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64화
예전 어느 날, 동굴 엘프들이 모여 살던 개미굴에 인간 탐험가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탐험가들은 이곳 개미굴의 마수 생태 조사를 위해 호위병을 동원하고 들어온 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동굴 엘프 마을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며 교류하기 시작했고.
동굴 엘프와 인간들은 서로 각자가 가진 지식과 물건을 공유하며 가깝게 지냈는데.
그 학자 중 한 명이 마을의 한 엘프 여성과 사랑에 빠져, 그들 사이에서 혼혈이 태어났다.
“아르웬, 아르웬 맞지?”
“……네.”
그 혼혈 엘프가 바로, 이번 퀘스트에서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인물이다.
아르웬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소녀는, 아까 전 엘프 소년과 마찬가지로 앳된 얼굴에도 불구하고 키가 성인 여성만큼 컸다.
대신 귀는 뾰족한 모양을 제외하면 인간에 가까울 정도로 작았고, 머리 색도 은발이 아닌 흑발이었다.
“너, 인간 말 할 줄 알지?”
“……조금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마정석으로 둘러싸인 좁은 굴속에서 식인식물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터라, 상당히 야위어 있다.
마정석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덕에 생명은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그 좁은 곳에서 오랜 시간 가만히 있어야 했던 것 자체가 상당히 고된 일이었을 터.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멀쩡히 붙어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우리랑 같이 가자. 네가 우릴 좀 도와줘야겠어.”
“……네.”
물론 어차피 이 혼혈 엘프 소녀도 퀘스트 차원에서 만들어진 NPC일 뿐이다.
심지어 내가 성주가 된 후로 현실 세계의 시간 흐름에 동기화된 NPC와도 다르게, 이곳의 엘프들은 매번 퀘스트가 시작될 때마다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는 일회성 NPC.
그러니 딱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아르웬은 공략법에 가르쳐준 대로 자신을 구출한 각성자들에게 조건 없이 도움을 준다.
그것이 시스템의 의지다.
“신우 씨.”
탁.
그런데 여기서, 최윤아가 내 손목을 잡아채며 막아섰다.
“이 아이,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이제 풀려났어요. 아직 안정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통역부터 시키려고 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해도 공략 상으로 별문제는…….”
“공략의 문제가 아니라 애가 무서워하고 있잖아요.”
그녀의 말에 아르웬의 상태를 지켜봤다.
초점 없는 눈.
떨리는 손.
확실히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
“조금만 안정시키고 가면 안 돼요? 딱히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레이드 던전, 주점에서 NPC들을 마구 살육하던 송형주의 부하.
그를 제지하던 최윤아.
확실히 그녀는 NPC라는 인격체를 함부로 여기지 않으려는 성격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와중, 아흐리만이 일침을 놓았다.
-얼씨구? 저 헛소리를 들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저 말대로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조금 기다려 줄 순 있겠지.’
-그냥 무시해. NPC 따위가 손을 떨건 말건 알 게 뭐야?
‘이것도 다 생각이 있는 거니까 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생각은 뭔 생각? 저 여자한테 잘 보이는 거?
‘그럴 수도 있고.’
-어쭈? 이놈 봐라?
아흐리만이 무슨 망상을 하건, 난 내 결정대로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건 너무하니까.”
“고마워요, 신우 씨.”
최윤아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아르웬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그녀와 함께 케어를 도왔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도 거기에 동참했고, 또한 나에게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신우, 의외인데? 칼 같은 모습만 보여줘서 이런 면은 없는 줄 알았더니.”
“그동안 우리가 오해한 것 같아. 아시아인들은 말을 안 하면 너무 차가워 보여서 말이지.”
“어이, 방금 그 말은 인종차별 아니야? 나도 아시아인이라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농담이야, 하핫.”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절반 이상이 미국인이다.
국적이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일 관련 문제로 오랜 기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이쪽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이 거의 전부.
이 사람들에게 어린아이에 대한 보호라는 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중하게 여겨지는 문제다.
