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47화
엘프들의 여신 아르테미스.
숲과 사냥과 순결과…… 뭐 아무튼 그런 것들의 신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이쪽도 사제라는 뻥쟁이 놈들이 온갖 그럴듯한 것들을 죄다 가져다 붙인 걸로 밖에 안 보이지만.
아무튼 그 신이 내게 계시를 내렸다.
‘뭐야?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갑자기 눈앞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글자들이 나타나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 중에서 나뿐이었다.
이게 나만 보이는 게 아니라면, 다들 나처럼 놀라야 정상인 것이다.
‘이건 대체…….’
{아르테미스는 이곳에 자신과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너라고 말한다.}
여신이 내 생각을 읽은 듯, 다시 한번 계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나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용건이 뭐지?’
{여신은 네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날카로운 살기가 전신을 난도질하듯 온몸에 휘둘러졌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등한 필멸자가 감히 신에게 용건을 묻느냐며 분개한다.}
그 다그치는 듯한 계시와 함께 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공포가 솟아올랐다.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린다.
신의 위엄이 여실히 느껴지는 압박감이었다.
‘…….’
난 그대로 생각을 멈췄다.
이 앞에서 섣불리 말을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신이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것이기에 언제든 본심이 읽힐 수 있다.
{아르테미스는 네가 자신으로부터 생각을 숨긴 것에 놀라워한다.}
여신은 여기서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꿨다.
내게 공포를 심어주는 대신, 갑자기 우호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손도 아닌 필멸자가 자신을 불러내고, 의지마저 숨긴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다.}
{여신이 너에게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난 생각을 감춘 채 신의 계시를 계속 받기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나타난 문장에는 도저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신이 너에게 자신의 사도가 되기를 명령한다.}
‘사도?’
{너의 적을 무찌를 활과 화살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신의 권능.
그 쓸모도 없는 신관 놈들이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어 가며 그렇게나 기도를 드렸지만 그 어느 인간에게도 단 한 번 주어진 적 없는 신의 권능이.
지금 내 눈앞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테미스의 활과 화살…… 이거라면…….’
나 혼자의 힘만으로도 오크 대군을 모조리 휩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난 새로운 힘의 운용법을 깨달아 이미 전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
여기서 신의 권능까지 얻게 된다면?
오딘의 돌풍을 사용하는 그 시구르드조차 간단히 능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오크 놈들로부터 사람들을, 내 아들을 구해내는 것도 결코 허황된 희망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냐.’
하지만 난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프족의 신이 인간인 나에게 자신의 힘을 절대 그냥 줄 리가 없다.
이런 제안엔 반드시 함정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대가는…… 뭡니까?’
난 한 번 더 대담하게 아르테미스를 향해 물었다.
물론 이번엔 조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내가 아무리 신을 혐오한다지만, 내 앞에 직접 존재를 드러낸 신에게 대놓고 무례하게 굴 만큼 멍청하진 않다.
실제로 여신은 지금 내 몸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전처럼 또다시 살벌한 위압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감히 신과 거래를 하려는 네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압박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순간순간 정신이 흐려지는 느낌이다.
{대가는 전적으로 신의 의지대로 정하는 것.}
{너는 재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저러는 걸 보니, 어쨌든 뭔가를 요구하긴 하겠다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그 생각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렇게 정곡을 찔렀다간 저 콧대 높은 여신의 진노를 사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럼……. 제가 당신의 사도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
{죽음.}
간결하고도 단호한 한 단어.
“컥.”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여신은 다시 한번 말한다.}
{이것은 제안도, 거래도 아닌 명령이다.}
애초에 내 고민들은 다 무의미한 것이었다.
따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초월자의 장난.
‘알겠……습니다…….’
결국 난 아르테미스의 사도가 되어버렸다.
* * *
다그닥, 다그닥.
일곱 마리의 말들이 평원을 가로지르며 나아간다.
오크 성채에서 빼앗은 말들의 안장에는 이동하면서 먹을 수 있는 보존식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이 식량은 모두 엘프들에게 얻었다.
내가 아르테미스로부터 가호를 받은 후,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더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자기들이 믿는 신의 진짜 사도가 눈앞에 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덕분에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노르드 왕국으로 가는 길목의 엘프 마을을 자유롭게 들를 수 있는 표식도 얻어냈다.
물론 마지막까지 그들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다그닥. 다그닥.
아무튼 우린 노르드 왕국을 향해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초반엔 그 표식을 이용해 엘프 마을들을 들러 여러 가지 정비를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그럴 기회는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위쪽은 모두 오크들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여기부터는 정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쉴 수 있는 지점이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매일매일을 길바닥에서 잠들어야 하는 나날들을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휘이이잉.
게다가 날씨마저 추워져서 환경은 더더욱 악화되어 갔다.
노상에서 덤벼드는 마물과 오크 도적들이야 아르테미스의 권능으로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 열악한 날씨만큼은 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털썩.
“읏!”
결국 말 하나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병사는 그대로 낙마해 바닥에 추락했다.
“으윽…… 젠장…….”
“드라바스! 괜찮나?”
“전 괜찮습니다. 아으…… 그보다 말이…….”
쓰러진 말은 작게 헐떡이며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달리는 건 고사하고 생존조차 힘겨워 보인다.
