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56화
“최윤아……?”
저번 레이드에서 3스테이지부터 5스테이지까지 같이 뛰었던, 이진윤의 동행.
그때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어 올리고, 인상이 매우 날카로워 보였던 인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화장을 지웠구나.’
진한 화장으로 일부러 저 순한 인상을 가렸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각성자들의 실제 능력은 겉모습과는 무관하지만-
그래도 이 바닥이 워낙 피와 살이 튀는 험한 세계다 보니, 만만해 보이는 것보다는 세 보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아, 오랜만입니다.”
난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에 응해주었다.
“네, 헤헤.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세요? 혹시…… 벨그레이브?”
최윤아는 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건 당연히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연락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네. 윤아 씨도 저랑 같은가 보네요.”
“맞아요! 역시, 신우 씨가 안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지난번 첫 만남 때와는 달리 그녀는 나를 매우 살갑게 대했다.
인상에 따라서 성격도 매우 순해진 듯한 느낌.
거기에 전에 한 번 같이 뛰었던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호의적이다.
“좋습니다. 그럼 같이 가시죠.”
물론 나 또한 이런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게 우호적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이므로.
-사람을 이득 여하에 따라 받아들인다는 거냐?
여기서 아흐리만이 끼어들었다.
그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참으로 간사한 인간이 따로 없군.
몸을 빼앗을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말로 공격하는 것뿐.
하지만 저런 도발 따위에 동요할 내가 아니다.
‘칭찬해 줘서 고맙다.’
-큭.
녀석이 내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런 헛소리밖에 없다.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놀아주면 된다.
-누가 누굴 상대로 놀아준다는 말이냐!
아흐리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약해 빠진 놈이!
그래 봐야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할 뿐.
신경을 꺼버리면, 내게도 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 *
벨그레이브가 자신들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 후, 이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바로, ‘클랜원 육성’이었다.
수많은 각성자들을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무력을 강화시켜 세력을 확장시킨다는 행보.
이번에 내가 디트로이트로 온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여긴가 보네요.”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디트로이트시 외곽에 있는 미시간 중앙역.
넓은 평야에 오래되었으면서도 거대한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은, 기묘한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주변은 죄다 낡고 허름한 건물과 공터로 가득한데, 저 건물 혼자서만 높게 우뚝 서 있다.
그것도 버려진 채로 말이다.
“사람들이 꽤 많은데요?”
그런데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최윤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대략 백여 명 정도의 각성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우리도 저쪽으로 가보죠.”
난 그녀와 함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모여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인종, 다른 국적을 가진, 세계 곳곳의 다양한 지역에서 온 듯한 각성자들이었다.
물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게, 모두 다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수호령이 전부 역사, 혹은 전설급임은 말할 것도 없고.
저번 레이드 때 포탈 앞에서 봤던 그 초급 각성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아마도 <신화 사냥꾼의 본능> 특성 덕분에 사람들의 강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영향도 클 것이다.
‘이 많은 강자들이 육성 프로그램에 한번 참여해 보겠다고 뛰어든 건가.’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벨그레이브라는 거대 집단으로부터 뭔가를 얻겠다는 기대에 차 있을 것이다.
이건 당연히 각성자들 입장에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돈도 많고, 역량도 넘치는 집단으로부터 성장을 지원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장난 아니네요.”
최윤아 또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내 옆에서 주눅 든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 또한 이곳에 불려왔으니, 벨그레이브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
‘확실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긴 한데.’
그녀는 확실히 레이드 때와는 또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동안 각성자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 뭐야?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사람을 불러 놓고 밖에다 세워 놓고 말이야.”
한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후 약속한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안내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불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야?”
분위기가 험악해져 간다.
누군가 나타나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 되려던 찰나.
“오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군요.”
벨그레이브의 관계자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흑인 남자가 나타났다.
“이쪽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는 다짜고짜 미시간 중앙역 역사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아무런 설명도, 양해도 없이 행하는 뒤늦은 안내에, 방금 전까지 불만을 쏟아내던 각성자들은 더욱 화가 끓어 올랐다.
“어이, 사과 안 해?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나와 놓고?”
하지만 그 관계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저 새끼가…….”
아까 전부터 시종일관 불평을 늘어놓던 남자.
그가 품에서 꺼낸 단검에 무구 투영을 하고 양복 차림의 관계자 뒤로 접근했다.
푸른 마나로 이루어진 장검이 단검 위에 덧씌워졌고.
그 칼날은 곧 앞에 걸어가는 남자의 목을 노리며 쇄도했다.
카앙! 챙그랑!
그러나 그 푸른 투영무구의 칼날은 눈 깜짝할 사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흑인 남자의 손에는 긴 창 끝부분에 도끼날이 달린 할버드(Halberd)가 쥐어져 있었다.
‘저건…….’
짧은 순간, 내 눈엔 그가 허공, 그러니까 인벤토리에서 단창 하나를 꺼내는 게 보였다.
그것이 순식간에 2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할버드로 변화한 것.
그런데 거기까지는 평범해 보였지만, 문제는 그다음 장면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움직임이 하나도 안 보였어.’
반사신경 1,600 이상에 ‘신화 사냥꾼의 본능’ 특성을 가진 내가 말이다.
“어엇…….”
관계자는 다시 창을 인벤토리에 집어넣더니, 당황한 공격자를 내버려 두고 아무 말 없이 가던 길을 걸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난 그 장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상에 나보다 강한 강자들이야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정말 믿기 어려운 건.
