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질로 신화급 각성자가 되었다 33화
칼리닌스카야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내부에선 조직원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역병처럼 전염되었다.
벨그레이브의 첩자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직원들이 살해당했고.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은 상부의 숙청 명령에 불만을 가졌다.
그 때문에 명령에 따랐을 뿐인 조직원들에게 복수하는 일까지 발생.
멈출 수 없는 증오의 연쇄가 끊임없이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 분노의 화살을 가장 집중적으로 받아내는 자들은, 숙청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사냥개들이었다.
“나나입니다.”
-그래. 목표는?
“지금 처리하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잘했다. 빨리 돌아와라. 긴히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나나는 차를 운전하는 도중에 전화로 상관에게 보고를 마쳤다.
이런 건 그녀에겐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다르다.
원래 같았으면 처리 과정에서 있었던 특이 사항을 포함해, 여러 가지 더 자세한 것들을 꼼꼼하게 물었을 터.
한데 오늘 그녀의 상관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성공 여부만 묻고 말았다.
목소리도 어두운 것이, 마지막에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얘기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젠장…… 젠장…….”
사실 나나는 이미 그 전부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전에 처리한 목표물의 유류품을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벨그레이브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무고한 조직원을 죽여 버린 것이다.
“난……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동안 그 어떤 죄책감도 없이 주어진 목표물들을 처리해왔던 그녀조차, 지금은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었다.
아군인 줄 알았던 자가 알고 보니 적이었다.
적인 줄 알았던 자가 알고 보니 아군이었다.
그로 인해 아군이었던 자는 다시 적이 된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처음부터 그게 아니었다는 듯 돌변해 있는 동료들.
언제 등 뒤에 칼이 꽂힐지, 언제 조직의 숙청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나는 묵묵히 차를 몰아 상관의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의 지하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올라가야 해.’
등골이 서늘한 기분.
얼른 위층으로 올라가야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달칵.
차에서 내려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엄습해 오는 긴장감에 문을 잠그는 것도 잊었다.
괜히 손이 떨린다.
터벅.
터벅.
터벅.
한 걸음이 마치 한세월인 것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타앙! 퍼억!
총성이 울렸다.
나나는 순식간에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처박혔다.
콰당!
“으…… 으…… 젠장.”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고 재빨리 일어나 주차되어 있는 차량 중 하나에 숨었다.
“……이 개X끼! 너 누구야!”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두통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물론 일격에 탈리스만 방어장을 뚫고 각성자에게 상처를 냈다는 것 자체가, 그 총이 보통 총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고화력 저격용 마나건.
지금 나나를 노리는 건 범상치 않은 장비를 갖춘 프로다.
“너…… 내 눈앞에 보이면……!”
타앙!
터터터터텅!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탄환은 비행 궤적 상에 서 있던 모든 차량을 꿰뚫고 그녀의 바로 옆 바닥을 두드렸다.
다행히 시야가 가려져서 그녀의 정확한 위치를 맞추지는 못했다.
‘지금이다!’
사격이 빗나간 지금.
지금이야말로 저격수에게 접근할 최적의 타이밍이다.
타앗!
차량 밖으로 뛰쳐나가 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에, 정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죽여!”
“우라아아아아!”
온 사방에서 흉흉한 살기와 함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매복하고 있던 수십 명의 각성자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이…… X발.”
나나는 그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 * *
펑! 콰쾅! 쾅!
“개 같은 새끼들! 아악!”
나나는 사방에서 뛰어드는 각성자들을 상대로 홀로 혈전을 벌였다.
대인전 하나만큼은 타고난, 칼리닌스카야의 수석 사냥개.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혼자 이 많은 각성자들을 다 감당해 낼 수는 없었다.
뻐억! 까드득!
“으헉!”
뒤에서 날아온 양손망치가 그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방어장은 진작 깨진 상태였고, 맨몸으로 공격을 받아낸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생생하게 느꼈다.
“끄윽…… 뒤져!”
부웅!