‘안 돼……. 모두 지쳤어.’
난 거기서 일행들의 상태를 살펴봤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나는 체내의 마나로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나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나머지 인원들은 체력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도 마찬가지.
아마, 이렇게 죽어 나가는 말들은 계속해서 늘어날 테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날씨를 뚫고 도보로 이동해야 할 터다.
그땐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겠지.
처음엔 조금이라도 전력이 될 병사들을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이상으로는 내 욕심 때문에 이들을 희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모나. 이걸 가지고 병사들과 함께 엘프 마을로 돌아가라.”
“네?”
난 그녀에게 표식을 넘겨주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나 혼자서 간다.”
“대장님! 그게 무슨……?”
“말로 이동하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다. 이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할 텐데, 너희 중 나를 따라올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나?”
“…….”
난 병사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겠다며 끝까지 따라오려 할 것이다.
“나를 방해하기 싫다면, 지금 당장 왔던 길로 돌아가라.”
“……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모나가 여기서 끝까지 나를 따르겠다며 나섰다.
“모나. 아무리 너라도…….”
“제 스스로 제 능력을 판단할 수 있어요. 정말 힘들 것 같다면, 언제든지 돌아가도록 할게요. 하지만 갈 수 있는 만큼은 가게 해주세요.”
그녀는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자기가 가진 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이런 가혹한 환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진심이냐?”
“네. 믿어주세요.”
확실히 그녀는 나에게 있어 가장 믿음직한 병사다.
같이할 수 있다면 너무나도 든든한.
“저도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데 제힘을 보태고 싶어요.”
결국 난 그 간절한 모습에 내 옆에 남기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그럼…… 넌 나를 따라와라.”
“감사합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른 병사들도 동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하겠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진 못했다.
나와 모나만큼의 능력이 없는 그들은, 앞으로의 여정에서 짐만 될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너희는 그 표식을 가지고 엘프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식량과 물자를 구비해 놓도록 해라. 구출한 사람들과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대규모 귀환 행렬이 될 터. 그걸 보조하려면 많은 물건들이 필요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중책을 맡은 그들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른다.
되돌아가는 과정까지 확실하게 준비해놓은 것이니 말이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돌아오도록 하겠다.”
“얼마나 멋지게 오크 놈들을 쳐부쉈는지, 꼭 이야기해 주십쇼.”
“그러지. 가자, 모나.”
“네.”
노르드 왕국 수도 해안가까지, 앞으로 약 일주일.
우리는 북쪽을 향해 쉼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타닥. 탁.
타오르는 모닥불.
나와 모나는 바람을 피하고 몸을 숨길 수 있는 적당한 장소에 야영지를 구축하고 불을 피웠다.
“따뜻하다…….”
모나가 젖은 두 발을 모닥불 앞에 내밀어 말리고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동상에 걸려 절단까지 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극심한 강추위가 우릴 덮쳤지만, 그래도 마나를 운용해 강인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그녀와 난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오크들은 이런 날씨 속에서 어떻게 사는 걸까요? 말조차 못 버티고 죽어 나가는 곳인데.”
타고 있던 말은 이미 진작 동사했고, 우린 예상했던 대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수라도 기르는 게 아닐까.”
“네? 마수를요? 그 공격성을 어떻게 통제하려고…….”
“그냥 내 추측이야. 나도 여기까지 와 본 적은 없으니까.”
“흠…… 근데 진짜 그런 게 가능하다면 좋겠네요. 마수를 길들일 수 있다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하루 동안 쌓인 고단함을 녹인다.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마 모나가 없었으면, 난 이미 정신이 피폐해져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몸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만 정신은 마나로도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나.”
“네?”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깨고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지?”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내가 야드가르를 소중히 여기듯, 그녀에게도 소중한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으면 나쁠 것은 없겠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야드가르와 모나의 가족을 먼저 구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아…….”
그녀의 눈이 잠시 침울해졌다가, 쓱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이 셋이에요.”
“그래? 꽤 대가족이구나.”
“그랬었죠. 지금은 없지만.”
그런데 모나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런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다들 죽었어요. 예전에.”
가족이 죽었다고?
난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어가며 나를 구한 것, 그리고 이런 험난한 여정을 따라온 것.
그 모든 게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저 무슨 충성심이나 정의감, 공명심 같은 것만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바로 얼마 전 날 따르겠다고 할 때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그럼 대체…… 네가 구하겠다던 그 소중한 사람은 누구란 말이냐?”
“야드가르요.”
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나가 왜 내 아들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거지?
“네가 왜……?”
“제 남동생 같아서요. 그날…… 제가 지키지 못한 동생 대신, 제가 지켜낸 야드가르를 제 동생이라고……. 멋대로 여기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그날’.
너무나도 많은 날들 중, 유독 내 뇌리를 직감적으로 스치는 하루가 있었다.
“그날이라니, 설마……?”
“네, 맞아요. 대장님과 처음 만났던 날. 오크들이 도시 내에 습격해 왔던.”
그 순간, 난 마치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동생의 이름이…… 뭐지……?”
“네? 어…… 파반드라고 하는데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파반드요!
-그래, 파반드. 네가 엄마와 동생들을 지키거라.
-꺄아아악!
-어, 엄…….
과거의 비극적인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