{수호령: 라이슬로이퍼(희귀)}
저 벨그레이브 관계자의 수호령 등급이 희귀라는 것이다.
‘희귀 수호령만으로 저 정도 수준까지 강해질 수 있다고?’
방금 그 장면 하나만으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벨그레이브가 말하는 ‘클랜원 육성 프로그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이다.
* * *
벨그레이브가 이 많은 각성자들을 모아놓고 한 첫 번째 일은, ‘클랜원 육성 프로그램’의 의의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던전’이라 부르는 이세계로 넘어가는 문. 이것은 포탈이라 불립니다.”
그 엄청난 무력을 가진 희귀 수호령의 각성자, ‘잭슨’이 스크린 앞에 서서 말했다.
“이 포탈은 바깥에서 안으로만 작용합니다. 각성자가 던전에 들어가고, 그 각성자가 다시 현실 세계로 귀환하는 것만 가능하죠. 하지만 그 반대로 던전 내부에 있는 마물들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
나뿐만이 아니라 이건 이곳에 있는 모든 각성자들이 다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포탈을 타고 안팎을 오가는 게 각성자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다음에 나온 건, 내게는 조금 생소한 영역이었다.
“반대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지만 마물들이 바깥으로 몰려나올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합니다. 우린 그걸 ‘게이트’라 부릅니다.”
주기적인 마물 침공 이벤트가 발생하는 ‘게이트’.
‘그러고 보니, 백선율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 게이트의 마물들을 잡으러 다녔다고 했지.’
예전에 자주 봤던 뉴스가 떠오른다.
그와 같은 상위권의 각성자들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게이트의 마물들을 토벌했다는 소식.
그야말로 가진 자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과도 같은 일들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각성자들에게 있어 게이트 마물 침공 저지는 돈벌이나 성장 측면으로 볼 때 효율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게이트는 그런 위험을 무릅쓸 여유가 없는 나에겐 직접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영역이었다.
-제 혼자 살겠다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는 얘길 장황하게도 하는군.
‘요약 고맙다.’
-그냥 인정하는 거냐!
아흐리만의 비아냥에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굳이 싸워봐야 머리만 아프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게이트는 포탈과는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바깥에 있는 인간은 드나들 수 없지만, 안에 있는 마물들은 마음껏 드나들 수 있습니다.”
“마음껏? 게이트는 열리는 주기가 정해져 있지 않나요?”
잭슨의 설명에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아닙니다. 사람들은 게이트가 주기적으로 ‘열린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게이트는 항상 열려 있고, 단지 그 안의 마물들이 주기에 맞춰 침공해 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거기에 친절하게 답해줬다.
저 부분은 나도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게이트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게 아니라 항시 열려 있다……. 잠깐, 그럼 이거…….’
여기까지 설명을 듣자, 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눈치가 빠르신 분은 아시겠지만, ‘포탈’과 ‘게이트’는 원리가 완전히 같습니다. 그 작용 방향만 다를 뿐, 용어를 다르게 부르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희를 불러 놓고 이런 얘길 하는 거죠? 이게 클랜원 육성과 무슨 상관이길래?”
“그건 재작년부터 발생한 이상 현상 때문입니다.”
“이상 현상?”
스크린에 여러 장의 사진들과 통계자료가 떠올랐다.
그 사진들은 어떤 장소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이건 베를린 외곽에 있는 국영 늑대 던전 포탈입니다. 이건 일본의 키노코 사가 소유한 사유지 던전 포탈입니다. 이건…….”
“자, 잠깐만요. 저게 던전 포탈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방금 전엔 포탈로는 마물들이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정방향 포탈’에서는 그렇습니다.”
“정방향 포탈? 그건 또 무슨?”
“아까도 말씀드렸듯, 포탈과 게이트는 작동 방향의 차이만 있을 뿐 원리는 완전히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존의 던전 포탈을 ‘정방향 포탈’, 게이트를 ‘역방향 포탈’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잭슨이 스크린에 손을 휘저어, 통계자료를 확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재작년부터 포탈의 정역이 바뀌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통계 자료는 곡선을 그리며 기하급수적으로 우상향하는 그래프 그림이었다.
“2031년 3월에 첫 발생을 시작으로, 거의 2년간 매달 한두 건 정도의 발생 빈도를 유지하다가, 작년 말부터 매달 30%에서 50%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굉장히 위협적인 증가세.
그러나 그런 위기감을 조성하는 말에 누군가가 태클을 걸었다.
“정역이 바뀐다는 말은, 그럼 포탈이 역방향이 되는 만큼 게이트들은 정방향이 되니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방향이 바뀌는 거라면 사실상 포탈과 게이트의 총량은 그대로가 아니냐는 뜻.
“포탈들의 정역이 바뀐다는 건 그 뜻이 아니라…….”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 예상 밖이었다.
“‘양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방향……!’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예전에 봤던 한 문구가 떠올랐다.
“결국 이 현상이 가속된다면, 빠르면 4, 5년 안에 인류는 전 세계의 모든 포탈에서 몰려 나오는 마물들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넘어갔던-
“벨그레이브는 그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인류를 보호할 각성자들을 육성하고 있는 겁니다.”
패치노트에 쓰여 있는 문구.
───
2033년 11월 1일 패치내역
-각성자들의 기적 사용량 증가로, 세계 간의 경계가 조금 더 허물어집니다.
-현존하는 모든 포탈에 <양방통행> 속성이 추가됩니다.
───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4, 5년이 아니다.
반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