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38화
화아악!
화조참 갈라틴의 붉은 발톱이 반지름 10미터의 반원을 그리며 마수 융합체 여러 마리를 베어냈다.
그리고 이어서 참격파동발산기를 사용하려던 순간.
“큭!”
융합체 한 마리가 단숨에 내 옆으로 달려들었다.
나조차도 반응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젠장, 어제 그거랑은 다르잖아……!’
어제 봤던 융합체는 가까이 다가갔을 때의 공격속도는 매우 빨랐던 반면, 본체의 기동력 자체는 극히 떨어졌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나타난 녀석들은 모두 생긴 것들이 제각각.
네발짐승형 마수의 다리가 제대로 돋아나서 완벽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원거리 공격을 구사하는 놈도 있었다.
‘이놈들…… 진화하고 있다!’
계속 싸우면서 상황을 지켜보니, 마수 융합체는 점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제처럼 아무렇게나 마구 합쳐져 형태의.
효율이나 기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것들을 계속 격파하면서 나아가다 보니, 갈수록 좀 더 그럴듯한 형상의 괴수로 변화하고 있었다.
투콱!
“끄아아아악!”
“놈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
“가까이 안 가려고 해도 이놈들이…… 큭!”
전체적으로 들개의 형상을 한 그것은 양어깨 위로 각각 두 쌍의 기다란 거미 다리가 뻗어 나와 있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채찍처럼 움직이며 내 클랜원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심지어 그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해 도망치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기동력에 금방 따라잡히고 말았다.
앞다리와 옆구리 전체에 연결된 커다란 막.
박쥐의 날개까지 가진 그 괴물은 빠른 속도로 뛰어다닐 뿐만 아니라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 살려주십쇼! 으아아아!”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며 나아가던 아군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전투 불능이 되었다.
“젠장!”
촤아악!
나 역시 융합체들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내 몸 하나만을 지키는 것만도 벅찼기에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일단 퇴각한다!”
결국 나는 성의 점령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싸우다간 모든 NPC들을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
최대한 생존자를 확보해서 퇴각한 후, 해법을 찾을 때까지 재정비를 해야 한다.
“영웅님!”
“아델!”
아성을 빠져나온 나는 아델과 조우했다.
다행히 그녀는 큰 부상 없이 융합체의 포위로부터 빠져나온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병력도 꽤 많은 수가 온존해 있었다.
“벽에 붙어서 움직여요! 적의 공격을 제한할 수 있어요!”
“벽에……? 아!”
거기엔 나름대로 비결이 있었던 듯하다.
마수 융합체의 주된 공격 방식은 네 개의 기다란 거미 다리를 낫처럼 휘두르는 것.
하지만 목표물이 벽에 딱 붙어 있다면 뒤쪽에 공간이 없어서 공격을 맞추기가 극히 곤란해진다.
낫 형태의 무기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모두 벽에 붙어라!”
나는 곧장 그녀의 아이디어를 모두에게 전달했다.
이 명령은 클랜장의 권한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NPC들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다른 병력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이젠 어떡하죠?”
“퇴각로를 찾아야지.”
“정문 쪽은 막혔어요! 그쪽은 융합체로 완전히 가득 차서 돌파해 나갈 수가 없어요!”
채앵! 푸확!
아델이 접근해 오는 융합체의 공격을 막고 머리통에 칼을 꽂으며 말했다.
“영웅님, 어제처럼 벽에 구멍을 뚫어서 탈출하면……!”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죠?”
“그쪽은 평범한 성벽이라 내 힘으로 충분히 부술 수 있지만, 여기부터는 점령 포인트가 있는 곳이라 시스템상으로 훼손할 수가 없어.”
이곳은 공성전 진행상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벽을 마구 뚫어서 점령 포인트를 손쉽게 점거하는 행위가 방지되는 것은 당연.
그렇다 보니 이 주변의 성벽들은 마치 던전 외곽의 투명 벽처럼 절대 손상되지 않는 벽으로 이뤄져 있다.
“네에? 그게 무슨 뜻…….”
“아무튼 안 된다는 뜻이야. 그게 됐으면 저 무지막지한 거미 다리가 벽과 함께 너희를 갈라버렸겠지.”
“아…….”
아델은 ‘시스템’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기에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논리로 이해시켰다.
“……아, 혹시, 이 성안에 비밀 통로 같은 거라도 있나?”
“어…….”
난 그녀가 내성의 구조를 꼼꼼하게 지도로 그려놓았던 걸 떠올렸다.
아델이라면 혹시 정문 외에 다른 탈출로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죄송해요. 이 안쪽 구조는 저도 잘…….”
“이, 이봐! 그건 내가 잘 알아!”
그때, 아델 대신 또 다른 남자가 내 물음에 대답했다.
그자는 마르쿠스 남작가의 문장을 갑옷에 새긴 기사였다.
* * *
“이쪽으로!”
우린 그 기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영웅님, 저자를 믿어도 될까요?”
아델은 그가 별로 미덥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바로 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싸우던 적이 갑자기 우리를 돕는다는 게 미심쩍은 건 당연한 일.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계속 싸우다 죽든가, 그게 아니면 이자를 따르는 것뿐.
게다가 마수 융합체는 세력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적대했다.