그대로 회전하며 손등으로 후면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사신의 주먹은 애꿎은 공기만 가를 뿐이었다.
쾅!
“끅!”
헛손질의 대가는 무거웠다.
옆구리를 가격했던 양손망치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내리찍은 것이다.
한순간 의식이 끊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느려지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바닥이 저 스스로 눈앞까지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죽는다!’
그것은 곧 죽음.
나나는 죽지 않기 위해 불굴의 정신력으로 버텼다.
본능으로부터 끓어오른 생존 의지가, 자신으로 하여금 경계를 넘어 비인간의 영역에 닿게 만들었다.
{당신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습니다.}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는 환각 상태에 돌입합니다.}
{액티브 스킬 <버서크 트랜스>를 습득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한 가닥 빛이 그녀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으아아아아아!”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선명하게 돌아온다.
아니, 그 선명함은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진해서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크아아아!”
나나는 괴수처럼 포효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펑! 펑! 펑!
그건 기술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살의를 가득 담은 주먹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설픈 권능보다 훨씬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저, 저거 잡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내몰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투지가 되살아난 그녀를 보고서 습격자들은 당황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빠르고 맹렬하게 날뛰는 그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몸을 던져 나나의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다.
퍼퍼퍽!
하지만 한 번의 스윙으로 몸을 던진 세 사람 모두가 나가떨어졌다.
마치 사석포라도 맞은 것처럼, 타격한 부위가 깔끔하게 꿰뚫린 채로 말이다.
“저격수! 저격수!”
급기야는 멀리서 상황을 주시하던 저격수를 불렀다.
다수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총을 쏘면 아군 오인사격이 될 가능성이 높기에 사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타앙! 푸확!
저격용 마나건이 그녀의 오른다리를 꿰뚫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두꺼운 탄환은 뼈와 살을 짓뭉개며 거대한 사출구를 만들었다.
덕분에 다리는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털썩.
나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럼에도 버서크 트랜스 상태가 풀리지 않았기에,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끄으으! 이 개X끼들아!”
“저격수! 빨리 총으로 쏴 죽여!”
하지만 멈추지 않는 투쟁심도 거기까지.
아무리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한들, 발을 움직이지 못하면 원거리 공격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사수가 다시 총구를 겨누고, 발악하는 나나의 숨통을 끊으려던 그때.
“어?”
“너희들 뭐야?”
위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한 무리의 양복 입은 자들이 현장을 발견했다.
그들은 오늘, 나나의 상관이 불러 모은 측근들이었다.
“저 자식들, 배신자 놈들인 것 같습니다!”
“뭐? 이것들이……!”
그리고 서로가 적임을 확인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차장에 새로 나타난 인물들은 곧장 집단 난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푸확! 투쾅! 타타타탕! 챙!
그건 전쟁이었다.
창과 칼과 탄환이, 불꽃과 번개가.
분별없이 온 사방을 가득 뒤엎는 각성자들의 전쟁.
수많은 조직원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었다.
기둥이 쓰러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드넓은 지하 주차장은 곧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통 시체로 가득한 폐허로 변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큭…….”
그 잔혹한 아비규환은 종막에 이르러 승자 없는 싸움이라는 결말을 맺었다.
나나를 습격한 괴한들, 그녀를 지키려던 측근들.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몇몇은 더 이상 전투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중상을 입은 상태가 되어서야.
지하 주차장에서의 혈전은 멈출 수 있었다.
“나나 님…… 괜찮으……십니까……?”
조직원 하나가 앉아 있는 나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반파된 차에 기대어 반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혈이 깊다.
몸이 나른해지고 힘이 주욱 빠지는 기분이었다.
“다행…… 입니다.”
털썩.
그녀의 안부를 물은 남자는 빙긋 웃으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곤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
나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희미해져 가던 의식 속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유신우…….’
환상이라도 보이는 걸까, 라는 생각에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운동복에 검은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이 말이다.
‘……어떻게…… 아.’
