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52화
유신우가 알포드 성에서 일련의 사건을 겪고 있는 동안, 바깥에선 세계정세에 크나큰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벨그레이브와 칼리닌스카야 사이의 충돌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넌 뭐야?”
“저리 꺼져. 뒤지기 싫으면.”
모스크바의 한 주택에 늑대 가면을 쓴 짧은 금발 머리의 남자가 들어가려 하자, 험악한 인상의 덩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늑대 가면의 남자는 말 없이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화륵.
“엇……!”
그의 손에서 용 형상의 화염이 솟아나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두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재가 되었고, 그마저도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넌 무슨……!”
화아악.
주택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늑대 가면의 남자는 그저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갈 뿐, 그를 저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 맹렬한 화염의 용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남자의 정체는 바로 염왕이었다.
“얼른 나와라. 애들 다 죽겠다. 어차피 다 죽일 생각이긴 한데.”
그가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말 대신 다른 것으로 답을 보내왔다.
쉬이익.
검격이 벽을 가르고 염왕을 베었다.
아니, 집 전체를 반으로 갈랐다.
쿠구구궁.
주택이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두 동강 나면서 아래층의 기둥과 대들보가 끊어졌다.
덕분에 3층 주택이 그대로 무너졌다.
콰르르.
물론 그 사이에서 염왕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잔해 속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또 한 마리의 화룡이 그를 감싸며 지켰기 때문이다.
“아, 거기 있었군.”
그런 그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상대는-
방금 검으로 주택을 둘로 갈라버린, 칼리닌스카야 브라트바의 보스, 미하일로프였다.
“……뭐야,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젊네?”
그는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30대 중반의 러시아인이었다.
인상만큼은 거대 마피아 조직의 두목으로서 손색이 없지만, 긴 전통을 자랑하는 마피아 조직의 보스치고는 매우 어린 나이였다.
“다짜고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런 그가 잔뜩 화난 표정으로 염왕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서로 많이 죽고 죽였잖아? 이젠 우두머리끼리 붙을 때도 됐지.”
다이아 경매 이후 발생한 칼리닌스카야와 벨그레이브 사이의 분쟁.
둘 다 유신우의 계략에 속아 엉뚱한 상대와 싸운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뻔뻔하군. 먼저 첩자를 심은 것도 네놈들이고 그걸로 우리 정보를 빼내려고 했던 것도 네놈들이면서.”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미하일로프가 이를 악물고 검을 치켜들었다.
그는 대담하게 말했지만, 눈앞의 강대한 적에게 모골이 송연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다이아 경매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SNS도 내가 한 게 아니야.”
이건 마지막 부탁이었다.
제발 여기서 그만 멈춰 달라는.
이미 온갖 숙청 작업을 거치면서 칼리닌스카야의 내부사정이 낱낱이 드러난 지금.
다이아 경매의 낙찰자가 칼리닌스카야는 물론이고 러시아 정부와도 전혀 무관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나도 알아. 알면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벨그레이브는 이대로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너흰 그냥 인류를 위한 제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곱게 죽어달라고.”
“……이잇!”
도저히 말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하일로프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을 있는 힘껏 휘둘러 불의의 습격을 가했다.
쉬이익!
참격이 넓은 반경을 가른다.
아까와 같이 집을 두 동강 낸 기술.
하지만 이번엔 그 위력이 궤를 달리했다.
한순간 검의 궤적을 따라 공간이 일렁인다.
우우웅.
그 심플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공격은-
전설 수호령 ‘기사왕 아서 펜드래건’의 최강무구.
‘엑스칼리버’로 구현하는 기적의 일격이었다.
‘맞았다!’
미하일로프는 그 일격에 염왕의 몸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공간마저 왜곡하는 이 참격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가 가진 수호령은 같은 전설 등급들 중에서도 격 자체가 남달랐고.
그런 수호령을 가지고 무려 2급 칭호를 얻을 만큼 성장했다.
진짜 죽이겠다는 살의를 가지고 행한 이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화르륵.
“이상한데?”
또다시 예의 그 화룡이 염왕의 주변을 둘러싸며 미하일로프가 행한 필살의 일격을 막아냈다.
“말도 안 돼……!”
경악하는 칼리닌스카야의 보스.
그런데 염왕은 오히려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의문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쁘진 않지만, 격이 너무 떨어지잖아.”
화륵!
그러더니 또 한 마리의 화룡이 나타나 미하일로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쉭! 쉬익!
그는 급히 엑스칼리버를 연달아 휘둘렀지만, 화룡은 그 참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그의 다리를 물어버렸다.
“끄아악!”
미하일로프의 다리 한쪽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진짜 거신병 맞아?”
염왕은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의문을 품었다.
“칭호가 그런 것치곤 딱히 거대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호령도 좀 강한 전설급에 불과한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칼리닌스카야의 두목은 ‘거신병’이라는 1급 칭호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급 칭호는 최소한 신화 수호령은 가지고 있어야 얻을 수 있는 칭호였다.
‘태양신 해모수’를 수호령으로 가지고 있는 염왕처럼 말이다.
하지만 미하일로프는 겨우 전설.
게다가 실제로 칭호도 2급밖에 되지 않는다.
염왕이 느끼기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 뭐야? 너 진짜 미하일로프 맞아?”
그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파악한 그때.
콰아아아! 쿠쿵!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와도 같은 주먹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 * *
화아아악!
거대한 주먹은 불꽃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 아래에서 전신이 불꽃으로 둘러싸인 염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마리의 화룡의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뭐야? 설마…….”