그것이 심지어 실제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하! 남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선을 베풀겠다, 이건가?
‘진심이건 아니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도 중요한 일이지.’
개인의 힘과는 별개로, 평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다.
난 약간의 시간을 들이는 것만으로 그런 무기를 얻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이득이다.
* * *
아르웬은 다른 동굴 엘프들에게 배척받는 존재였다.
그건 다름 아닌 인간이었던 아버지 때문.
어느 날 그 인간 학자는 동굴 엘프들을 배신하고 마수 거미 무리가 마을로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일로 인해 식인식물들이 마수의 신체를 통해 안쪽 공동으로 흘러들어 갔고, 결국 엘프들은 그곳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족이 죽었을 테고 주 식량 생산지까지 빼앗겼으니, 그만큼 증오심도 컸을 터.
덕분에 아르웬 모녀는 배신자의 가족이란 이유로 그 식인식물들이 가득한 안쪽 공동으로 내던져졌고-
그녀는 어머니의 희생 덕에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설정.
아르웬의 아버지인 그 인간 학자라는 자는 대체 무엇 때문에 한때 사랑했던 부인과 딸을 버리고 그런 짓을 했는지, 그 이상은 모른다.
물론 그 뒷사정을 딱히 알 필요도 없고.
이 장황한 이야기는 다 퀘스트의 최종 보스가 인간과 결합한 형태의 마수 거미라는, 조금 충격적인 전개를 보여주기 위한 밑밥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괜히 속사정을 알아봤자, 파티원들에겐 인간 모습이 남아 있는 마물을 죽이는 데에 찝찝함만 느껴지는 요소일 뿐일 것이다.
아무튼 그 스토리상 중심인물인 아르웬은 공략에도 필요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동굴 엘프들에게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통역 역할이었다.
“우린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말을 들은 아르웬이 동굴 엘프들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도 그에 대한 대답을 했고, 아르웬은 그대로 나에게 말했다.
“왜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하냐고……. 묻고 있어요. ……그리고 저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해하고 있고.”
아르웬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마을 사람들과 대면하고서도 겁먹지 않고 차분한 모습.
오히려 너무 큰일을 당했던 탓에 감정이 마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엘프 소녀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신들의 보금자리인 공동을 수복해 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하라고 해줘.”
그럼에도 나와 같은 각성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아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들은…… 도와달라고 한 적이…….”
“그럼 다시 마수들을 데리고 와서 저길 원래 모습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해.”
뻔한 반응에 자비 없는 대답.
아르웬을 통해 내 협박을 전해 들은 동굴 엘프들은 결국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우리의 목표인 마수 우두머리 퇴치가 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 그렇게까지 반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마수들에게 공격받지 않는 약물과 거대 거미를 죽이는 약물. 그 두 가지야.”
퀘스트 진행상 이곳 동굴 엘프들의 도움이 필수적인 건 바로 저 약물들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로 보스방에 가는 동안 만날 마수들로부터 공격받지 않게 해주는 약물.
그걸 마시면 일정 시간 동안 개미굴 내의 마수들로부터 적으로 인식 당하지 않는다.
엘프 소년이 혼자서 개미굴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 그것은-
이번 퀘스트의 보스 몬스터인 마수 거미 우두머리를 만나러 가는 동안 겪어야 할 모든 전투를 스킵하게 해줄 물건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없으면 안 되는 건 아니고, 있으면 진행이 매우 쉬워지는 정도다.
진짜 필요한 약물은 바로 두 번째.
보스 몬스터의 약점을 드러내게 만드는 약.
듣자마자 감이 오겠지만, 이게 없으면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스 몬스터에게 데미지를 주려면 그 약을 꼭 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엘프 마을에 관련된 진행이 필수적이었던 거고.
“‘마수 페로몬’은 사람 수에 맞춰서 총 25개를 준비했대요. 마시면 10분 정도는 된다니까 시간은 넉넉할 거라고 해요. 그리고 ‘마비독’은 5개…….”