그녀는 그제야 지금까지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전 자신을 습격했던 그 괴한들.
그는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다른 이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주변을 맴돌며 그저 구경만 하던, 어수룩해 보이던 인물.
그게 유신우였다.
그는 각성자들의 시체가 가득한 주차장 안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른쪽 눈이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선 마치 지옥의 심연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 끼치는 악의가 느껴졌다.
* * *
“하…….”
검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꼬여버렸다.
당연히 다이아 경매의 낙찰자는 자신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벨그레이브에 가입된 세계 최고 자산가들이 투자한 돈과 초국가적 다이아 수급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들인 시간들이 전부 헛수고가 된 것이다.
[보유 다이아: 3,789,624,111개]
이번 경매를 위해 모아둔, 무려 38억 개에 달하는 다이아가 어느 곳에도 쓰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자신의 손에 남아 있었다.
좋게 생각하면 다음 경매에 쓸 분량을 비축한 거라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자기 위로에 불과할 뿐.
‘대체 어떻게…… 이것보다 더 많은 다이아를 모은 거지……?’
이만큼이나 되는 다이아를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인프라 자체가 국가기관 수준을 넘어선 초국적 기업 수십 군데가 힘을 합쳤기에 가능했다.
연간 200조 원이라는 비용은 둘째 치고, 그 많은 다이아 퀘스트 계약이 검제 본인 한 사람만을 위해 돌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그를 능가한 자가 이번 경매에서 나와 버린 것이다.
-칼리닌스카야…… 분명 그놈들이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한데.
마존이 말했다.
벨그레이브는, 그 다이아 경매의 낙찰자가 칼리닌스카야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보글을 올린 네세 계정의 주인, 두목 미하일로프 본인이 낙찰자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와 관련된 단체가 패치노트를 가져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들은 아주 작은 연결고리만이라도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다이아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면 엄청나게 거대한 집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조사해봤는데, 미국 정부하고도 아무 관련이 없고, 세계 각국의 재벌가들과도 접점이 없었어요.
-러시아 정부하고는?
-아직…… 조사 중이에요.
-그런 난리브루스를 춰놓고도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네?
마존의 대답에 염왕이 비꼬듯 되물었다.
-뭐라구요?
-우리가 심어놓은 정보원들이 발각되는 희대의 실수까지 저질렀으면서 말이지.
-이봐요. 당신…….
-왜?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사실이잖아.
-…….
마존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 말대로, 비밀 결사라는 조직의 정체성이 무색하게 칼리닌스카야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켜 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패치노트’라는 막중한 사안이 걸려 있는 탓에 성급하게 내부정보를 얻으려다 일을 그르친 것이다.
“염왕 씨. 그건 제 잘못입니다. 마존은 그저 제가 내린 판단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 둘 사이의 언쟁에 검제가 끼어들었다.
-쯧.
그러자 염왕은 혀를 차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판단’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좀 더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차후에 각자 판단한 사항을 다시 종합해 보도록 하죠.”
-알겠어요.
-그러지.
벨그레이브는 계속해서 칼리닌스카야의 두목에 대해 파헤칠 수밖에 없었다.
38억 개 이상의 다이아를 구할 재력과 조직, 인프라를 갖춘 거물들 중에.
그 SNS와 관련된 인물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 오직 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프…… 대체 네 뒤엔 뭐가 숨어 있는 거냐.’
통신을 종료한 검제는 한참 동안 방 안에서 책상에 팔을 괸 채 이마를 짚고 있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조금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후우.”
검제가 가면을 벗었다.
마치 피부와 결합되어 있는 것 같던 그 기이한 가면은 마법이 풀리며 얼굴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갈색이었던 긴 생머리도 금발로 돌아왔다.
검제의 진짜 정체.
대중에게는 그저 프랑스의 SNS 인플루언서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실상은 명품 제국이라 불리는 ‘루이 비앙 & 크리스티앙 뒤샹’의 알려지지 않은 상속인.
레아 아르노가 오랜만에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