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07화 (107/108)

<-- 빗속의 여인 [完] -->

“얼굴에 조금 흠집을 내 볼까나.”

그가 웃는다.

“그럼 내 동생의 선택이 쉬워질지도 몰라. 안 그래?”

그가 칼을 높이 들었다. 그때 그가 기침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큰 기침이었다. 독이 퍼지고 있는 신호이기도 했다. 나는 순간 재빨리 시선을 옮겨 제롬을 바라보았다.

“제롬!”

틈을 타 그를 불렀다.

“도와줘요!”

제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때, 요나단이 피를 토했다. 그가 목을 틀어막았다. 그는 숨을 쉬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보였다. 제롬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도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독살이다!”

어느 병사의 경악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때 내 흔들리는 시선이 허공에서 아그니스의 것을 만난다. 아그니스가 내게 웃어보인다. 그녀가 찬란하게 웃으며 제 황금 잔을 들어올린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요나단 화이트는 아그니스에게 독살당한 것이었다.

요나단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순간이었다. 아그니스가 그녀 옆에 있던 병사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내들었다. 그리고 누가 말리기도 전에…….

요나단의 등에 칼을 꽂아넣었다. 요나단이 피를 토해내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해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그니스는 수차례 요나단을 찔렀다.

“저 여자가 요나단 화이트를 죽였다!”

한 병사의 말이 떨어지자 제롬을 포위하던 병사까지 달려가 아그니스를 둘러쌌다. 나는 허망하게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된 요나단을 바라본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잠깐.”

제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제롬을 본다.

“내 가문의 갑옷이군, 그거.”

“…….”

“개새끼가 주인을 물었구나.”

그가 더없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손짓 하나에 병사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들은 살려고 파닥이는 것 같았다. 바닥에 구르고 와인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지만 곧 생명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내가 놓인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할 말을 잃었다. 나를 궁지에 밀어넣어 제롬을 자극하자는 계획이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나는 결백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형제를 살해하려 한 죄인이었다.

그리고 죽음. 죽음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가만 바닥에 나뒹구는 요나단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도 살아숨쉬던, 그랬던 사람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죽어있었다.

그리고 그 병사들. 인간의 것이 아닌 비명을 지르며 타죽은 병사들이 있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왜 분노 하나로 어리석게 이런 대참사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나의 이런 행동에 대한 결과는, 내일 있을.

사형.

그러자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이 차올랐다. 죽기 싫었다. 어서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치다 가까운 후문이 보이기에 그 쪽으로 뛰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실외의 것.

후문을 나가서는 한참동안 뛰었던 것 같다. 무책임하게. 그저 죽음이 두려워서 뛰었다. 몇 번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넘어져도 뛰었다.

숨이 차올라 자리에 잠시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이 명료해졌다.

나는 사형수였다. 그리고 요나단의 유언이 공개되면, 그를 죽인 사람 또한 되는 것이었다. 나는 등을 돌려 다시 슐츠 가문의 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슐츠 가문의 성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슐츠 가문의 성이.

나는 저것이 직감적으로 제롬의 불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감정을 자극한 결과이자, 내가 원했던 그 최후였다. 하지만 마음 한 쪽이 아리다 못해 끔찍하게 아팠다.

죄책감, 죄책감, 죄책감이 밀려왔다. 분명 ‘악’ 인 요나단을 무너트렸는데도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것은 싫었다. 내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진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나는 고민했다. 이 땅에 더 이상 나를 위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죄인이다.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나는 죄인이었다. 죽어마땅한 사람이 되어 기꺼이 모든 것을 떠안고 떠나자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했을 땐 지금을 예측하고도 떨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이 그 그림자를 키우고 내 앞에 다가와있는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아프기 싫었다. 오늘 밤 죽은 그 사람들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로.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일상으로? 카밀리아에게로? 제롬에게 살려달라고 바짓자락이라도 잡고 빌어야 하나. 생각이 그쯤 미쳤을 때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지나. 지금이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내게 다가오는 형체가 보인다. 제롬이었다. 나는 체념하고는 익숙한 그의 상에 안도한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는데 나는 웃어보였다.

“…….”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사랑하는 이.

그가 화가 나 있다 해도 나는 그의 분노를 감내할 것이었다. 그가 내게 선사하는 죽음은 아마 예정된 것보다 더 편안할 것이다. 그는 불타는 성채를 뒤로 하고 내 앞에 있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으로 가시지요. 피곤하실 겁니다.”

“……저 불.”

내 손가락 끝이 불타는 성채에게로 향했다.

“안에는 사람, 없는 거겠죠?”

“있습니다.”

제롬이 낮게 웃는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저 안에 있습니다.”

“……네?”

“제가 저 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그러니까.”

“예.”

제롬이 내 팔을 잡아 나를 일으킨다.

“세상과 당신 중에서 당신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정신이 멍해졌다.

“당신이 의도한 대로 말입니다.”

“…….”

“귀여운 일을 벌이려 하셨더군요. 왕세자비에게도 도움을 다 요청하고. 그거 다 빚입니다. 다음 부터 이런 일을 계획할 때, 충분한 상의를 통해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롬이 무언가를 더 말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는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렇다면.

“아그니스도 저 안에 있나요?”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이 멈춘다. 하지만 제롬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낮게 웃는다.

