를 놓치려야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겠지만……. 어떻게든 기회를 창출해야지.’
그렇게 나는 다른 클랜원들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며, 포탈에 발을 올렸다.
파아앗.
잠시 빛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졌다.
알포드 성에서 봤던 것과 같이, 주변 자연 풍경은 현실 세계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완만한 언덕, 울창한 나무들, 흐르는 강.
단지 그 위에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위치해 있다는 것만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규모가 확실히 크군.’
그 요새는 알포드 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끝도 없이 길게 펼쳐진 성벽.
처음 보는 사람들은 마치 만리장성처럼 저게 영토 방어용 장성 정도로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패치노트에 나온 공략에 따르면, 저것 전체가 다 안에 있는 마을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엄연한 성곽이었다.
공략의 난이도가 매우 높은 곳이니만큼, 규모도 큰 모양이다.
‘그런 걸 고려해 봐도 이 정도의 전력은 많이 과한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벨그레이브는 이곳이 위험한 지역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지금 동원된 각성자들은 거의 클랜의 중추에 해당하는 강자들.
인원으로 따지면 거의 300명에 달하는 인원이었는데, 이들 하나하나가 전부 잭슨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뿐만 아니라, 염왕까지 직접 뛰어들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도시 하나는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말이다.
“훈련생!”
그때,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때마침 나타난 염왕이었다.
“다 끝날 때까지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예? 기다리라뇨, 저희도 실전 감각을 기르라고…….”
“닥쳐. 움직이면 죽여 버린다.”
그는 다짜고짜 안드레스의 말을 자르며 우리의 발을 묶어버렸다.
이곳에 따라온 훈련생 인원은 4명.
나와 안드레스, 최윤아, 그리고 하비다.
한데 어째선지 자기 동생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날 몰아붙였던 그가, 동생마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형제에 대한 과도한 보호 조치, 뭐 그런 건가…….’
난 처음엔 저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으나, 하비의 표정을 보니 마냥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역시 이러한 브랜든의 조치에 불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젠장. 이게 뭐야. 이럴 거면 그냥 여기 오지 말고 편히 쉬고나 있을걸.”
잠시 후 염왕과 함께 다른 인원들이 언덕 위의 성을 점령하러 떠나자, 안드레스가 불평했다.
“어쩔 수 없죠. 그냥 멀리서 구경이라도 하는 수밖에.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테니까…….”
“윤아, 넌 저격수라서 멀리 보는 능력이 있겠지만 우린 아니라구.”
“이걸로 볼래요?”
최윤아가 그에게 자신의 투영무구인 스코프 장착 모신나강을 건넸다.
“으응?”
“전 맨눈으로 봐도 되거든요.”
“그, 그래?”
안드레스는 그걸 받아들고는 신기한 듯 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마나로 형상을 이룬 100년 전 총기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스코프로 저 멀리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총을 살펴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아무튼 난 염왕의 경고를 무시하고 내 할 일을 할 생각이다.
여기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숨겨진 보상들을 조금이라도 챙길 것이다.
“신우 씨?”
“이봐.”
내가 움직이려고 하자, 뒤에서 최윤아와 안드레스가 나를 붙잡았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란 말 못 들었어? 그 사람, 성질 엄청 더러워 보이던데.”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아서.”
“엥? 아무리 그래도…….”
“난 신경 쓰지 말고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들을 내버려 두고 가려고 하자, 안드레스가 부탁했다.
“잠깐, 갈 거면 나도 같이 데려가.”
“안 돼.”
귀찮은 족쇄를 채우고 움직일 순 없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난 염왕한테서 너까지 보호할 능력 없으니까 따라올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서 적당한 대답을 내놓았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
다만 그 말을 하면서 하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는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게 비아냥대지도, 일어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난 홱 돌아서서 내 갈 길을 찾아갔다.
어차피 저 녀석이 또 염왕에게 가서 내 행동을 일러바친다 하더라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는 걸로는 염왕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지난번의 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 * *
콰릉! 투쾅!
곧 코홀리테 요새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염왕을 비롯한 다수의 각성자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들이 제각기 지상으로 권능 폭격을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지상에 있는 각성자들은 성벽을 뚫으려 달려들었다.
물론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점령지답게, 수비 또한 매우 단단하다.
공격이 시작되자 성 전체를 둘러싸는 거대한 반구형 보호막이 형성되고, 그 바깥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차원문 같은 것들이 사방에 나타나더니 불덩이를 뿜어냈다.
보호막은 염왕의 공격도 거뜬히 막아낼 정도로 튼튼했으며, 작은 차원문에서 발사되는 화염구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같았다.
‘이거 잘못하다간 새우 등 터지겠는데.’
이 가운데서 숨겨진 보상을 찾아내겠답시고 뛰어든 나 자신이 너무 무모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 몸으로는 저 요새 방어 불덩이에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 시체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럼에도 난 과감하게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찾았다.’
패치노트의 공략에 따라, 첫 번째 숨겨진 보상이 감춰진 장소에 도달했다.
성 전체를 둘러싼 보호막이 닿지 않는, 내부로 이어지는 지하수로.
원래 공성전을 할 때 활용해야 하는 취약지점이지만, 바깥에서 정면 전투를 하고 있는 염왕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른다.
‘계속 몰라야지.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한텐 좋은 일이니까.’
난 이대로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전투 도중에 내가 필요한 것들을 찾아 먹을 예정이다.
원래는 나 혼자서는 도저히 접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점령지였는데-
이렇게 벨그레이브 측에서 시선을 돌려준 덕분에 뭔가 해볼 만한 기회가 왔다.
사박.
그런데 그때, 내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발로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을 밟는 소리였다.
‘날 쫓아오는 건가.’
소리의 진원지는 여기서 거의 2백여 미터 이상 떨어진 수풀 속.
신화 사냥꾼의 본능에 의해 극도로 발달된 청각이 추격자의 거리와 위치를 알려줬다.
난 그 사실을 알아챈 즉시 몸을 숨기고 후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추격자의 존재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위해 냄새를 맡았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아니면 마물인지.
그런데 그 냄새는 내게 아주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건…… 하비?’
하비가 날 쫓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