건네받은 약물 상자 앞에서, 아르웬이 이야기했다.
‘마수 페로몬’이 공격받지 않는 약물이고, ‘마비독’이 보스를 잡는 약인 모양이다.
“그래, 그 정도면 됐어. 근데 마수 페로몬은 왜 25개지? 우리 파티 인원수는 24명인데.”
내 의문에 아르웬이 결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갈 거예요.”
“네가?”
“아빠를……. 아빠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 꼭 데려가 주세요.”
지금껏 죽어 있던 눈이 빛나는 것 같은 느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얼굴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이 아이 혼자 남겨둬 봐야 무슨 꼴을 당할지 뻔하기도 하고.
그 얼굴을 보고서 공략이 다시 떠올랐다.
‘이곳에서 엘프 길잡이와 함께 움직일 거라는 대목이 있었지.’
그런데 하필 그 길잡이가 아르웬이라니.
‘이 퀘스트, 꽤 잔인하잖아?’
결말을 알고 있는 각성자의 입장으로서는 확실히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전개다.
그곳에서 만날 아르웬의 아버지가,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꼭 죽여야 하는 보스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 * *
보스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는 공동으로 가는 길.
마수 페로몬을 사용한 우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마수들 사이로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서 수월하게 지나갔다.
물론 시비를 거는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하비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몰아붙였다.
“뭘?”
“이 개자식…….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난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난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넌 돌아가면 두고 봐.”
“그래그래. 두고두고 많이 보라고.”
그는 차마 ‘그 얘기’를 자기 입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혹여나 주변 사람이 들으면 자신이 곤란해질 테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언젠가 자기 힘이 원래대로 되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린-
내 손에서 튀어나온 엑스칼리버.
그건 하비 녀석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을 거다.
“여기, 도착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걷다 보니 우린 어느새 보스 방에 도착해 있었다.
지금껏 개미굴 안에서 그 어느 공동보다도 가장 거대한 구역.
그곳은 지름이 이백 미터는 훌쩍 넘을 듯한, 어지간한 축구장보다 훨씬 큰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정교하게 짜인 거미집 한가운데에, 거대한 마수 거미 한 마리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지금까지 본 그 어느 마수 거미 개체들보다도 덩치가 큰 녀석.
신화 사냥꾼의 본능 특성 때문에 초감각을 가진 나에겐, 그 덩치의 몸체 위에 작게 돋아나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건 인간 남성의 상반신이었다.
“아르웬이 갑자기 달려 나가지 못하도록 부탁한다.”
“알았어.”
난 그 마물과 조우하기 전에, 한 파티원에게 아르웬을 붙잡도록 시켰다.
혹여나 그 마물을 보고 자기 아버지라며 달려드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저건 이미 자기 딸을 알아보고 자시고 할 상태가 아니다.
겉모습만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을 뿐, 속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여기서부턴 아르웬이 죽건 말건 저 괴물만 죽이면 진행엔 아무런 영향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아이를 보호하겠다고 한 이상,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그런 조치를 취했다.
스르륵.
난 페일노트를 소환하고, 화살촉에 1회분 ‘마비독’을 모두 머금을 수 있도록 꼼꼼하게 발랐다.
그리고 그 화살을 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
‘한 번에 끝낸다.’
마비독은 5병.
즉 유효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기회는 5번.
난 그걸 모두 쓰기도 전에 끝장낼 작정이다.
그런데.
“아르웬!”
저 거대한 거미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완벽한 인간의 말로 아르웬을 불렀다.
“……아빠? 아빠예요?”
“그래, 아르웬! 아빠야!”
“뭐, 뭐야? 저거 왜 사람처럼 말을 하는……?”
파티원들은 당황했다.
나도 마찬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이봐! 당신들!”
그 보스 몬스터, 거미 마수 우두머리는 마물이 아닌 완벽한 인격 지성체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려고 시도했다.
“날 죽이러 온 거라면 잠깐만 기다려 줘! 당신들은 속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