이자 역시 살아남으려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적의 적은 아군이기도 하고. 일단은 믿어보자고.”
“네.”
혹여 저 앞에 우리를 기다리는 함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괜찮다.
거기에 함정을 파놓았다는 건, 어찌 됐든 저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 무지막지한 마수 융합체들을 돌파하는 것보단 인간 NPC가 파놓은 함정을 빠져나가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끼이이익. 철컹.
나를 포함한 모든 클랜원들이 지하에 도착하자, 남작의 기사는 재빨리 철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그러곤 주변의 물건들을 철문 앞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고 있지만 말고 좀 도와달라고!”
바깥의 융합체들이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게 입구를 막으려는 모양이었다.
“비켜.”
“에?”
“다치기 싫으면 비키라고.”
난 그런 그를 문에서 떨어지라고 했다.
그러고는 문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마르쿠스의 거대 흉상을 주먹으로 쳐서 무너뜨렸다.
콰르르르.
“으앗! 그건…… 전하의…….”
“이제 죽었으니까 상관없잖아.”
“…….”
쾅! 콰르르!
그 외에도 무게가 있을 만한 구조물들을 모조리 깨부숴서 문 앞을 막는 바리케이드로 사용했다.
“이제 다음은?”
“아, 음…… 이쪽으로 가면 되는데, 그전에.”
그런데 그 기사는 길 안내를 하는 대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통성명부터 하는 게 격식에 맞을 것 같군. 난 기사 패트릭이다.”
이런 와중에도 격식을 차린다니.
굳이 이 상황에 서로 이름을 알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일단은 그가 원하는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어쨌든 이자가 끝까지 길 안내를 하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유신우.”
“그렇군. 그쪽의 아름다운 레이디는?”
“에?”
‘……이거였군.’
패트릭은 아델을 향해 한껏 그윽한 눈빛을 날리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 통성명을 하겠다는 이유는 그녀 때문인 것 같았다.
“네? 아…… 저…….”
“얘기해 줘. 별일 없을 테니까.”
차라리 잘됐다.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 저 녀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칼 하나를 얻은 셈이니 말이다.
“……아델.”
“아델 양. 만나서 반갑군.”
그녀는 별로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하기야, 자기 가족을 살해한 원수의 일원이었던 자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이제 격식은 그만 차리고 밖으로 나가는 길이나 가르쳐 주지?”
난 이쯤에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이상 집적거리게 놔뒀다간 아델의 사기가 저하될 테니 말이다.
“크흠. 알았다.”
패트릭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우리를 데리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 장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철컹철컹.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렇지?”
“우릴 꺼내줘!”
쇠창살을 흔드는 소리.
그 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아우성.
이곳은 성내 지하 감옥이었다.
“저 사람들은…….”
아델이 그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무시해.”
하지만 난 곧바로 그걸 차단했다.
‘이런 탈출 상황에서 죄수들을 데리고 같이 나가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지.’
죄수들은 말 그대로 범죄자들이다.
물론 이런 전근대 시대, 폭정이 횡행하는 지역에서 잡혀 온 죄수들이 모두 악질 범죄자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누명을 쓴 것도 아니다.
세력을 늘리겠다는 이유로, 불쌍하다는 이유로 죄수들을 풀어주면서 같이 나가려 하다가, 진짜 악질이 하나라도 일행에 섞여 들어오면 매우 곤란해진다.
사실 그 영화에서도 꼭 그렇게 풀어준 놈들 중 하나가 사고를 치는 게 클리셰이기도 하고.
“끄응…….”
“정 꺼내주고 싶으면 우리가 성을 점령한 후에 진짜 죄가 없는 사람만 골라서 석방시키면 되는 거야.”
“……알겠어요.”
아델이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야 할 유인이 늘어난 셈.
이 죄수들은 그녀의 목적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저벅. 저벅.
한편, 패트릭의 안내에 따라 지하 감옥에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왜 안 나오는 거지?”
“뭐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게…….”
“설마 길을 잘못 들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어. 난 분명히 똑바로 왔는데…….”
“하.”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다.
난 이 녀석이 혹시 우리 뒤통수를 치면 어떻게 할까를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설마 길을 모를 줄이야.
“……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거지?”
“지금까지 빙빙 돌았다는 건가?”
길이 그렇게까지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우리도 모르게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뭐,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곳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인내심을 갖고 출구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패트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돼.”
“응?”
“우리가 가던 도중에 방향을 틀어서 반대로 온 게 아닌 이상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여긴…… 사실상 일직선 통로야.”
“뭐라고?”
수군수군.
바로 그때, 저 앞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내 뒤에 있는 클랜원들이 낸 소리는 아니다.
누군가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소리였다.
“저건……?”
철판으로 만들어진 비밀 통로 문.
그 문틈으로, 어떤 그림자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그건 매우 익숙한 형태의 그림자였다.
다만 이곳에 절대로 있을 리가 없는 그림자라는 게 문제일 뿐.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지?’
난 귀신에 홀린 것처럼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틈 가까이 눈을 갖다 대어, 더 자세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우리가 방금 지나왔던 지하 감옥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기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라라라락! 카 훙!”
“훙 차크?”
감방에 갇혀 있는 모든 죄수들과 그들을 관리하고 있는 간수들이 오크라는 점.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오크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