“세상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오늘은.”

그는 미쳤다. 생각보다도 더, 내게 미쳐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내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해 보겠다며 당치도 않은 일을 벌인 까닭이었다. 불에 타죽은 사람들이 기억난다. 그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안에 있는 사람 모두 그럴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 중에서는 아그니스도 있을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롬의 팔이 내 허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그니스가 저 안에 있었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했다.

눈물이 났다. 내 잘못이었다. 그때 정신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자꾸만 무언가가 밀려들어왔다. 복잡한, 복잡한 말들이었지만 나는 정말 간절히, 간절히 단 하나만을 바랐다. 비. 비가 와서 성채의 불을 꺼주기만을 바랐다. 정신이 나가는 순간까지 그랬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대기가 알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쳤다.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생각하는 와중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그때, 비가 왔다. 내 감각이 말해주길 머리에, 목에, 피부에 차가운 물이 방울져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비 냄새와 함께 시작된 가랑비는 결국 장대비가 되었다.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땅이 그런 것처럼 내 의식 또한 점점 젖어들어 무겁게 가라앉는다. 너무나도 끔찍하게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꿈인 것만 같았다.

율리아, 아그니스. 속으로 읊조렸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하늘에 속살거리던 언어. 그것은 바로 물의 언어였다. 내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그 섬세한, 특별한,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던 물의 속삭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참혹한 순간, 나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물의 언어술사는, 나였음을 깨달았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것은 화이트 가문의 익숙한 천장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이거 다, 꿈이었구나. 그렇지? 나는 허탈하게 웃는다.

아마 이것은 다 꿈이었을 것이다. 꿈. 나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네 번째 손가락에 익숙한 반지가 끼워져 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윽.

어깨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잠옷을 내려보니 어깨에 멍이 들어 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무도회에서의 일이 다 꿈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 손을 바라본다. 목이 마르다 생각했더니 손바닥 위 허공에서 물방울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발버둥을 치다 침대 바닥으로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으, 요나단에게 맞은 곳이 아직도 아팠다. 나는 손을 가까스로 들어 침대 옆 줄을 당겼다. 곧 방 안으로 하녀들이 들이닥쳤다. 하녀들이 문을 여는 것이 거꾸로 보인다.

“레이디!”

그들이 바닥에 나자빠진 나를 들어 다시 침대 위에 올려주었다. 나는 온 몸이 욱신거려 눈살을 가만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오, 오늘이 몇일이지?”

“5, 5월 26일이요, 레이디.”

“5월 26일?”

“재판으로부터 3일 지났어요.”

이틀을 꼬박 잤다는 말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제롬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그가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하녀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방 밖으로 향한다.

“슐츠 가문의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때 분명 비가 왔었는데. 나는 조금의 희망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요나단과 그의 잔당들을 제외하고는 부상자는 있지만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그 때 분명 비가 왔어요.”

“그 사람들 운도 보통이 아니군요.”

그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다른 얘기는 이제 그만 해도 좋습니다. 쉬십시오.”

제롬이 내 볼에 입을 맞춘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나는 그의 큰 손 위에 내 것을 올려놓는다.

“슐츠 가문의 성이 불탔어요.”

“…….”

“당신의 형의 유언장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그 유언장도 슐츠 가문의 성과 함께 불탔습니다.”

“네?”

“유언장.”

제롬 특유의 차분하고 정돈된 듯한 톤의 목소리였다.

“제 형이 누구에게 맡기신지 알고 계십니…….”

그의 눈빛이 나를 조심스레 살핀다.

“아닙니다.”

그리고 웃어보였다.

“평생 모르셔도 될 듯 합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그니스는 괜찮은가요?”

“…….”

“아그니스는.”

“살아 계십니다. 다만.”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큰 부상이지만 치유 가능한 범위입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내 세상을 위해 타인의 것을 부쉈다. 차라리 이렇게 대책이 없을 거였다면 이 비극까지 하찮게 여길 뻔뻔함이라도 챙겼어야 했다.

“율리아는요?”

“곧 이 나라를 떠납니다.”

“어째서요.”

“카사로 제국의 어느 귀족이 그녀를 원했을 지도 모르죠.”

“제 친구도 제 곁을 떠나는군요.”

“그녀는 세실리아의 친구가 아닙니다.”

“어째서인지 묻고 싶지 않아요.”

나는 갑자기 침울해진 기분에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어떤 길을 걸어나갈 것일까. 그것이 중요했다.

“국왕 폐하께서는 영웅 아그니스 카터 경께 백작위를 하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그니스가 언제 나라의 영웅이 되었죠?”

“이긴 자의 역사입니다.”

제롬이 낮게 웃는다.

“죽은 자들은 없어도 제가 죽인 자들은 많습니다. 요나단이 말도 안 되는 그런 이벤트를 준비해준 덕에 명분도 충분했습니다. 발리타로크의 세력들이 점점 몸을 키우는 게 거슬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다들 요나단을 지지하는 자들이었죠.”

“제 머리에 와인을 쏟아부은 부인도 있었어요.”

나는 불평했다. 그가 내 턱을 잡아 그를 보게 한다.

“이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죽게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당신만을 위해, 제가 선물할 정원입니다.”

그가 다시 내 손을 잡아온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공허하지 않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절제되고 정제된 차분함이 잔잔히 일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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