염왕은 자신을 공격한 대상이 누구인지 곧바로 색적해 냈다.
대략 100미터가량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백발의 노인.
자신이 가진 다섯 마리의 화룡을 모두 꺼내게 할 정도로 강력하고-
또한 ‘거신병’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형식의 권능을 시전하는 존재.
그자의 얼굴은 염왕에게도 아주 익숙했다.
실제로는 처음 대면한 거지만, TV에서 자주 봤기 때문이다.
“루킨? 루킨 맞지?”
1999년부터 2024년까지 집권한 후 정계에서 은퇴한, 러시아 연방의 전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킨이었다.
“와, 노친네 80살이 다 돼 가는데도 왜 그렇게 팔팔한가 했더니만.”
염왕이 루킨의 엄청난 근육질 몸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각성자였구나? 그것도 거신병……. 잠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염왕은 머릿속으로 흩어져 있던 퍼즐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루킨은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도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 그가 성장하는 데까지 엄청난 돈이 들었을 1급 칭호의 각성자가 되었고.
동시에 각성자 무력집단이 된 레드 마피아, 칼리닌스카야 브라트바를 사병처럼 주무르고 있다.
비선실세, 정경유착, 정치깡패.
그야말로 국가 권력 비리의 완전체라고도 할 수 있는 루킨.
이번 일에 그가 엮여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칼리닌스카야가 왜 그렇게나 민감하게 내부의 적을 숙청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칼리닌스카야에 외부 집단이 첩자를 심었다는 건 곧 러시아 정부에 대해 첩보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각한 거였군?”
물론 그건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벨그레이브는 정말로 칼리닌스카야를 통해 러시아의 정보를 빼돌렸었다.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건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지 다이아 경매와 유신우가 그 계기가 되어준 것일 뿐.
“너…….”
염왕을 계속 쳐다보고만 있던 루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알다시피. 서로의 비밀이 드러나고, 죽고 죽이는 싸움 끝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염왕은 아까 전 미하일로프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하지만 루킨이 한 물음의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
“그 말이 아니지 않나. 3차 세계대전이라도 일으킬 작정이냐?”
서로의 치부가 드러나고 숙청이 벌어지고 싸움이 일어났다.
당연히 서로 보복을 하다 보면 일이 좀 커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다툼도 선이 있는 법.
그 선을 넘어버리면 ‘유혈사태’, ‘무력충돌’을 넘어서 ‘전쟁’이 된다.
염왕 같은 강자가 러시아 본토에서 이렇게 깽판을 쳐버리면, 이건 단순히 마피아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가 없게 된다.
“3차 세계대전?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염왕의 대답은 그런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뭐라고?”
“어차피 너희 덕분에 우리 정체도 세상에 다 까발려졌는데, 언제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거 없잖아?”
이번 사태로 타격을 받은 건 벨그레이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 속에 숨어서 암약하던 비밀 결사가 러시아 정부에 의해 밖으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벨그레이브라는 기득권 재벌 갑부들의 모임이 세상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이건 뭐, 난리가 나도 이상할 거 없지.
“멍청한……. 그렇다고 러시아 땅을 이렇게 대놓고 공격해? 너희가 ‘진짜 기득권’이라면, 이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알고 있을 텐데.”
루킨은 냉전 시대를 최전방에서 직접 겪었던 사람이라 잘 알고 있다.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결정자인 기득권들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를 입는다는 것을 말이다.
가진 게 많은 정치인과 사회 지도층일수록 전쟁이 나면 잃을 것도 많다.
그래서 수십 년간 온갖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마물 발생 전에도, 후에도 끊임없이 존재해왔지만-
러시아 같은 핵보유국을 직접 건드리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
“우리가 가진 핵미사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각성자인 너희 자신이야 현대병기로부터 안전하겠지만, 각성자가 아닌 민간인들과 온갖 사회 인프라는 그걸로 전부 무너질 수 있다. 전쟁 이후에 각성자만 남은 세상에선 너희가 가진 돈도 전부 무의미해지겠지. 그런 걸 원하는 건가?”
루킨의 말대로, 핵전쟁이 벌어지면 각성자들이야 멀쩡하겠지만 세상은 쑥대밭이 된다.
제아무리 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사회가 무너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염왕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응. 그걸 원해.”
“이런 미친……. 미치광이 전쟁광 같으니라고.”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루킨은 결국, 마음을 먹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내가 직접 처리한다.’
3차 세계대전 같은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의 힘으로 벨그레이브를 없애버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신화 수호령 ‘지신 다그다 모르’의 권능 ‘거인화’를 발현했다.
쿠구구궁.
루킨이 바닥의 흙들과 함께 하늘로 치솟더니, 어느새 그는 신장 15미터의 거인으로 변해 있었다.
* * *
“염왕이 거신병과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해군이 그린란드에 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검제는 보고를 받고도 대답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가면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의 진짜 얼굴, 레아는 웃고 있었다.
“언론은요?”
“본토 쪽은 저희 인원이 촬영하는 영상을 각국에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해군은 미국과 유럽이 먼저 움직임을 감지해서, 굳이 저희가 정보를 흘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 다음가는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가, ‘벨그레이브’라는 단체와 싸운다는 소식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물론 본토에서 벌어지는 건 그저 각성자 두 사람의 대결일 뿐이고-
그린란드로 파견된 함대는 ‘벨그레이브 본부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는 위협성 무력시위에서 그칠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이미 세상의 이목을 끌 만큼 끌었으니 말이다.
벨그레이브는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이미 정체가 드러난 이상,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 줘야 한다.’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것.
그런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해.”
레아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 프라가라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